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성혜령 소설집

저자소개

저자 · 성혜령
2021년 단편소설 「윤 소 정」으로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제14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소설집으로 『버섯 농장』이 있다.

버섯농장


한동안 연락이 없던 진화에게서 전화가 왔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기진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진화라는 사람을 까맣게 잊고 있던 것처럼. 기진은 밤사이 업데이트 된 유튜브 영상을 보려던 참이었다. 방은 한낮임에도 어두웠다. 암막 커튼 사이로 얇게 스며든 빛이 침대를 칼날처럼 가로질렀다. 기진이 구독 중인 유튜버는 목에 상처를 입은 채 버려져 있던 고양이를 구조하고 입양한 뒤 일주일에 한두번씩 영상을 업로드 했다. 고양이의 정기검진차 동물병원에 다녀온 에피소드가 새로 올라와 있었다. 영상을 막 재생했을 때 전화가 왔고 기진은 실수로 수신거부 버튼을 눌렀다. 진화는 기진이 그럴 리 없다는 듯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고 대뜸 운전 좀 해주라, 라고 말했다. 부탁인지 명령인지 애매한 말투였다. 서울 근교에 있는 요양병원에 갈 일이 생겼는데 교통편이 나쁘니 기진이 차로 데려가주면 좋겠다고 했다. 기진은 장거리 운전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알겠다고 답했다. 고마워, 그럴 줄 알았어. 진화가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니. 진화는 물론 기진이 지금 일을 쉬고 있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기진이 밖에 잘 나가지 않는다는 것과 병균, 연쇄살인마, 교통사고를 무서워한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진짜 뻔한 사람은 진화였다.


진화는 중국 저가 의류를 비싸게 파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거의 10년째 일하고 있었다. 쇼핑몰 매출은 매해 크게 늘었는데 진화의 연봉은 그다지 오르지 않았고 일은 계속 많아졌다. 진화는 기진과 만날 때마다, 부모 잘 만나서 스무살 때 쇼핑몰을 시작해 실무는 아랫사람들한테 다 맡기고 내킬 때마다 해외로 여행이나 다니는 어린 사장에 대해서 온갖 저주와 욕을 퍼부었다. 진화의 증오는 너무 전형적이어서 기진은 가끔 진화에게 진심인지 묻고 싶었다. 정말 사장이 그렇게까지 싫은 거냐고. 회사를 나오면 다시 보지 않아도 될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까지 싫어할 수 있냐고. 정말 증오해야 할 대상은 그런 회사에서 10년간 나오지 못한 너 자신이 아니냐고. 물론 기진은 말하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하면 진화는 쉽게 회사를 그만둘 수 있는 기진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므로.


*


돌아오는 주말에 기진은 차를 몰고 진화의 집으로 갔다. 진화는 대학가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었다. 졸업 전부터 이곳에 살다가 취직했는데 일이 바쁘다보니 이사 갈 시기를 놓쳤다고 했다. 기진이 진화의 집에 들를 때마다 진화는 불평했다. 옆집에서 오줌 싸는 소리도 들리고 계단에서는 썩은 계란 냄새가 난다고. 이사 가면 안 돼? 기진이 대꾸하면 진화는 어디든 똑같다고 말했다. 실은 이곳의 월세가 몇년 동안 동결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기진도 알았다. 건물이 복잡한 상속 소송에 걸려 있다고 했다. 건물 가치가 높게 평가되지 않는 게 건물주 입장에서 유리한 모양이었다. 건물은 거의 방치된 상태였다.


진화의 오피스텔이 있는 골목에 접어들자 눈에 익은 세탁소가 보였다. 세탁소의 전면 유리창에는 항상 같은 검은색 모피 코트가 걸려 있었다. 지나가다 언뜻 보면 사람이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전리품 같은 걸지도 몰라. 진화는 말하곤 했다.


“연쇄살인마들이 자기가 죽인 사람들 머리카락이나 손톱 같은 거 뽑아서 기념으로 챙기는 것처럼, 세탁소 주인한테는 그게 옷인 거지. 어쩌면 그걸 은폐하려고 세탁소를 하고 있는지도 몰라.”


세탁소 주인이 한번 진화를 ‘처녀’라고 부른 후부터 진화는 그가 변태라고 믿었다. 세탁해야 할 옷이 있으면 다른 동네에 있는 체인 세탁소까지 갔다. 기진은 세탁소 앞에 차를 세웠다. 곧 진화가 골목으로 걸어 나왔다.


흰 민소개 원피스를 입은 진화가 차에 올라탔다. 치마가 접혀 올라가 뼈만 남은 듯 보이는 허벅지가 드러났다. 진화는 오랫동안 체중 관리를 하고 있었다. 쇼핑몰 모델로 촬영을 하러 오는 어린 여자애들한테 일을 시키려면 자기도 어느 정도 모델처럼 보여야 한다고 했다. 오랜만인가? 진화가 말했다. 기진은 잠시 진화와 마지막으로 봤던 날을 생각해봤다. 어디서 만났는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날씨가 어땠는지, 어느 계절이었는지조차 전혀 떠오르지 않았는데 한가지만 기억났다. 그날 기진이 진화에게 한번도 질문하지 않았다는 것. 진화의 말에 그래? 정말? 같은 추임새를 습관처럼 넣으면서도 진화가 하는 이야기에서 궁금한 점이 없었다.


진화는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며 중얼거렸다. 


“썬샤인 노인전문병원, 병원 이름을 왜 이렇게 지었을까. 이런 병원에 자기 부모를 입원시키는 사람들도 어딘가 이상한 인간들일 거야. 아, 됐다.”


진화의 말이 끝나자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라는 내비게이션 음성이 너무 크게 들렸다.


고속도로에 접어들고 나서 진화는 기진에게 물었다. 여기 왜 가는지 안 물어봐? 기진이 대답하기 전에 진화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진에게 말은 안 했지만, 진화에게는 1년 정도 만나던 남자가 있었다. 왜 말 안 했는데? 기진이 묻자 진화는 그냥,이라고 했다. 기진은 자기가 연애를 해본 적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진화의 전 남자친구는 진화보다 두살 어렸고 졸업 후 대기업 하청 마케팅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1년을 만나는 동안 진화와 남자친구 사이엔 별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휴대폰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진화의 휴대폰이 갑자기 꺼지는 일이 잦아졌다. 남자친구는 진화에게 휴대폰을 살 거면 자기가 아는 사람에게 가자고 했다. 군대에서 알게 된 동생이 통신사 대리점에서 일한다고, 거기서 사면 직원 할인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진화는 살던 곳에서 꽤 먼 동네의 대리점에서 휴대폰을 개통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서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왜? 기진이 묻자 진화는 짧게 웃었다.


“전화를 안 받아서.”


“전화?”


“새벽에 위경련이 나서 응급실에 간 적 있었거든. 그때 전화를 했는데 안 받았어. 자느라 못 받았대. 그럴 수 있지. 원래 잠들면 잘 안 깨거든. 근데 그냥 그다음부터 보기가 싫어졌어.”


기진은 운전할 때 한눈을 팔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잠깐 고개를 틀어 진화를 쳐다봤다. 진화는 자기가 운전하는 것처럼 허리를 곧게 편 채 전방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남자와 헤어지고 1년이 지났고 진화는 그동안 짧은 연애를 두번 정도 더 했다. 두 번 정도? 연애라고 하기 애매한 관계도 좀 있었어. 진화가 말했다. 그리고 3주 전, 진화는 한국신용보증보험회사라는 곳에서 독촉 전화를 받았다. 갚지 않은 부채가 있다고 했다. 부채는 총 6,538,207원이었고 15.7퍼센트의 이자가 다달이 붙고 있었다. 알아보니 진화 명의로 휴대폰이 하나 더 개통되어 있었고, 그 휴대폰의 할부원금과 1년치 이용요금, 그리고 게임 아이템을 구매한 소액결제액까지 하나도 납부되지 않아서 관리가 채권추심 업체로 넘어갔다고 했다. 그 휴대폰이 개통된 곳이 진화가 남자친구와 함께 갔던 대리점이었다. 진화는 그날 남자친구가 소개해줬던 아는 동생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평범한 얼굴이었겠지, 굳이 기억할 이유가 없는. 진화는 말했다. 다만 그날 어떤 실수가 있어서 그 남자애가 사인을 한번 더 요청했다는 것은 기억났다. 진화는 일 처리가 허술한 사람을 보면 언제나 화가 났지만 남자친구가 옆에 있어서 더 묻지 않고 그가 요청한 대로 모든 서류에 사인했다.


진화는 독촉 전화를 끊자마자 전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대신 메시지를 남겼다. 문자로 해. 진화가 대리점 동생에게 사기를 당한 것 같다고 긴 문자를 보냈다. 전 남자친구는 다른 말없이 그 동생의 연락처만 문자로 보내왔다.


경찰에 명의 도용으로 신고를 했지만 일단 빚을 갚지 않으면 신용등급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진화에겐 아직 갚아야 할 학자금대출이 남아 있었고 이사를 가기 위해 무리해서 적금을 깨면서까지 남이 진 빚을 갚고 싶지는 않았다. 진화는 전 남자친구가 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갔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그래도 진화는 계속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을 듣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단조로운 소리만 남았다. 그때만은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지 받지 않을지, 절반의 확률에 온 신경을 집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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