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1

김사과 소설집

저자소개

저자 · 김사과
1984년 서울 출생. 2005년 「영이」로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하며 등단. 소설집 『02』 『더 나쁜 쪽으로』, 장편소설 『미나』 『풀이 눕는다』 『나b책』 『테러의 시』 『천국에서』 『N.E.W.』, 산문집 『설탕의 맛』 『0 이하의 날들』이 있다.

서문


비행기와 택시를 위한 문학


내 경험에 의하면 도시는 인간이 아닌 쥐를 위한 장소다. 인간을 비료 삼아 쥐를 키우는 실험실이다. 그 결과, 도시에서 오래 산 인간은 급기야 쥐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다. 새빨간 화를 끌어안은 채, 하지만 여전히 창살 속에서 찍찍댈 줄밖에 모르는 커다랗게 웃자란 쥐새끼 한 마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황금으로 도금된 번쩍이는 철창 속 가소로운 쥐 한마리. 저기 또 한마리, 두 마리…… 사람들은 이 모자란 쥐새끼들로 꽉 찬 실험실을 도시라 부른다.


결국 도시란 영원히 이어지는 실험을 위한 장소. 이 끝없는 실험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에게 존경심을 표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 실험은 이어지는 걸까?


물론 고통.


철창 속에서 나 쥐새끼1113호는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 이 빌어먹을 철창 속에서 도대체 무엇을?


물론 고통.


좀더 많은. 좀더. 더 많은. 더, 더, 더…… 하여 쾌락! 이것은 주문이다. 고통…… 마침내 쾌락! 고통 속…… 쾌락과 하나 된…… 고통과…… 마침내 그야말로 순수한 쾌락!


고통과 쾌락은 둘 다 자극이라는 면에서 동일하다. 그러니까 이 고통스러운 철창은 쾌락으로 가득한 천국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 쥐새끼1113호는 모범적으로 사육된 도시쥐로서 이 황금 철창을 사랑한다. 소름 돋는 이 형용 불가의 자극을 사랑한다. 아무렴 여기는 쥐새끼들을 위한 최상의 천국, 나 쥐새끼 1113호는 도시에 완전히 중독되었다.


도시=고통=쾌락


도시는 고통과 쾌락을 넘나드는 마법사. 흑과 백을 모조리 백과 흑으로 탈바꿈하는 순수한 교환의 사신, 상호동등한 만능협정, 영원한 시소게임의 창시자…… 요는 도시란 등가교환 그 자체. 그런데 왜 연속된 등가교환은 나만 모조리 잃게 만드는 것 같지? 솔직히 나도 오리무중이지만 아무튼 그 무정한 자리바꿈에 대해 이해해주십사 이 자리에서 독자들에게 요청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그 이해가 없이는 도시를 둘러싼 꿈과 야망, 정신 나간 광기와 환상의 논리를 도저히 파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움직이고, 뒤바뀌고, 순환하는 이 미친 세계, 그 세계의 이야기는 이동 중인 비행기와 택시에서 진행된다.


창밖, 망가져 신음하는 세계의 소름 돋는 비명이 완벽하게 차단되는 가운데, 맥락 없이 지나가는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 사이, 느―려지고 가늘게 찢겨져나가는 풍경.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당신은 영혼을 조금씩 잃어간다. 그것이 바로 교환이다. 당신과 도시를 위한 윈윈게임이다. 당신은 현기증을 느낀다. 당신은 땅과 흙의 세계를 떠나 구름과 먼지의 세계로 진입한다. 환영한다. 당신은 현실감을 잃는다. 당신은 점차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당신은 아주 기분이 좋다.) 당신은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관심이 없다. 이제 당신은 현실에서 완전히 튕겨져 나온다! 척추를 타고 흐르는 짜릿한 느낌. (이것이 바로 마법이다. 도시가 행하는 주술이다.) 전기고문을 당하는 듯, 온몸의 혈관과 세포가 타들어가는 듯,


어, 어, 짜릿한 자극.


지금까지의 삶, 어린 시절의 추억 따위, 모든 것이 깨끗하게 지워지고 비워진다. 당신은 도시와의 교환행위에 존재 전체를 날려버린 것이다. 공장 초기화된 로봇청소기처럼 산뜻하고 영문 모를 기분. (이 집은 대체 어디이고 내 바닥에 달린 가느다란 솔기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를 바라보는 저 커다란 쥐새끼들은 도대체 뭘 원하는 건지?) 발밑으로 구름이 흘러가고, 시야는 안개로 덮여 있다. 당신은 더 이상 지구에 없다. 그렇다면 어디에 있는가?


아무 데도 없다. 당신은 이동 중이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현실을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현실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확답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내가 나를 잃어버리고 현실이 현실을 포기한 이 세계, 즉 이 현란한 도시들의 세계 속에 우리는 완벽하게 갇혔다. (물론 이것은 지정학적 위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도시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들은 오직 비행기와 택시의 좌석 뒤쪽에 달린 조그마한 스크린 속에 존재한다. 21세기, 파산한 채로 점점 더 부풀어오르는, 익사하여 퉁퉁 불어버린, 오늘도 오직 우리의 마음속에서 젖은 욕실 안 곰팡이처럼 쑥쑥 자라나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도시들.)


그리고 그 도시 속의 인간들은, 그들의 살과 뼈는 죄다 녹아버렸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뻣뻣한 낯짝, 송곳으로 난도질해도 피 한방울 나지 않을 두껍고 무딘 낯짝뿐. 오직 아이폰 셀카를 위해 존재하는, 신기한 표면으로 이루어진 생명체. (그것을 여전히 인간이라고 부르는 자가 있다면 대단한 객기라고 생각한다.)


그렇담 이 신기한 생명체들의 정체는 뭘까?


궁금증을 힘껏 끌어안은 채 택시 창밖을 훔쳐본다. 피로 흥건한 스테이크처럼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살덩어리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걸음을 걷는다. 텔레파시로 진행되는 듯한 기이한 행진, 더욱 기이한 웃음과 찡그림, 박수와 기침 소리, 크고 휑한 선글라스 눈들 너머…… 빌어먹을 교통체증, 현기증. 군중들, 어지럼증, 히스테릭한 경적 소리……


천국 같군!


다시 정신을 차려보면 융단같이 펼쳐진 구름, 꿈같은 시야,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음악이라는 이름의 떡처럼 짓이겨진…… 과거…… 2024! 2024! 2024……! 브라보, 기념비적인 해로다! 근데 갑자기 아주 오래된 기억이 밀려드는 이유는 뭘까? 사진처럼 선명한 이 기억들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전혀 내 것이 아닌데…… 몰살된 귀족들과 어둑한 소리들, 발작 같은 악몽, 흑백 사진 속 전쟁…… 이 찢어질 듯 확대된, 아니 조작된 노스탤지어들은 대체 어디에서 온 걸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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