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2

박연준 시집

저자소개

저자 · 박연준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산문집 『소란』 등이 있다.

흰 귀


흰 귀로 시를 쓰고 싶어

말랑말랑한 시 한 편,


내 고양이 당주는

하품을 한 뒤 눈을 감는다


오후 두시에 뒷발을 걸쳐두고

두 귀는 쫑긋


지나간다


굴 속 흰 잠


잡을 수 없는 이름이 달아난다

너의 흰 귀,


내 고양이 당주는

잠을 굴속에 부려두고


손뼉을 치며 달려온다


잡아봐!

잡아봐!


흰!


흰!





불사조


당신에게 부딪혀 이마가 깨져도 되나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날았고

이마가 깨졌다


이마 사이로, 냇물이 흘렀다


졸졸졸

소리에 맞춰 웃었다


환 한

날 들


조약돌이 숲의 미래를 점치며 졸고 있을 때


나는

끈적한 이마를 가진 다람쥐

깨진 이마로 춤추는 새의 알


이곳에서는 깨진 것들을 사랑의 얼굴이라 부른다

깨지면서 태어나 휘발되는 것

부화를 증오하는 것

날아가는 속도로 죽는 것


누군가 숲으로 간다


나는 추락이야

추락이라는 방에 깃든 날개야

필사적으로 브레이크를 잡다

꺾이는


나는 반 마리야

그냥 반 마리,


죽지도 않아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며칠째 미동도 않잖아.”


내가 말하자 날아가는 조약돌


돌아와서는

아직이요―. 한다


아직?


아직





재봉틀과 오븐


늙는다는 건

시간의 구겨진 옷을 입는 일


모퉁이에서 빵냄새가 피어오르는데

빵을 살 수 있는 시간이 사라진다


미소를 구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높은 곳에 올라가면

기억이 사라진다

신발을 벗고 아래로 내려오면

등을 둥글게 말고

죽은 시간 속으로 처박히는 얼굴


할머니가 죽은 게 사월이었나,

사월

그리고 사―월


물어볼 사람이 없다

당신과 나를 아는 사람은 모두 죽거나

죽은 것보다 멀리 있다


사랑을 위해선 힘이 필요해,

라고 말한 사람은 여기에 없다 만우절에

죽었다

그의 등, 얼굴, 미소를

구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사랑과 늙음과 슬픔,

셋 중 무엇이 힘이 셀까

궁금해서 저울을 들고 오는데


힘은 무게가 아니다

힘은 들어볼 수 없다


재봉틀 앞에 앉아 있고 싶다

무엇도 꿰매지 않으면서


누가 빵을 사러 가자고 노크하면

구겨진 옷을 내밀고

문을 닫겠다


당신은 내 앞에 내려앉은 한 벌의 옷


사랑한 건 농담이었어,

당신이 변명하면


나는 깨진 이마 같은 걸 그려볼 것이다


웃을게요

웃음을 굽겠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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