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3

호모 카피탈리스티쿠스

저자소개

저자 · 이영자
한국을 떠나 서구문명을 접하게 된 생소한 경험들 속에서 사회학에 눈을 뜨게 된 이후 오늘까지 반세기 동안 사회학은 세상을 공부하고 꿰뚫어보고 비판정신을 살리는 삶의 원동력이었다. 교육과 연구와 실천의 장에서 열정과 분노를 일깨워준 사회학을 통해 반인간적, 반사회적 토대를 다져온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찰해보고자 노력했다. 『자본주의의 신화와 독사』(2016년도 대한민국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 『소비자본주의사회의 여성과 남성』, 『나는 고발한다 경제지상주의를』(역서), 『성평등의 사회학』(공저), 『한국인의 일상문화』(공저) 등이 그 주요 결과물이었다. 앞으로도 ‘자본주의 인간학’의 비판적 통찰은 이 세상과 남은 삶을 이어 줄 소중한 가교가 될 것이다. 경기여고 졸업. 성심여대(현 가톨릭대로 통합) 불문학과 졸업. 프랑스 유학(1971~1982), 그르노불대학교 불어교사 자격증 수료, 유럽 국제관계연구소 수료(프랑스 니스), 프랑스 Paris X대학 사회학 학사. 사회과학고등대학원(E.H.E.S.S., Paris) 사회학 석사 및 정치사회학 박사. 가톨릭대 교수(1982~2014)/명예교수, 가톨릭대 성평등연구소 소장/교수협의회 회장, 한국여성학회 이사/회장, 한국사회학회 이사,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이사, 여성(가족부)/한국여성개발원/한국여성단체연합/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한국성폭력위기센터/한국여성의전화 정책자문위원, 크리스천 아카데미 자문위원,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종합유선방송위원회 심의위원, 환경정의 공동대표, KBS 이사, MBC 시청자위원회 위원, CBS <시사쟈키 오늘과 내일>/KBS 위성방송 <밀레니엄 포럼>/KTV <국정대담> 진행자 등.

총론


Homo Capitalisticus


자본주의의 무한성장이 곧 인류문명의 발전이라는 등식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 것인가? 고도의 물질문명과 기술문명의 혜택으로 풍요롭고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어주는 것이 자본주의 문명이 내세운 ‘발전’이 아닌가? 그런데 그 발전이 자연과 사회와 인간에게 안겨준 폐해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수준에 이르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 물질문명은 쓰레기문명이라는 오명과 함께 자연파괴와 기후재난을 심화시키는 원천이 아닌가?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인류의 멸망은 인간을 그 문명의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자본주의 살리기’가 곧 인간과 지구를 살리는 길이라고 맹신할 수 있는 것인가?


애초부터 식민주의적 침탈을 원동력으로 삼았던 서구 자본주의는 제국주의적 확장을 거듭해왔고, 그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전 세계의 약자들은 지금까지 기후위기, 인종차별, 노예노동, 빈곤의 늪, 난민의 운명 등등으로 극도의 고통을 감내해왔다.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문명의 원죄이자 흔들리지 않는 저력이었다. 그 역사는 세계 인류를 자본주의 문명의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운명 짓는 대기획의 결실이었다.


계급차별과 노동착취와 인권유린을 일삼는 자본주의는 생존권, 노동권, 인권 등 인간의 기본 권리들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었다. 지금까지 점점 더 정교한 방식과 은밀한 양태로 통제력을 강화해온 그 장벽은 자본주의 성장궤도에 없어서는 안 될 전지전능한 방어막이었다. 자본주의는 오로지 무한한 자본 축적과 시장 확장을 위해 자연, 인간, 사회를 훼손, 파괴하는 일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지배력의 확장은 무자비한 파괴의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 파괴를 ‘성공의 어머니’로 부른 것은 오로지 ‘자본주의의 성공’만을 추구하는 문명의 독선과 잔혹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자본주의가 자랑삼아온 ‘자유경쟁’은 승자독식에 의한 독점과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주범이었다. 승자에게만 경쟁의 자유와 결실이 보장되고 승자의 부와 권력은 무한히 축적될 수 있는 빈익빈 부익부가 자본주의 체제의 표준이었다. 자본주의가 약속하는 물질적 풍요의 세상은 빈곤과 결핍의 세상을 필요조건으로 삼는 것이었다. 지금도 세계자본주의는 1:99를 넘어 0.1:99.9의 사회로 질주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자본주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아주 당당하게 평등이 아닌 불평등을 정당화시키는 역사를 추동해오지 않았는가? 신분제를 타파했다고 하는 자본주의 계급사회가 이제는 아주 노골적으로 신분제를 복원시키는 세습자본주의로 귀착되고 있지 않은가?


산업자본주의는 인간노동을 돈벌이 상품으로 개발하고 착취한 덕분에 성장할 수 있있던 반면에 노동시장은 시시때때로 실업노동자를 양산해왔다. 경제위기를 모면하거나 자본의 보다 높은 수익성과 잉여가치를 위해 노동자는 언제든 무참하게 희생될 수 있는 존재였다. 또한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노동시장을 자유자재로 교란하여 노동비용을 최소화하는 다양한 전략을 구사해왔다. 그 결과 노동빈곤층과 함께 유례없는 고용불안정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며 노동자와 실업자를 넘나드는 일회용 소모품으로 불안정한 노동자계급인 ‘프레카리아트precariat’가 양산되었다.


게다가 날로 개발되는 신기술은 노동력의 가치를 하락시키거나 무가치하게 만들어 노동권 자체를 위협했다. 자동화와 정보화에 매진하는 하이테크 산업은 산업자본주의의 일등공신이었던 노동시장을 축소시키고 무력화하는 자본의 야심찬 ‘탈노동자화’ 전략이었다. 더 나아가 디지털 자본주의는 인간의 두뇌노동까지도 대체할 기술개발과 확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 노동시장은 인간의 노동력을 넘어 인간의 모든 능력을 박탈하고 통제하는 자본·기술 권력의 전체주의를 실험하는 장으로 변신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카오스적 변신은 마침내 인간과 인간세상 전체를 그 제물로 삼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서구 자본주의는 지난 500여 년 동안 불확실성, 불투명성, 불예측성을 무기로 삼아 영토 확장을 거듭해오면서 ‘고삐 풀린 자본주의’가 아니라 애초부터 ‘고삐 없는 자본주의’였음을 확인시켜주었다. ‘고삐 없는 자본주의’는 고삐가 무엇인지도, 왜 필요한지도, 알 필요가 없을뿐더러 그 자체가 그 생명력이자 영구적 자기혁명의 원동력이었다. 자기혁명을 위한 끊임없는 모험은 점점 더 통제 불가능한 위기를 불러왔다. 그러나 자본주의에게는 ‘위기가 곧 기회’였다. 즉 카오스적 변신의 기회였다.


자본주의는 그 위기들을 카오스적 변신의 기회로 포착하면서 놀라운 복원력과 번식력을 발휘해왔다. 카오스적 변신은 자본주의의 무궁무진한 최상의 전략으로 ‘도전’, ‘혁신’, ‘창의력’, ‘혁명’ 등의 이름으로 새로운 가면을 쓴 자본주의들을 탄생시켰다. 상업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 미디어자본주의, 디지털자본주의, 인지자본주의, 감시자본주의, 재난자본주의, 생태자본주의 등등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은 날로 확대되었다.


고삐 없는 자본주의의 카오스적 변신은 어디까지 갈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자본주의는 믿을 수도 없고 투명하지도 않고 어디로 튈지 알 수도 없었다. 모험과 위험이 끊이지 않는 자본주의 세상은 늘 불안하고 의심스럽고 혼란스럽고 두려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자본주의 아바타는 요동치는 파도 속에서 숨을 헐떡이며 위험천만한 인생에 목숨을 걸어야 했고, 그 상상할 수 없는 미래에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위기는 곧 기회’라는 구호를 금과옥조로 삼으며 ‘자본주의 살리기’에 매진해야 했다. 자신의 몸을 살리는 것처럼 자본주의 살리기에 혼신을 다 하는 아바타들 덕분에 자본주의는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서구 자본주의의 역사를 연구했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F. Braudel, 1902~1985은 자본주의가 자기 자신의 실체도 모르는 채 히드라처럼 끊임없이 변신하고 어떤 위험도 불사하는 괴물이라고 고증했다. 괴물은 “서로 다른 종이 결합하여 부자연스러운 개체를 만들 때 탄생”한다면, 자본주의 괴물은 히드라적 본성을 닮은 괴물이었다. 괴물은 ‘비정상’의 존재로 인지된다면, 히드라적 괴물은 그 비정상성을 ‘자연’의 섭리로 타고난 생물이었다. 자본주의는 히드라처럼 그 괴물성을 자연으로 위장한 ‘거짓자연’의 힘으로 발휘하는 것이었고. 그 힘은 생리적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불가항력적인 것이었다.


또한 ‘괴물’이라는 이름은 인간사회에서 ‘정상’이 아닌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지만, 자본주의에게 괴물성은 그 본성 자체를 드러내는 ‘정상적’인 것이었다. 자본주의 괴물은 곧 자본주의의 이름이며 이와 구별되는 ‘정상의 자본주의’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본주의는 정체불명의 괴물로 인간을 현혹하고 공포스럽게 만드는 천태만상의 얼굴을 지닌 것이었다. 자본주의는 카오스적 변신으로 그 괴물성을 극대화하면서 자연, 인간, 사회 등 모든 것을 그 제물로 삼았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 괴물성에 기대어 인류문명의 발전을 꿈꾸어왔으며 전 세계를 그 괴물의 놀이터로 제공해왔다는 말인가? 더구나 그 놀이터가 바로 그 괴물성에 속절없이 놀아나는 아바타들의 놀이터가 되었다는 말인가? 인류역사의 주인은 분명 인간이건데, 인간이 자기 자신을 치명적인 위험에 빠뜨리는 자본주의 괴물을 살리는 데 올인하는 상황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이 상황이 바로 인간의 위기를 역설해주는 것이었다.


그 배경에는 자본주의의 히드라적 괴물성을 우상화하고 자연화하는 자본주의 신화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자본주의 신화들은 자본주의 문명을 불변의 자연으로 가장하여 영우너한 것으로 수용하게 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불패’ 신화는 자본주의 문명의 필연성을 설파하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고통과 폐해를 불가피한 것으로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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