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9

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우리를 침묵시키는가

저자소개

저자 · 르네 피스터
1974년생으로 뮐하임 출신의 독일 언론인이다. 뮌헨에서 정치학과 커뮤니케이션학을 전공했고 독일의 손꼽히는 언론인 교육기관인 독일저널리즘학교에서 교육받았다. ddp, 로이터 등의 뉴스 통신사에서 근무하다 2004년 《슈피겔》에 입사했다. 《슈피겔》에서는 주로 기독민주연합, 기독사회연합 두 정당과 앙겔라 메르켈에 관한 기사를 썼다. 2015년에 《슈피겔》의 베를린 지국 편집장이 되었고, 2019년부터는 워싱턴 지국 편집장으로 일했다. 미국 국가안보국이 앙겔라 메르켈의 휴대전화를 도청한 사건을 취재한 동료들과 함께 독일어권 최고의 기자상인 헨리난넨상을 받았다.
역자 · 배명자
서강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8년간 근무했다. 이후 대안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독일 뉘른베르크 발도로프 사범학교에서 유학했다. 현재는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로 활동중이다. 옮긴 책으로 『잘못된 단어』 『숲은 고요하지 않다』 『아비투스』 『불확실성의 시대』 등 70여 권이 있다.

왜 좌파마저 민주주의를 위협할까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무지개 깃발이었다. 2019년 4월 집을 구하러 워싱턴에 갔을 때, 부동산 중개인이 체비 체이스 구역을 추천했다. 두 아들이 다닐 말끔한 공립학교가 있는 조용한 교외였다. 프리드리히 메르츠2019년 당시 앙겔라 메르켈의 라이벌로, 기독민주연합(기민연)의 2인자만큼 힙해 보이는 마을에는 거의 세 집 건너 하나씩 동성애 운동 깃발이 베란다에서 나부꼈다.


중개인에게 깃발에 관해 물으니, 2016년 11월에 마이크 펜스 공화당 부통령 당선인이 이곳으로 이사를 결정한 후부터 무지개 깃발이 게양되었다고 한다. 미국 부통령은 원래 해군 관측소 영내에 마련된 관사에 거주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펜스는 관사로 들어가기 전까지 임시로 머물 곳이 필요했고, 체비 체이스에서 주택 하나를 빌렸다. 중개인에 따르면, 무지개 깃발은 새 이웃에 반대하는 침묵의 항의였고 그 후로 철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이었다. 펜스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기독교인으로, 인디애나주 연방 하원의원 시절에 학교에서 창조설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펜스에 관한 기사가 베를린의 내 책상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 위에 “인디애나 출신 아야톨라이슬람 시아파의 고위 성직자 칭호”라고 적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무지개 깃발 때문에 체비 체이스가 맘에 들었다. 《슈피겔》 특파원으로 미국에 가기로 결정하기 전까지, 우리 가족은 베를린의 공동주택에 10년 넘게 살았다. 나는 늘 교외에 거부감이 있었는데, 체비 체이스의 무지개 깃발을 보자 이곳이 완전히 중산층 속물 지옥은 아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3일 뒤에 나는 멋진 베란다와 작은 정원이 있는 주택의 임대차계약서에 서명했다.


미국에서 살 생각에 설렜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데, 미국은 내게 늘 아주 호감 가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내 부모님은 미국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고개를 저었던 다른 많은 독일인과는 달랐다. 두 분은 아직도 1970년대 중반에 다녀온 샌프란시스코 여행을 추억하며 열광한다. 나는 콜트 세버스1980년대에 방영된 미국 텔레비전 드라마 〈더 폴 가이〉의 주인공와 〈립타이드〉를 보며 자랐고, 내 첫사랑은 〈팔콘 크레스트〉의 주인공 멜리사였다. 영화관에서 처음 본 영화가 톰 크루즈 주연의 〈탑건〉이었고, 이 영화 때문에 당시 내 또래 남학생들은 해군 패치가 잔뜩 붙은 갈색 가죽 항공 점퍼를 입고 다녔다. 나는 헤밍웨이의 간결함과 필립 로스의 에로틱한 자기탐구를 좋아했고, 래리 데이비드의 무정부적 유머만큼 금세 나를 유쾌하게 해주는 것은 없었다.


우리 가족이 2019년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두 아들의 영어가 떠듬떠듬 겨우 말하는 수준이었는데도 우리는 미국 학교를 선택했다. 후회 없는 결정이었다. 미국 학교의 교사들은 독일 학교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활기찬 에너지로 우리 아이들을 맞아주었다. 둘째 아이의 담임인 래머스 선생님은 아이가 영어로 말하지 못하는 독일어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 휴대전화에 통역 앱을 깔았다. 첫째 아이는 중학교에 갔고 며칠 뒤에 금세 미국인 친구들을 사귀었다. 6개월쯤 지났을 때 두 아들은 독일어 악센트가 섞인 내 영어가 귀에 거슬린다며 자기들 앞에서는 영어를 쓰지 말라고 부탁할 만큼 영어를 유창하게 했다.


새 이웃들은 감동적으로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5대째 변호사로 일하는 유대인 주디스가 추수감사절 만찬에 우리를 초대했다. 심장과 전문의 카필과 생물학자 마두라 부부가 도로 위편으로 이사를 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집 아이들은 우리 정원에서 트램펄린을 타고 놀았다. 법학자 부부인 팀과 메간도 있다. 우리는 그들 정원에서 미국 수제 맥주를 마셨고, 그들은 언제나 내가 미국 전역을 취재하며 무엇을 경험했는지 듣고 싶어 했다.


취재 얘기를 할 때면, 나는 마치 머나먼 딴 나라 얘기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트럼프의 선거 유세장에서 본 것은 우리가 체비 체이스에서 경험한 개방적 친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트럼프가 무대에 오르자마자 “USA, USA”를 외치던 군중. 트럼프의 언론대응팀이 우리 기자들을 가둬둔 차단 구역을 지나며 “거짓말쟁이”라고 수군대며 욕하던 성난 남자들. 언론을 조롱하고 욕하는 것이 트럼프 연설의 기본 레퍼토리였다. 트럼프는 분개한 어조로 기자들이 미국 국민을 어떻게 속이는지 말했다. “보세요, 저들은 지금 방송을 내보내지 않고 있어요. 카메라 불이 꺼졌잖아요!” 트럼프가 말하자 “역겨운 CNN”이라는 군중의 외침이 홀 전체를 가득 채웠다.


체비 체이스로 돌아오면, 미국에 퍼져 있는 깊은 분노와 증오가 멀리서 울리는 천둥소리처럼 느껴졌다. 내가 이웃들에게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에 관해 얘기하면 그들은 창피해하며 당황했다. 얼굴에 분노가 서렸고, 그들의 대통령이기도 한 이 남자를 수치스러워하는 기색도 보였다. 아주 기이한 경험이었다. 나치에게서 세계를 구해낸 나라, 최초로 달에 사람을 보냈고 공산주의를 무릎 꿇게 한 자랑스럽고 강력한 미국이 이제 위험하면서 동시에 어처구니없는 인물, 국가의 어두운 정서를 이용하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허풍쟁이이자 사기꾼인 인물에게 지배받고 있었다.


(…)


나는 왜 이 책을 쓸까? 경직되고 독단적일 수 있지만 최선이고자 하는 교육에 왜 딴지를 걸까? 강의 때 무심코 던진 한마디 또는 SNS에 올린 도발적 발언으로 직장을 잃은 몇몇 사람들 얘기에 왜 잉크를 낭비할까? 폭스뉴스 같은 강력한 우파 채널이 진실에는 관심이 없는 선전 나팔수로 타락하는 때에, 진보 언론의 거대한 전투함인 〈뉴욕타임스〉의 정신적 기류를 왜 우려할까?


트럼프와 공화당이 훨씬 더 나쁘다는 이유로 일부 좌파의 근본주의를 외면하는 것은 태만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어떻게 샌프란시스코 교육청은 민주당 상원의원 다이앤 파인스타인이 1980년대에 동성혼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다이앤 파인스타인 초등학교’ 이름을 바꿀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크리스틴 라가르드 또는 전 외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 같은 여성이 연설자로 초대되면, 왜 대학생들이 폭동을 일으킬까? 그리고 몇몇 미투 운동은 어떻게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법치주의의 초석을 흔들 수 있었을까?


이런 물음들을 탐구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것이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우파 포퓰리즘만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게 아니다. 인종차별 반대, 평등, 소수자 보호라는 이름으로 표현의 자유,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이념, 누구도 피부색이나 성별로 차별받아선 안 된다는 헌법 등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무시하려는 독단적 좌파도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이런 새로운 독단주의의 뿌리를 밝힐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프랑스에서 미셸 푸코 같은 사상가들이 발전시킨 추상적 학술 개념이 훗날 어떻게 미국에서 정치 논쟁의 효과적 무기로 변질됐는지 설명할 것이다. 미국 대학에서 벌어진 논쟁을 질식시키는 데 이 무기들이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설명할 것이다. 비자유주의적 정신이 어떻게 강의실과 도서관에서 나와 〈뉴욕타임스〉나 CNN 같은 언론, 아마존과 맥도날드 같은 대기업, 학교와 행정관청 등 미국의 일상생활을 좌우하는 기관들 속으로 스며들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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