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금서의 역사인가?
금서조치는 구시대의 관행이었다. 그 폐해를 통감한 사람들이 많아, 서구사회에서는 케케묵은 과거의 유물이 된 지 오래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자 한국사회에서도 청산절차를 밟았다. 그때 월북/재북 문인들의 저작 등 대부분의 금서가 해제되었다.
그런데 21세기 한국사회에 다시 금서 바람이 일어난다. 연전에는 ‘국방부 금서목록’이란 것이 일반에 알려져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여태 국방부가 문제의 목록을 해제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러던 중 금년(2015) 5월 하순, 정부가 금서논쟁의 불씨를 다시 지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각 시도 교육청에 공문을 보내, 공공도서관이 선정한 추천도서에 ‘좌편향’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정부방침에 선뜻 호응한 것이 경기도교육청이었다. 해당 교육청은 일선 학교에 금서문제의 철저한 사후관리를 지시했다. ‘좌편향’ 도서들을 폐기하고, 그런 책을 빌려 본 학생들의 신상을 파악하여 사상교육을 실시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뜻있는 시민들이 깊이 우려하였다. 그들이 속한 여러 단체도 한 목소리가 되어 해당 사안의 중대성을 지적했다. 경기도교육청은 섣부른 조치가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자, 뒤늦게 문제의 공문을 철회하였다.
왜, 이러한 사태가 일어났는지 내막을 자세히 검토해보자. 그러면 금서에 관한 정부당국자들의 인식에 상당한 결함이 드러난다. 그들은 금서조치가 기본권에 관한 제약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것 같다. 아울러 금서목록의 작성이 세계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악습이라는 점도 잘 모르는 것이 아닐까. 일반시민들의 경우에도 금서조치의 문제점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을지 모르겠다. 이 글이 동서양의 몇 가지 사례를 중심으로 금서의 역사를 검토하려는 까닭이 그 점에 있다.
금서의 역사는 ‘문화투쟁’
금서의 역사란 표현의 자유와 검열의 문제를 역사적으로 성찰하는 일이다. 민주시민의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과거에는 기득권층이 검열이라는 수단을 빌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것은 동서양의 역사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탄압의 대상으로 삼았다. 글, 그림, 음악, 연극, 영화 등 일체의 표현물이 그들에게는 감시의 대상이었다. 그중에서도 그들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이른바 ‘불온서적’이었다.
무엇이 ‘불온’하다는 것인가? 기성가치의 타당성을 의심하거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불온’이었다. 각도를 달리해 보면 ‘불온서적’ 또는 ‘금서’의 존재란, 그것을 억압한 기득권층의 결함이나 그들의 역린逆鱗을 투사하는 부정의 자화상이었다.
책은 인간의 사상을 상세하고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나아가 정교한 체계를 부여할 수도 있는 매력적인 매체다. 또, 일단 간행되기만 하면 시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되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있다. 그리스 고대철학자들의 저서들도 그러했고, 기독교의 『성경』 및 공자의 『논어』 등은 모두 책의 위력을 웅변한다. 만일 이런 서적들이 없었더라면, 동서양의 찬란한 인류문명이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움직인 이런 책들이 한때 어디선가는 금서로 지목되어 탄압을 받았다. 금서의 역사가 곧 ‘문화투쟁Kulturkampf’으로 점철되었다는 말이다. 공자와 예수 같이 위대한 사상가와 학자들은 지배 권력의 부패와 모순을 고발하고, 다수를 고통의 늪에 빠뜨린 사회제도 및 관습의 결함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들은 현실의 어둠을 물리칠 방안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기성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새로 대안적 가치와 이념을 제시했다. 그들의 열정과 집념의 정화精華인 새 책을 기득권층은 두려워하였다. 금서란 딱지를 붙여놓고 노골적으로 탄압했던 이유가 그것이다.
금서로 낙인찍혔다는 것은 해당 서적의 인쇄와 판매가 금지될 뿐만 아니라, 독서, 인용 및 소장조차 불법행위로 처벌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금서조치는 언젠가 한계에 봉착해 풀리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한 시절의 금서가 새 세상을 여는 길잡이 노릇을 담당했다. 서구의 절대주의 왕정은 계몽사상가들의 저술을 금서목록에 올려 탄압했지만, 시민들은 그런 책들의 힘으로 봉건잔재를 청산하고 근대시민사회의 문을 열었다.
금서의 전성시대: 로마 교황청의 『금서목록』
‘표현의 자유’는 오늘날 한 국가의 법치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이다. 이것이 충분히 보장된 나라는 살만한 민주국가요, 그렇지 못한 나라는 사실상 독재국가다. 한 나라의 위정자들이 아직도 금서목록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면, 민주주의 국가라는 표현은 겉치레에 불과하다.
표현의 자유가 서구 시민의 당연한 권리로 천명된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1789년 프랑스인들은 〈인권선언문〉을 공포하였고, 그 가운데 “인간의 소중한 자유 가운데 하나”로 표현의 자유가 언급되었다. 그에 앞서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도 표현의 자유를 힘주어 말하였다. 그래서일까. 그의 전기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발견된다.
“저는 당신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 견해로 인하여 누군가로부터 박해를 받는다면, 저는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싸우겠습니다.” 이것은 물론 1906년 볼테르의 전기 작가 이벌린 베아트리스 홀Evelyn Beatrice Hall이 지어낸 말이다. 하지만 서구의 계몽사상가들이 표현의 자유를 중시한 것은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기본권의 개념이 발달한 유럽사회에서도 표현의 자유는 쉽게 허용되지 않았다. 특히 모든 출판물은 철저한 검열의 대상이었다. 역사적으로 그 뿌리는 깊었다. 서구세계에서 최초로 검열을 제도화한 것은 16세기의 로마 교황청이었다.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출판이 활발해지자 교황청은 검열을 더욱 강화한 것이다. 즉, 1501년 교황 알렉산더 6세Alexander VI는 교황청의 허가 없이는 어느 누구도 책을 출판할 수 없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이단사상의 유행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영국 왕은 1557년부터 특정한 소수 인사들에게만 출판권을 허가했다. 17세기 전반이 되자 이러한 통제에 불만을 품은 상당수 영국인들은 네덜란드로 이민을 떠났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관용적인 네덜란드에서 마음껏 출판에 종사하기를 희망하였다.
1559년 교황청은 최초의 금서목록까지 제정했다. 그 목록은 교황청의 종교 및 세속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개인의 의견과 사상을 극도로 통제한 결과였다. 문제의 목록은 교황청이 제정하였으나, 각국의 출판을 실제로 통제한 것은 왕과 귀족으로 대표되는 세속의 기득권층이었다. 유럽의 절대왕정은 시민계급의 도전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검열을 정치적으로 도구화했다. 영국 왕실은 인쇄조례(1586~1641)를 제정해 검열권을 강화했다. 그와 더불어 교황청의 금서목록은 전후 300차례 수정 증보되었다. 그 목록에는 갈릴레이, 브루노, 데카르트, 흄, 로크의 저작은 물론, 다니엘 디포와 장 자크 루소 및 볼테르의 저술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증명하듯, 유럽의 기득권층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며 책의 생산과 유통에 깊이 간섭하였다. 교황청의 금서목록은 1996년까지도 존재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세계문학에 기여한 근대 유럽의 대표작이 상당수 포함되어 교양시민들을 당황스럽게 하였다.
16세기 말 네덜란드의 헨릭 반 퀴크Henric van Cuyck 주교는 검열제도를 극구 변호하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로 말미암아 온 세상이 사악한 거짓말로 오염되었다고 강변했다. 그는 유대의 『탈무드』와 이슬람의 『코란』 및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의 저술을 그 예로 들었다.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가 쓴 저작도 그에게는 세상을 오염시킨 사악한 거짓말의 표본이었다. 오늘날 퀴크 주교의 견해에 동의할 사람은 거의 없다. 그가 비난한 여러 책들이야말로 인문주의의 고전 또는 인류의 지혜를 담은 종교경전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지 않은가.
교회와 국가에 의한 출판검열에는 사전검열 외에도 사후검열이 있었다. 간행된 지 2년 이내에 ‘불온하다’고 판단된 서적을 금서목록에 추가하는 악습이 자행되었다. 한번 금서작가로 낙인찍히면 그의 모든 저술이 도서관과 서점에서 추방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이 되면 금서라야 더 잘 팔리는 역설적인 상황이 전개되었다. 볼테르 같은 계몽 사상가는 자신의 저작이 금서목록에 포함된 것을 도리어 영예로 여길 정도였다.
밀턴: ‘국가와 교회에 반대할 자유를 달라’
표현의 자유는 많은 사람들이 애써 투쟁한 결과 점차 기본권의 하나로 자리매김 되었다. 기나긴 투쟁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이는 두 사람의 지식인이었다. 우선 존 밀톤John Milton(1608-1674)의 역할이 컸다. 그는 1644년에 간행된 『아레오파기티카Areopagitica』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진리와 거짓이 서로 맞붙어 싸우게 하라. 자유롭고 공개적인 경쟁이라면 거기서 진리가 패배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밀턴은 이러한 말로써 1643년 영국의회가 검열제도를 재도입한 사실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당시 교회 당국은 『아레오파기티카』 같은 서적의 출판을 금지하였다. 밀턴은 교회의 입장을 부정하고 감히 재혼의 권리를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감한 밀턴은 허가도 받지 않은 채 그 책을 간행하였다. 그는 책의 지면을 빌려 표현의 자유와 오류에 관한 관용을 호소했다. “무엇보다도 제게 알 권리를 허락해주십시오. 중얼거릴 권리, 그리고 제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토론할 자유를 허락해 주기 바랍니다.”
표현의 자유에 관한 밀턴의 견해는 교황청과 명백히 대립되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세계관을 대변하며, 영국인은 종교개혁을 통해 인류를 계몽할 사명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의 사회적 관행인 사전검열제도를 반대하고,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라고 촉구하였다.
영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밀턴의 주장에 공감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에서는 1695년 검열제도가 폐지되었다. 그 식민지인 미국에서도 1725년을 고비로 고질적인 사전검열이 사라졌다. 이후 18세기 유럽 각국에서는 당국의 검열에 저항하는 지식인들이 급증하였다. 표현의 자유에 관한 토론은 그 시대의 유행이었고, 프랑스의 디드로는 논쟁의 최전선을 지켰다. 그 당시는 상당수 출판업자들도 정치권력의 탄압에 적극적으로 반항했다. 그리하여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는 악명 높은 바스티유 감옥에 800명의 저자, 인쇄업자 및 서적상이 일시에 투옥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표현의 자유를 인정한 최초의 법령은 북유럽에서 공포되었다. 1770년 12월 4일, 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Johann Friedrich Struensee 왕이 다스리던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은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 법령은 갈수록 개악되어 후세의 비웃음을 샀다.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검열제도가 일시 폐지되기도 하였지만, 나폴레옹 집정시대에는 검열과 통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1810년대의 프랑스에서는 저자와 출판인의 자발적인 “사전 검열”이 하나의 관행으로 굳어졌다.
밀: ‘어떠한 제약도 절대 하지 말라!’
표현의 자유를 위해 다시 한 번 크게 기여한 이는 영국인 존 스튜아트 밀John Stuart Mill(1806–1873)이었다. 그는 자유가 보장되지 못하면 과학이든 법이나 정치상에도 진보가 일어날 수 없다고 확신하였다. 그에게 자유로운 토론은 필수적인 자유였다. 1859년에 간행된 그의 저서 『자유론On Liberty』은 표현의 자유를 설파한 고전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진리는 오류에서 나온다. 옳든 그르든 사상의 표현에 하등의 제약이 존재해서도 안 된다. 진리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며, 처음부터 정해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함께 진화하는 것이다. 한때 진리로 신봉되었던 많은 것들도 결국은 오류임이 판명되었다. 그러므로 명백한 잘못이 있더라도 그 주장을 금지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토론의 자유야말로 “확실한 견해가 깊은 수면”deep slumber of a decided opinion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표현의 자유가 제약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명백한 악덕을 방지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경제적 또는 도덕적 이유로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이처럼 명쾌하고 단호한 주장을 통해 밀은, 표현의 자유가 자유시민의 당당한 기본권이라는 점을 논증하였다. 19세기 후반의 유럽과 미국에서는 밀의 주장이 곧 현실이었다.
그러나 때로 역사의 수레바퀴는 거꾸로 돌아갔다. 히틀러의 나치독일에서는 유대인과 체제비판 지식인에 대한 탄압이 노골적으로 전개되었다. 나치는 그들의 책을 불사르는가 하면, 정치적 박해를 일삼았다. 1933년 10월 4일, 그들은 ‘출판지침’을 공포해 국가가 언론을 통제하는 명분을 확립했고, 이태 뒤에는 검열당국을 앞세워 금서목록을 작성해 표현의 자유를 더욱 위축시켰다. 스탈린의 소련과 군국주의 일본, 마오쩌둥의 중국에서도 금서에 대한 탄압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했다. 20세기 이후 금서조치는 독재자들이 활개치는 후진국의 전유물이었다.
한국의 금서와 ‘문화투쟁’의 역사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고, 그에 반하는 서적을 금지하였다. 유교 서적이라도 그와 유를 달리하는 것은 ‘사문난적’이라 하여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왕조의 멸망을 예언한 『정감록』은 금서 중의 금서라 금압이 심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탄압이 심할수록 『정감록』의 인기는 더욱 높아갔다. 19세기 후반이 되면 『정감록』에 영향을 받은 평민 지식인들은 동학을 비롯한 신종교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들은 성리학에 반대하여 하나의 대항이데올로기를 창출한 셈이었다.
1910년 불행히도 일제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또 다른 책들이 대거 금서로 지목되었다. 특히 신채호의 『을지문덕전』과 같이 우리 역사를 통해 독립의지를 자라나게 하는 책들이 심한 탄압을 받았다. 또, 사회주의 관련 서적들도 노동자와 농민을 집단적인 저항운동으로 이끌 가능성이 짙다는 이유 때문에 엄금되었다. 일제는 식민지 백성을 그들에게 순종하는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금서로 정한 책을 몰래 읽었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제에 저항하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갑자기 국토가 분단되었고, 남북한은 각기 미국과 소련을 정점으로 한 ‘냉전’ 구도에 편입되었다. 한반도 양쪽에는 독재자들이 등장하여 체제수호를 내세우며 금서를 양산하였다. 남쪽의 사정 역시 딱하였다. 사회주의에 관한 책들은 대부분 ‘이념 서적’으로 낙인찍혀 탄압을 받았고, 정권의 문제점을 폭로한 시, 소설, 평론 등도 금지의 대상이었다. 월북 작가는 물론, 납북인사 또는 북에 사는 작가들의 글도 금서로 내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저항이 없지 않았다. 리영희처럼 양심적인 지식인들도 적지 않아, 그들은 감옥에 갇힐지언정 양심이 명하는 바에 따른 저술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등 금서의 인기는 무척 높았다. 그리하여 군사독재의 엄혹한 탄압 속에서도 민주화의 물결은 날로 거세졌다. 이런 흐름이 이어져 결국에는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한 ‘1987년 체제’를 낳았다. 한국사회는 상당 부분 민주화되었고, 그에 발맞춰 기왕의 금서목록도 대체로 사라졌다.
앞에서도 말했듯 금서의 역사는 문화투쟁의 역사인 것이다.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 강화하려고 금서목록을 작성하여 사고와 이념의 전환을 금지하려 들었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나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언제 또다시 금서소동이 일어날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교양 없는 기득권층이 연출하는 시대착오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라는 역사의 도도한 물결을 거스르는 것은 자멸 행위다.
─
참고문헌
니컬러스 J. 캐롤리드스, 마거릿 볼드, 돈 B. 소바, 『100권의 금서 : 금지된 책의 문화사』,손희승 역, 위즈덤하우스, 2006.
백승종, 『금서, 시대를 읽다 : 문화투쟁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 산처럼, 2012.
삼성출판박물관 [편], 『다시 찾은 우리 책 展 :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해방공간의 금서』, 삼성출판박물관, 2004.
장동석, 『금서의 재탄생 : 시대와 불화한 24권의 책』, 북바이북, 2012.
주명철, 『바스티유의 금서』, 문학과 지성사,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