권정생이 살던 마을과 피난길을 따라
- 《초가집이 있던 마을》 문학기행
이기영
2011년 9월 24일 똘배어린이문학회는 《초가집이 있던 마을》(분도출판사, 1985)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권정생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에 선생님이 살던 집 방문과 문학기행을 신청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한다. 재단에서는 권정생의 삶과 문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이 방문자들을 안내하면 좋을 것 같아 ‘제1회 권정생문학해설사과정’ 교육을 실시하기로 했다. 2011년 4월부터 11월까지 총 12회에 걸쳐, 권정생의 삶과 문학에 대해 공부하는 것부터 《한티재 하늘》(지식산업사, 1998), 《몽실 언니》(창비, 1984), 《초가집이 있던 마을》 문학기행까지 교육내용은 다양했다.
재단에서는 《권정생의 삶과 문학》(원종찬 엮음, 창비, 2008)에 ‘권정생 연보’를 정리하여 쓴 내게 강의를 부탁해 왔다. 나는 이 교육의 첫 강 ‘권정생의 삶과 책 속의 삶 이야기’를 강의하기로 했고, 강의시간표를 보고 《초가집이 있던 마을》 문학기행이 예정되어 있는 걸 알게 되었다. 교육생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기행이었지만 강의 인연으로 똘배어린이문학회 회원들과 똘배들의 오랜 지기인 최해숙 선생님이 이 문학기행에 함께하기로 했다. 평택에 있는 기쁜어린이도서관 관장이신 최해숙 선생님은 어린이도서연구회 송탄지회에서도 활동하고 있으며 권정생 선생님을 무척 존경하고 사랑하는 제자이며 동무이기도 하다. 최해숙 선생님과 똘배들은 어린이도서연구회에서 처음 만났고 함께 ‘권정생 기행’을 떠난 건 이번이 두 번째다. 권정생 선생님이 다녔던 일본 도쿄 혼마치 소학교를 2009년 7월 함께 방문했고, 《슬픈 나막신》(우리교육, 2002)에서 준이와 아이들이 혼마치에서 신주쿠까지 걸었던 그 길을 함께 걷기도 했다. 최해숙 선생님과 똘배들은 오랜만에 함께 나서는 ‘권정생 기행’에 마음이 들떴다.
그런데 출발 하루 전 일정이 다른 날로 변경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일껏 날을 비워둔 터라, 문학기행이라는 걸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모르지만 우리끼리 한번 가 보기로 했다. ‘우리끼리’ 간다고 마음먹으니 갑자기 분주해졌다. 우선 도서관에 가서 5만분의 1 지도를 펼치고는 부분부분 복사해서 ‘안동’에서 ‘우보’까지 길게 이어 붙였다. 책에 나오는 지명을 찾아 형광펜으로 표시하고 국도는 빨강색, 지방도는 파란색, 중앙선 철도는 초록으로 표시해 그 지역의 교통과 지형을 머릿속에 익히고 일정을 잡았다. 이렇게 제법 꼼꼼히 준비한다고는 했지만 여행을 꼭 일정대로 하란 법은 없다. ‘우리끼리’라고 생각한 순간부터 똘배들은 문학기행에 나선다기보다는 ‘권정생’을 핑계 삼아 즐거운 여행길에 올라 보자는 마음이었다.
권정생과 《초가집이 있던 마을》
6. 25 전쟁을 배경으로 한 《초가집이 있던 마을》은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몽실 언니》보다 먼저 쓴 것으로, 권정생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많이 반영되어 있는 작품이다. 일본에서 태어난 권정생은 해방 이듬해에 한국으로 돌아와 청송 외가에서 살다가 1947년 안동 일직면 조탑리에 정착한다. 그리고 정착한 다음 해에 열한 살의 나이로 안동 일직공립국민학교에 입학한다. 권정생은 일본에서 학교에 입학한 후 거처를 옮길 때마다 학교도 계속 옮겨 다녔는데(도쿄 시부야 혼마치 소학교, 군마켄 우에하라 소학교, 청송 화목국민학교), 조탑리에 정착한 뒤에 동생과 함께 다시 1학년으로 입학한 것이다. 그러다 전쟁이 일어나 피난길을 나섰고, 1953년 열여섯 살의 나이에 비로소 국민학교를 졸업한다.
일직공립국민학교는 지금의 일직초등학교로 학적부에는 권정생이란 이름 대신 ‘권경수’라는 아명이 남아 있다. 2008년 똘배어린이문학회 회원들은 일직초등학교에 권정생 학적부를 확인하러 간 적이 있다. 학교에서는 권정생의 학적부가 없어 졸업생임을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학교에 양해를 구해 직접 학적부를 뒤졌고, 권정생이란 이름을 두 줄로 긋고 그 위에 권경수라고 고쳐 쓴 기록을 결국 찾아냈다.
《초가집이 있던 마을》은 일직공립국민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겪은 전쟁 이야기로 권정생이 살았던 일직면 탑마을(조탑동)과 이웃 송마골(송리동)을 주무대로 한다. 탑마을에는 4학년인 유준이와 복식이, 2학년인 유종이와 문식이, 1학년인 금동이가 살고 송마골에는 금동이 친구 종갑이가 산다. 학교를 함께 다니는 아이들은 한 가족 같은 형이자 동생이자 동무들이다.
해방 후에도 땅이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나물죽으로 보릿고개를 넘기며 겨우 목숨을 이어 갔다. 보릿고개만 넘기면 또 어찌 살게 될 터였다. 전쟁이 일어나던 그해, 소작 농사를 지었지만 유준이네는 지난해보다 갑절이나 감자농사를 거둬들였고 배냇소를 먹여 송아지를 한 마리 얻어와 식구들이 흐뭇해 있었다. 종갑이네도 보리풍년으로 보리밥이라도 든든히 먹게 되었다고 기대에 차 있었다. 바로 그럴 때 전쟁이 터졌다. 피난을 가든지, 마을에 남아 있든지 아이들은 전쟁으로 죽을 만큼 힘든 보릿고개보다 더 고통스러운 고개를 넘게 되었다.
유종이는 애지중지 키우던 병아리를 두고, 금동이는 강아지 복실이를 두고, 종갑이는 배를 채워 줄 보리쌀을 두고 피난을 떠났다. 유준이는 피난길에 송아지를 잃었다. 아이들에게 병아리, 강아지, 보리쌀, 송아지는 특별했다. 그것은 굶주림을 벗어나게 하고 중학교 갈 꿈을 꾸게 하고 외로움을 달래 주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이 모두를 무참히 빼앗아갔다.
권정생의 실제 삶도 그랬다. 전쟁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몇 번이나 학교를 옮겨 다니다가 정착해서 다시 1학년에 입학한 권정생은 성적이 우수했다. 선생님은 2학년 때 3학년으로, 3학년 때 5학년으로 월반할 것을 권했지만 어머니는 반대했다. 상급반은 학교를 늦게 파해서 집안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어머니는 행상을 다니느라 닷새 만에 돌아오는 장날이면 집에 잠시 들렀다가 다음 날이면 바로 또 나갔기 때문에 집안 살림을 할 수가 없었다. 행상으로 돈을 모아 권정생을 중학교에 보내려 했던 어머니는 선생님에게 일 년 정도 돈을 모을 때까지 월반을 시키지 말아 달라고 했다. 권정생은 학교를 다니며 집안을 돌보았고, 어머니는 어느덧 소 세 마리를 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았다. 바로 그럴 때 전쟁이 났다. 전쟁은 중학교 진학의 꿈을 빼앗아 갔다. 화폐가치가 백 분의 일로 떨어져 소 세 마리를 살 수 있었던 돈으로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정생은 중학교를 포기하지 않았다. 졸업을 앞두고 스스로 중학교에 갈 학비를 모으기 시작했다. 지게를 만들어 갈비(불쏘시개로 쓰던 솔가지)를 긁어서 내다 팔아 암탉을 사서 키웠다. 암탉을 키워 돈을 모으면 일 년 뒤에는 중학교를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전쟁의 악몽은 이때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전쟁과 함께 닭 전염병이 덮쳐 백 마리가 넘는 크고 작은 닭이 일주일도 못 가서 모조리 죽었다. “온 식구가 엉엉 울”(〈열여섯 살의 겨울〉, 《밭 한 뙈기》, 아리랑나라, 133쪽) 만큼 억울했지만, 권정생은 절망하지 않고 객지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객지생활 끝에 평생 안고 갈 병을 얻었다. 열아홉 살에 결핵을 앓기 시작한 것이 늑막염, 폐결핵, 부고환결핵으로 이어졌고 끝내는 콩팥과 방광을 들어내는 수술을 하여 서른 나이부터 바깥으로 소변주머니를 달고 살았다. 권정생은 결국 전쟁 때문에 중학교 진학의 꿈도, 건강도 잃게 된 것이다.
《초가집이 있던 마을》에서 복식이도 권정생처럼 1등으로 국민학교를 졸업하지만 중학교에 가질 못했다. 피난을 가지 못해 마을에 남았던 복식이네는 아버지가 인민군을 따라 월북을 했다. 아버지도 안 계신데, 복식이가 중학교에 가자면 식구들이 먹고 살아갈 논을 팔아야 하는 형편이었다. 복식이는 단념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그래서 아버지가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복식이는 중학교를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고 안타깝게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 국군 징집영장이 나오자 복식이는 인민군이 되어 있을 아버지와 총부리를 맞댈 수 없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복식이는 전쟁이, 더구나 아버지와 아들이 총부리를 겨누는 이 싸움이 얼마나 처참하고 사람답지 못한 것인지 절규하며 농약을 마셨다.
이 동화에서 4학년이었던 유준이와 복식이가 왜 전쟁이 일어났는지 의문을 갖고 성장하는 과정은 그 나이 무렵 전쟁을 겪었던 바로 권정생 자신의 물음이었다. “공산주의, 자본주의가 대체 무엇이기에 사람의 목숨을 마음대로 앗아 가는지”(머리말, 《초가집이 있던 마을》) 유준과 복식, 그리고 어린 권정생은 궁금했다. 권정생은 자신이 겪고 궁금해 했던 6. 25를 《초가집이 있던 마을》에 담아 내며 “과연 육이오 전쟁은 왜 일어났는지 다 함께 생각해”(같은 곳) 보길 바란다고 했다.
피난길
문학기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금동이, 유준이네가 떠났던 피난길을 따라가 보고 싶었다. 금동이, 유준이네는 ‘탑마을’에서 ‘운산’을 지나 ‘이리골 고개(삼밭골)’를 넘어 ‘의성’을 거쳐 남으로 남으로 걸어서 ‘우보’, ‘영천’에서 ‘대구’까지 갔다.
‘이리골 고개’는 《한티재 하늘》에서 수동댁이 주막을 했던 바로 그 고개이기도 하다. 딸 정원이가 이석, 이순, 이금이 삼남매를 데리고 친정어머니 수동댁을 찾아왔을 때 수동댁이 먹고 살 길을 찾아 주막을 차린 곳이 바로 이리골 고개(이릿재)였다. 이리골 고개는 삼밭골 골짜기 중의 하나로 탑마을이나 송마골에서 이 고개를 넘어 남쪽으로 쭉 가면 대구다. 송마골에 사는 종갑이와 탑마을 금동이는 이리골 고개를 향해 걸어가다 만나 함께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이들이 ‘이리골 고개’를 넘어 ‘의성’을 지나 ‘우보’에 도달하기까지 나흘이 걸렸다. 이리골 고개를 넘을 때만 해도 아이들은 조금도 고달프지 않았고 소풍이라도 가듯 콧노래를 부르며 재잘댔다. 그러나 의성 지방을 지나자 소풍처럼 즐겁던 피난길은 본색을 드러냈다. 기차역 주변이나 물가에서 쉬며 잠시 잠이 들었다가도 총을 멘 헌병들이 “후퇴”를 외치면 다시 짐을 챙겨 걸어야 했다.
권정생도 그랬다. 피난길에서 영천 가까이에 있는 화산이란 시골정거장 건너 강변에 천막을 쳐 놓고 자고 있는데 전쟁이 들이닥쳤다. 그는 홑이불 천막만 훌렁 걷어서 밤새 산길을 걸었다. 다음 날 해가 솟자 지난 밤 강변에다 천막을 쳤던 버팀목은 두고 천막만 걷어 온 걸 알게 되었다. 버팀목이래야 2미터쯤 되는 나무 막대기에 불과했지만 여름 뙤약볕을 피하려면 가장 요긴한 재산이었던 것이다. 권정생은 그걸 찾으러 십리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그때, 나이 열세 살이었던 나는 겁도 없이 강변에 두고 온 버팀목을 가지러 간 것이다. 잠깐이면 닿을 것 같던 것이 십리 길이나 되는 길이 무척 멀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러면서 가다 보니 되돌아 올 수도 없어서 끝까지 강변까지 간 것이다. 사방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는 텅 빈 강변에 지난 밤 피난민들이 버리고 간 잡동사니들이 흩어져 있었다. 나는 우리가 있던 강바닥에서 기다란 막대기들을 주워 새끼로 꽁꽁 묶었다.
그때였다. 바로 내 양쪽 옆으로 노란 구릿빛 불똥 같은 것이 자갈밭 돌멩이에 탁탁 퉁겨져 스쳐가는 것이었다. 소리도 별로 나지 않아 처음엔 무심코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것이 내 등 뒤편에서 날아오는 총탄인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서둘러 묶어 놓은 막대기를 단단히 새끼짐바로 등에 꽉 붙도록 졸라매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면서 멀리 북쪽을 바라보니 처음엔 아무도 보이지 않던 강변 여기저기에 조그만 의지할 수 있는 둔덕 밑이라면 수많은 군인들이 엎드려 있었다. 정말 총소리가 나지 않아서였는지, 내가 총소리를 못 들었는지, 그 당시엔 내 귀엔 너무도 조용한 전쟁터였다. 그렇게 조용한 곳에서 구릿빛 빛줄기가 쭉 쭉 날아와 강바닥 자갈밭에 부딪쳐 튀어오르는 것만 눈으로 보았을 뿐이다.
야트막한 바위산을 넘어 골짜기에 들어서자 나는 다리가 떨려 몇 번이고 주저앉을 뻔했다. 그런데도 그냥 필사적으로 헐떡헐떡 뛰어가기만 했다. 온 몸에 땀이 비 오듯이 흐르고 아무 생각도 느낌도 없어졌다.
식구들이 기다리는 곳에 왔을 때는 사방이 어두워질 무렵이었다. 그렇게 죽자고 뛰었는데도 걸음이 영 빠르지 못했던 모양이다.
사람이 평생 살아가다 보면 몇 번은 죽을 고비가 닥친다지만, 내가 겪었던 6·25의 그날은 과연 말 그대로 죽을 고비였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온 몸이 오싹해지고 두 다리가 후들 후들 떨려올 만큼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구릿빛 총탄이 날아오던 날〉, 《한국논단》 1992. 6)
권정생은 피난길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본 수많은 죽음의 장면을 《초가집이 있던 마을》에 그대로 담아 냈다. 사람의 발이 신겨진 구두짝, 무덤 밖으로 쑥 나와 있는 손가락, 아카시아 숲 속에 엎드려진 채 버려진 흑인 병사, 반쯤 물에 담겨 뒤로 넘어진 군인, 지뢰를 밟아 형체도 없이 죽은 아이……. 너무도 무참한 죽음이었다.
종갑이 할머니도 그 참혹했던 피난길에 돌아가셨다. 종갑이는 할머니의 시신을 수습하고 할아버지와 둘이 쓸쓸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유준이와 금동이네는 대구 금호강 변두리까지 갔다가 더 이상 남쪽으로 가지 않고 있다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는 하루 백리를 넘게 걸어 이틀 사이에 고향의 절반을 걸었고, 나흘 만에 우보, 일주일 만에 의성에 도착한다. 의성에서 조금 가면 삼밭골로 가는 샛길이 나오는데, 금동이 누나 금아의 시댁이 바로 삼밭골이다. 피난길에 결혼한 금아는 남편 정식이 군대에 끌려갔기 때문에 시댁 식구들을 따라 삼밭골로 가지 않고 친정 탑마을로 갔다. 금동이네와 유준이네는 금아네 시댁 식구들과 헤어져 이리골 고개를 넘어 운산장터를 지나 고향마을에 도착했다. 대구까지 갈 때는 3개월이 넘게 걸렸는데 돌아올 때는 하루 백리, 약 40km 되는 길을 걸어 한 달도 안 걸려 돌아왔다. 4개월여에 걸친 피난이 끝났다.
《초가집이 있던 마을》을 읽었을 때, 피난길에서 겪은 고통과 공포가 오랫동안 생생하게 마음에 남아서 이번에 그 길을 따라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하루 일정에 탑마을에서 대구까지 걷기란 무리이고, 그렇다고 뻥 뚫린 길을 차로 휭하니 달려갔다 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길고 참혹했던 피난길은 마음으로 되새기고, 마을 주변과 학교를 중심으로 둘러보는 일정을 꾸렸다.
운산마을
아침부터 서둘렀지만 안동에 도착했을 때는 1시가 조금 넘었다.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나들목을 나와서 조탑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조탑동이다. 우리는 조탑동으로 바로 가지 않고 914번 지방도로 조금 더 가다 오른쪽으로 길이 나 있는 운산마을로 갔다. 운산은 조탑동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신작로 가에 있어 조탑동보다 크고 번화했다. 지금은 번화하다는 말이 무색하게 조용한 시골마을이지만 그래도 운산역, 일직면사무소, 우체국, 파출소도 있고 안동 시내를 오가는 버스정류장도 여기에 있다. 권정생 선생님이 안동 시내에 오갈 때 버스를 타고 내리던 곳이 이 운산 버스정류장이었을 터다.
먼저 운산역을 갔다. 운산역은 유준이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돈 벌어 야학에라도 다니겠다고 청운의 꿈을 꾸며 서울로 떠날 때 기차를 탔던 바로 그곳이다. 지금은 열차가 서지 않아 인적이 없고 화물열차만 큰 소리를 내며 지나다니고 있다.
운산역에서 신작로 쪽으로 약 800m거리에 운산장터가 있다. 금동이와 유준이네가 피난길에서 돌아올 때 삼밭골에 사는 금아 시댁식구들과 헤어지고 나서 한나절 조금 지나 도착했던 장터가 여기다. 또 종갑이 할아버지가 삼베 보자기를 들고 나가 팔아서 가엾은 종갑이에게 쌀 석 되와 소금에 절인 간고등어를 사다 준 곳도 이 운산장터다.
종갑이는 금동이한테 이양(언약)떡 하나 얻어먹고 탈이 났다가 겨우 일어났을 때 할머니가 “오늘 운산 장인데, 꽂감 사 줄까?”(38쪽) 했는데 한참을 망설이다가 “고기하고 쌀밥하고 먹고 싶다”고 말해 가슴을 먹먹하게 했었다. 장터로 들어서는데 인적은 없고 바닥에 발라놓은 콘크리트가 뜨거운 햇볕에 열기만 뿜어 내고 있었다. 그래도 시장방앗간에서 풍겨 나오는 고소한 냄새가 옛 장터임을 알리고 있다.
일직공립국민학교
유준이네 마을에서 2킬로쯤 동쪽으로 넓은 중들이 있다. 중들을 가로질러 북으로 길게 철길이 나 있고, 철둑길 너머엔 신작로가 있다. 먼물동네(원호동)가 이 신작로를 끼고 올망졸망 집들이 모여 있다. 마을 남쪽 끄트머리쯤, 바로 신작로 가에 실버들나무가 교문 양쪽에 서 있다. “일직공립국민학교”라는 판자쪽 간판이 오른쪽 교문 기둥에 걸려 있다. 교문을 들어가면서 왼쪽에 얼마 전 만들어 놓은 무궁화동산이 곱게 다듬어져 있고, 동산 앞에 천하대장군님이 우뚝 버티고 섰다. (21쪽)
이어서 우리는 일직초등학교에 도착했다. 학교와 탑마을 사이에는 중앙선 철길이 남북으로 나있고 학교는 동쪽, 탑마을은 서쪽에 있다. 학교에서 탑마을을 가려면 철길 아래 굴다리를 지나고 넓은 중들을 지나서 미천(낙동강에서 갈라져 내려온 냇물), 송양천(미천에서 갈라져 마을 앞으로 흐르는 냇물)을 건너야 한다.
금동이와 종갑이는 학교가 파하면 나란히 손을 잡고 보리밭 들길을 지나서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강변에 앉아 물위를 스칠 듯 말 듯 날아가는 물총새도 바라보고 차돌멩이를 물속에 집어 던지기도 하며 놀았다. 그리고 까툴복숭아 나무가 줄지어 있는 송리동 마을 입구에서 종갑이와 금동이는 헤어진다.
유준은 6학년 졸업을 하던 날, 이제 마지막으로 다니는 학교인데도 왠지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굴다리 아래를 지나고 중들 강물 돌다리를 건너고 하냇들을 지나도 아무 감정이 들지 않더니만 송리동 들머리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서러워졌다. 마을에 들어서자, 국민학교 졸업만으로 학교 공부를 끝내야 하는 허전한 마음이 북받친 것이다.
금동이와 유준이네가 피난에서 돌아오는 길에 멀리 보이는 학교를 보니 실버들 나무도 교사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불그레한 잿더미만 남아 있었다. 그때 모두 불타 버렸으니 지금 교문 양쪽에 실버들나무도 없고 판자로 만든 현판도 없다. 물론 무궁화동산과 천하대장군님이 있을 리도 만무하다.
지금 학교는 교문을 대신해 입구 양쪽에는 커다란 플라타너스가 서 있고, 판자로 만든 현판 대신에 오른쪽에 ‘일직초등학교’ 왼쪽에 ‘일직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이라고 써 놓은 돌이 땅바닥에 나란히 놓여 있다. 불타 없어진 천하대장군님은 이순신 장군님으로 바뀌어 플라타너스 나무 옆에 우뚝 버티고 있다. 이렇게 모두 바뀌었지만 《초가집이 있던 마을》 주인공 아이들의 추억과 눈물이 서려 있는 일직초등학교를 우리는 천천히 둘러보았다.
일직교 - 종갑이와 할아버지
전쟁으로 학교가 다 파괴되어 아이들은 곳곳에 흩어져 공부를 했다. 먼물동(원호동) 학교로, 망호동 양지마을과 음지마을의 서당과 교회당으로 아이들은 먼 길을 다녔다. 망호동 마을은 일직초등학교에서 5번 국도로 가다 일직교를 지나 79번 지방도로 가는 길을 끼고 있다. 《한티재 하늘》에서 신작로 공사를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그때 만든 길이 바로 5번 국도다. 양지마을을 가 보려고 길을 나섰는데 결국은 그 마을에 내리지 않고 79번 지방도로 쭉 가서 고운사까지 갔다. 고운사는 권정생 선생님이 가끔 갔던 곳으로, 이곳을 참 좋아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일정에는 없지만 들러 보기로 한 것이다.
사실 망호동 양지마을을 가 보려 했던 건 그 마을로 가는 길에 있는 다리, 일직교 때문이었다. 일직교는 운산마을 입구 지서(현재, 일직치안센터)가 있는 신작로에서 200m쯤 거리에 있는데 전쟁 때 파괴되었다. 미군 병사들이 부서진 다리 복구 작업을 했는데, 망호동 임시학교를 오가던 아이들은 항상 위태로웠다. 12월 초순 어느 토요일 오후 종갑이가 바로 그 다리 복구 공사장에서 미군 트럭에 치여 죽었다. 종갑이는 망호동 임시학교를 다니지 않았지만 미군에게 껌 한 통 얻어 할아버지에게 갖다 드리고 싶은 마음에 공사장에 갔다가 죽은 것이다. 종갑이 할아버지는 이 소식을 듣고 짚신을 끌어다 신으며 어지러워 넘어지려는 것을 간신히 버티며 정신없이 뛰었다. 송마골 집에서부터 방천둑을 지나 앞냇물 돌다리를 건너고 수재골 비탈길을 뛰었다. 신작로 자갈밭 길 돌고개를 넘어 지서를 지나서 다리 공사장까지 왔다. 지금 길로 봐도 2km는 족히 넘을 거리인데 할아버지는 달렸다. 숨이 차다 못해 콱 막혀 버리면 목구멍을 키운 다음 다시 달렸다. 왼쪽 짚신이 벗겨져 딩굴고 오른쪽 짚신이 벗겨져 달아나도록 달렸다. 운산마을 지나 5번 국도에 있는 일직교를 우리는 차로 단숨에 지나고 말았지만, 종갑이와 할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눈시울이 시큰해진다.
빌뱅이 언덕 작은 집과 조산정
어느덧 짧은 하루 일정으로 돌아본 《초가집이 있던 마을》 기행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빌뱅이 언덕에 있는 권정생 선생님 집과 조산정에 갔다. 조탑동 마을 어귀에 있는 조산정은 선생님이 가끔 올라 쉬었던 곳이라 한다. 조산정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두 그루 있는데 한 그루가 죽어 가고 있어서 안타까웠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니 중앙고속도로에 자동차들이 흡사 폭격기같이 질주한다. 권정생은 승용차를 버리면 파병 안 해도 되고 전쟁도 막을 수 있다 하였다. 뻥 뚫린 찻길은 동네 사람들보다 외지 사람을 위한 거란 말이 정말 실감났다. 차가 너무 많이 시끄럽게 달렸다. 이곳에서 그는 차가 10분에 100대도 넘게 더 지나가는 걸 헤아렸으리라.
서울 사람이 우리 집까지 오는데 빠르면 1시간 반밖에 안 걸린다니 이건 절대 좋아할 일이 아니다.
옛날 어릴 때 동경 폭격이 한창일 때 폭격 소리에 밤에 잠이 들면 밤새도록 긴긴 터널을 빠져나가기 위해 달리고 달리던 꿈을 꿨단다. 꿈에서 깨어나면 온몸에 땀이 흠뻑 젖을 만큼 열에 시달렸다. 눈금이 그어진 병에 담긴 해열제 약을 마시던 일이 엊그제 같다.
그런데 작년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면서 밤이면 맥박이 심하게 뛴다. 숨이 차서 소스라쳐 일어나 맥박을 재어보면 120번이 넘는다. 몇 시간 동안 앉아서 안정을 하고 나면 낮에는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한다.
결핵을 앓으면서 맥박수가 빨라진 건 오래지만 밤이면 왜 이토록 심해지는지 모르겠다.
누가 승용차를 타고 우리 집까지 오는 소리가 나면 흡사 폭격기가 와서 쾅! 하고 부딪는 듯한 착각을 하기도 한다. 우리 집 건너편 고속도로로 지나다니는 자동차를 세어 보면 10분 동안 백 대가 넘을 때도 있다. 저 많은 자동차 때문에 중동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20년 전 빌뱅이 이 집으로 이사 와서 4년 동안 전깃불이 없어 호롱불 켜고 살았는데 그것 때문에 답답하다는 생각은 못했다. 오히려 밤에 별빛과 달빛이 더 밝아 좋았는데, 지금은 밤하늘 별빛도 많이 흐려져 버렸다.
세상엔 하늘에 별이 있고 달이 뜨고 봄에 꽃 피고 새 울고 여름엔 숲이 우거지고 단풍잎이 예쁜 마을이 있고 이것만 해도 살아가는 기쁨이 있는데 제발 모두 욕심 그만 부렸으면 좋겠다.
이따금 눈물을 흘리는 건 괜찮지만 남에게 피눈물 흘리게 해 가면서 살아서는 안 되지 않니.
조금 적게 먹고 조금 춥게, 그리고 조금은 외롭게 살아야만 세상은 깨끗해진다고 본다. (〈민들레교회 이야기〉 557호, 2004년 3월 28일)
결핵으로 시작하여 평생 병마에 시달린 권정생은 서른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앞으로 살날이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 알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일흔을 넘겨 2007년 5월 17일 우리 곁을 떠났다. 사람들은 결핵에는 고기를 아주 잘 먹어야 낫는다고 했다. 그러나 권정생은 오히려 “조금 적게 먹고 조금 춥게, 그리고 조금은 외롭게” 살아서 그만큼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보리밥에 산나물을 먹거나 “쑥을 뜯어 와서 손수 밀가루를 반죽해서 쑥나물 부침개를 구워”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 한길사, 2003, 22쪽) 먹었다. 고기를 살 돈이 없기도 했지만, 나중에 인세를 받아 통장에 돈이 넉넉히 모여 있어도 스스로 가난하게 사는 것을 택했다.
객지에서 권정생이 결핵을 앓고 있는 것을 알고 어머니는 아들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산과 들로 나가 약초를 캐오고 메뚜기, 뱀, 개구리를 잡아다”(《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종로서적, 1986, 213쪽) 먹였다. 권정생은 수기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에서 “벌레 한 마리도 죽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던 어머니지만 자식을 위해 그 많은 개구리를 잡아 껍질을 벗겼다”(같은 쪽) 고 했다. 비싼 약과 고기를 사 줄 형편이 못되니 아들 병을 고치기 위해 어머니는 들로 산으로 몸소 나섰고 권정생은 그런 어머니를 무척 가여워했다. 그렇게 어머니의 정성으로 그의 병세는 호전되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집을 나와 거지로 굶주리며 3개월을 사는 동안 병세는 다시 악화되었다. 몇 차례의 수술 끝에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그에게 돌아온 말은 얼마 살지 못하리라는 사형선고뿐이었다. 그럴 때,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이나 해보자고 쓴 동화가 바로 〈강아지똥〉이었다.
예배당 문간방에서 시작하여 빌뱅이 언덕 작은 집으로 터전을 옮겨 40년 가까이 그는 가난하고 외롭게 살았다. 생쥐와 개구리는 그의 말동무가 되어 준 고마운 동무였다. 그리고 그가 가장 좋아했던 5월에 핀 수수꽃다리, 하늘의 별과 달……. 또 글 속에 자주 등장하는 마을 할머니들도 동무였다. 권정생은 평생 병마의 고통 속에 살면서 많은 글을 남겼다. 하루에 원고지 한 장도 쓰지 못하게 아프면 며칠 동안 끙끙 앓다가 겨우 한두 장 쓰기도 했다. 그런 고통 속에서 글을 쓸 때 어쩌면 외로움마저도 동무가 되었을 것 같다.
몸이 나빠져 기운이 떨어지면 혼자 끼니를 잇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지인들이나 마을 할머니는 그가 좋아하는 닭백숙을 끓여 영양을 보충해 주었다. 산으로 들로 나서서 구해 왔던 어머니의 음식처럼 권정생은 닭백숙을 마음으로도 먹고 몸으로도 먹었을 것이다. 평생 가난하고 소박한 밥상으로 살았던 권정생이 가장 기름진 풍요를 누렸던 것이 어쩌면 닭백숙이 아니었을까.
《초가집이 있던 마을》이 작가의 어린 시절을 잘 담은 작품이다 보니, 이번 기행에서 우리는 어린 권정생을 만나고 온 듯한 마음이었다. 권정생과 친구들이 함께 걸었을 마을길, 학교 길을 실제로 가 보니 책으로만은 만날 수 없는 현장감이 느껴졌고,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며 다니는 길에는 권정생과 똘배, 그리고 최해숙 선생님을 이어 주는 또 다른 감동이 있어 참 좋았다. 9월 말일에 가까운 날이었는데도 무척 더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똘배들은 해 저무는 저녁 권정생 집 마당 평상에 앉아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긴 문학기행을 조용히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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