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1

자유를 빼앗지 않는 돌봄이 가능할까

저자소개

저자 · 무라세 다카오
노인요양시설 ‘요리아이의 숲’ ‘택로소 요리아이’ ‘제2택로소 요리아이’의 총괄 소장. 1964년 태어났다. 도호쿠복지대학교 졸업 후 태어난 곳인 후쿠오카현 이이즈카시의 특별요양노인홈에서 생활지도원으로 8년 동안 근무했다. 그 후 시타무라 에미코를 비롯한 세 명의 여성이 후쿠오카시에 설립한 ‘택로소 요리아이’에 자원봉사자로 관여하기 시작했다. ‘요리아이’는 인지장애가 있는 고령자들의 자유와 인권을 우선하며, 당사자가 본래의 생활 리듬대로 살다 평온하게 임종하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표하는 곳이다. 일정표를 강요하지 않고, 격리하지 않고, 약물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는 등 ‘요리아이’의 방식은 새로운 돌봄의 가능성을 보여주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요리아이’의 설립 경위에 관해서는 『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건 아니랍니다』(가노코 히로후미 지음, 이정환 옮김, 푸른숲 2017)에 자세히 쓰여 있다. 지은 책으로 『소변의 포물선』 『정신 나가도 괜찮아』 『할머니가 노망났다』 등이 있다. 『돌봄, 동기화, 자유』는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저서다.
역자 · 김영현
출판 기획편집자로서 교양, 인문, 실용,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만들었다. 현재 프리랜서 기획편집자로 일하며 일본어 번역을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매일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1, 2』 『서로 다른 기념일』 『나를 돌보는 책』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오작동하는 뇌』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은하의 한구석에서 과학을 이야기하다』 『목소리 순례』 『먹는 것과 싸는 것』 『마이너리티 디자인』 『물속의 철학자들』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고통』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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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과 육성


집에 놔둔 분재는…


나는 스물세 살에 사회인이 되었다. 첫 직장은 특별양호노인홈特別養護老人ホーム*이었다. 어느 날, 아무것도 모르는 신출내기인 내게 상사는 어느 할아버지를 곁에서 시중들라고 지시했다.


*중증 질환 등으로 가정에서 생활이 불가능해진 고령자가 입주하여 생활하는 요양시설. 입주 자격이 까다롭지만 비교적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할아버지의 등에는 커다란 혹이 있었다. 변형된 등뼈 때문에 할아버지는 항상 절을 하는 듯했다. 입에 마비가 와서 마음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이야기하는 할아버지의 말보다 입술 끝에 고인 침방울에 정신이 팔렸다.


할아버지는 텅 비어버린 자신의 집이 걱정되어 어쩔 줄 몰랐다. 정원에 분재들이 방치되어 있다고, 분재들에 물을 주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했다. 할아버지는 수시로 사무실에 찾아 와 “집에 가고 싶어.”라고 간청했다. 그 끈기에 두 손을 든 주임의 지시로 나는 할아버지를 따라 집에 다녀오게 되었다.


물을 주러 간다 했지만 할아버지가 입소하고 벌써 수년이 지나 있었다. 분재들이 살아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따라가는 의미가 있을까. 이 역시 일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차를 몰았다.


국도 곁에 자리한 집은 배기가스와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할아버지를 따라 정원에 들어갔는데, 놀랍게도 분재들은 살아 있었다. 차광망 아래의 분재들은 모두 싱싱했다. 할아버지가 수도꼭지에 호스를 연결하고 타이머를 맞춰 정기적으로 물이 나오게 해두었던 것이다. 분재들이 한참 전에 말라 죽었을 것이라고 단정했던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시설에 입주한 어르신들의 집에 방문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집은 주인을 잃고 망연자실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간돌봄센터에 방문한 날을 기록한 메모지. 비상시 연락처. 팩스 사용법. 화장실의 위치를 가리키는 화살표. 쓰레기 버리는 요일을 강조하는 빨간색 글씨. 손주가 보낸 그림엽서. 생일을 축하하는 메시지. 혼자 생활하는 부모를 걱정하는 가족들의 마음이 벽에 가득한다. 


실내를 둘러보면 이 사람이 어떻게 나이 들었는지, 어떻게 생활해왔는지가 눈앞에 떠오른다. 베란다에 놓인 빛바랜 등나무 의자. 임시방편으로 설치한 듯한 난간. 책장 구석에 혼자 서 있는 세 발 지팡이. 복도 한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휠체어. 침대 옆에 휴대용 화장실이 있었구나 짐작하게 하는 오줌인 듯한 얼룩.


집에는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의 생활이 새겨져 있다. 집이라는 공간에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 고여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떻게 신체 기능을 잃어버렸는지 집은 가르쳐준다. 



쥐어짜낸 큰소리


“아아, 아아.”


할아버지가 화를 내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웃들에게 인사하겠다고 말을 꺼낸 것이다. 예정에 없던 일이지만 할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따라갔다. 


“어머, 돌아왔어?”


옆집에 사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여성이 싹싹하게 말을 걸었다. 이웃을 다시 만나 몹시 감동한 할아버지의 말은 점점 더 알아듣기 어려웠다. 여성은 싱글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얼추 인사도 전부 하고 돌아가려던 때. 할아버지가 “너…는…도…라…가. 나…는…안, 가.”라고 말했다. 할아버지를 두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시설에 돌아가자고 설득해보았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옆집에서 전화를 빌려 사무실에 도움을 요청했다. 


“여기도 바빠. 혼자 어떻게든 해봐.”


사무실 직원은 단칼에 전화를 끊었다. 그러는 사이에 할아버지는 서둘러 집에 틀어박혔다.



할아버지에게서 내쫓긴 나는 어떡하면 좋을지 몰랐다. 점점 화가 났다. 정색하고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정원의 분재만 살펴보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웃을 돌면서 인사하고, 이제는 아예 집에 남겠다고 하네요. 저와 한 약속을 깨려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할아버지와 어떤 약속도 하지 않겠어요. 데리러 오지도 않을 거고요. 그럼 됐죠?”


그건 내가 온몸으로 쥐어짠 살아 있는 육성이었다.


할아버지는 마지못해 집에서 나왔다. 시설로 돌아가는 동안 차 안에 감돌았던 어색한 분위기가 기억난다.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대인 돌봄에 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 책들은 국내외의 앞선 사람들이 자신들의 실천을 일반화하려고 노력한 결과물이었다. 


어르신들을 돌보며 공부를 계속하다 보면,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세계와 개념이 일치하는 순간. 실천과 언어가 동기화된다고 하면 될까. 그런 느낌이 들 때마다 내 기술이 향상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 느낌은 때로 나를 ‘다 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했다. 공부한 지식에 어르신을 끼워 맞춰서 내가 다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 태도는 어르신들에게 있는 ‘저항의 불꽃’에 기름을 부었다. ‘알아주면 좋겠다. 하지만 너무 쉽게 알아서는 안 된다.’ 어르신들에게는 그런 감정이 있는 것 같았다.


닥치는 대로 ‘이론’을 머릿속에 담으면서 ‘육성’으로 부딪쳐본다. 내게 돌봄이란 그런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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