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30년 문학전문기자 생애 첫 비평에세이

저자소개

저자 · 최재봉
1961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영문학과와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1992년부터 한겨레신문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이야기는 오래 산다》 《동해, 시가 빛나는 바다》 《그 작가, 그 공간》 《언젠가 그대가 머물 시간들》 《거울나라의 작가들》 《간이역에서 사이버스페이스까지: 한국문학의 공간 탐사》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지구를 위한 비가》 《프로이트의 카우치, 스콧의 엉덩이, 브론테의 무덤》 《악평: 퇴짜 맞은 명저들》 《제목은 뭐로 하지?》 《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 《클레피, 희망의 기록》 《에드거 스노 자서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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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침묵의 뿌리


조세희

《하얀 저고리》


침묵하는 작가들이 있다. 손창섭, 최인훈, 김승옥, 조해일, 방영웅, 오정희, 양귀자, 장정일, 주인석, 김한수……. 명단은 얼마든지 더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멀리는 1950년대부터 가깝게는 1990년대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들이 10년이 훌쩍 넘게 긴 침묵에 빠져 있는 것이다. 연로한 작가의 경우에는 글쓰기의 긴장과 압박을 견딜 만한 육체적·정신적 체력이 받쳐 주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개중에는 문학적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침묵하는 작가를 떠올릴 때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운 이는 조세희 선생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이라는 한국 소설의 금자탑을 ‘쏘아 올린’ 때로부터 어언 30년. 소설집 《시간여행》문학과지성사, 1983과 사진 산문집 《침묵의 뿌리》열화당, 1985가 뒤를 이었다고는 해도 그것은 역시 조세희 문학의 본령에는 미치지 못하는 책들이었다. 그렇다면 조세희 선생의 침묵은 사실상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 이후부터 계속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난쏘공》이 준 감동과 충격에 전율을 맛본 독자들은 당연히 선생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며 갈증을 느끼게 마련이었다. 그 갈증은, 감히 말하거니와, 《시간여행》과 《침묵의 뿌리》로는 채 가시지 않는, 매우 근원적인 것이었다. 1990년대 벽두에 선생이 새 장편《난쏘공》을 연작소설이라고 본다면, 사실상 첫 장편 《하얀 저고리》를 잡지에 연재하면서 그 오랜 갈증은 비로소 해소되는 듯했다. 게다가 《하얀 저고리》는 《난쏘공》과 같고도 다른, ‘역시 조세희’라는 탄성을 자아내게 만드는 역작이 아니었겠는가. 1970년대 한국 사회의 계급적 단층과 충돌을 공시적으로 파고든 게 《난쏘공》이었다면, 《하얀 저고리》는 동학농민전쟁에서 5·18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 100년을 통시적으로 다룬 소설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연재는 3회 만에 중단되었고, 책으로 나올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작가가 결말부를 붙들고 씨름한다는 소문만 들을 수 있었다. 기다림에 지치면 헛것이 보이는가. 어느 날은 선생이 마침내 《하얀 저고리》를 마무리해서 곧 책으로 낸다는 말이 들렸다. ‘이거다!’싶었다. 다른 기자들의 귀에 소식이 들어가기 전에 부랴부랴 기사를 썼다. 이른바 ‘특종’이었다. 그러나 ‘특종’은 머지않아 ‘오보’로 몸을 바꾸었다. 《하얀 저고리》는 아직 책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선생이 아직 마무리하지 못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연재 이후 달라진 사회·정치 상황을 소설에 반영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연재 때는 전두환·노태우 두 군인 출신 대통령의 집권기였는데, 1992년 말 대통령선거를 통해 이른바 문민정부가 탄생하지 않았겠는가. 《하얀 저고리》가 이 땅의 역사와 현실을 상대로 대결을 펼치는 소설인 바에야 작가로서는 문민정부 출범 이후 새로운 국면을 소설 속에 담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시간을 두고 찬찬히 들여다보니, 사정이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선생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얀 저고리》를 차라리 마무리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도 같았다. 이 무렵 만난 선생이 “내 소설의 일차적 독자들인 동시대 사람들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라고 고통스럽게 토로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들의 생각과 삶의 방식이 나의 그것들과 너무도 달라서 약이 오를 지경”이라고까지 선생은 말했다. 그러니까 선생이 파악하는 역사와 현실을 소설 속에 담더라도 그것이 독자들에게 이해되리라는 믿음이 희박했던 것이다. 나는 ‘작가 조세희’의 오랜 침묵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선생은 문학적으로 침묵함으로써 거꾸로 독자들과 현실에 대해 ‘발언’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독자 한 사람으로서 나는 여전히 《하얀 저고리》에 미련과 기대를 떨치지 못한다. 선생이 느낄 막막함과 분노는 이해하지만, 《하얀 저고리》를 마무리 지어 발표하는 것이 작가 자신에게나 미지의 독자들에게나 두루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소설적 침묵을 고집하는 한편에서 선생은 사진이라는 새 매체를 발견하고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일찍이 1980년대 중반에 사북 탄광촌을 기록한 사진 산문집 《침묵의 뿌리》를 낸 바도 있지만, 그 뒤로도 선생은 기록과 전달의 수단으로서 카메라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고 있는 듯하다. 특히 1990년대 이후 크고 작은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카메라를 든 선생의 모습을 만나는 것은 더 이상 낯설거나 신기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시위가 격해지고 그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이 벌어질 때도 선생은 격렬한 사태의 한가운데에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있곤 했다. 언젠가 선생의 댁에서 경찰에게 맞아 피 흘리는 노동자의 모습을 선생이 직접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 사진을 보여주면서 선생은 사뭇 뿌듯한 표정이었는데, 나는 어쩐지 소설가인 선생을 사진에 빼앗긴 것만 같아 마음이 그리 편치만은 않았더랬다. 촛불집회가 한창인 이즈음도 선생은 시청과 광화문의 집회 현장에 카메라를 들고 나오시는 모양이다. 건강이 썩 좋지 못한 터에 너무 무리를 하시는 건 아닌지. 선생을 보았다는 문인들의 전언을 듣고 나도 혹시나 싶어서 집회에 나갈 때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쩐 일인지 직접 뵙지는 못했다.


《난쏘공》에 대한 글들이 다양하게 나와 있지만, 그중에는 오해들도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장 큰 오해는 이 ‘모더니즘 소설’이 우화적 문법을 동원하는 바람에 현실의 치열함을 충분히 담지 못했다는 식의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의 비판적 사실주의 소설들은 물론 1980년대의 민중문학 및 노동문학을 통틀어도 《난쏘공》만큼 급진적인 소설은 드물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사랑의 강제’라는, 《난쏘공》의 핵심은 섬세하게 이해될 필요가 있다. 가령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1976에서 소록도 병원장 조백헌이 원생들에게 강요하는 사랑과는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당신들의 천국》의 사랑이 위에서 아래로 강요되는 것이라면, 《난쏘공》에서는 아래에서 위로 강제되는 사랑이다. 비유하자면, 근자의 촛불시위를 ‘아래에서 위로 강제되는 사랑’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선생은 2002년 6월 《난쏘공》 150쇄 돌파에 즈음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인도에서 차도로 내려서야 역사가 이루어진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민중의 대규모 가두시위가 역사의 동력이라는 뜻이었을 텐데, 인도에서 내려와 차도를 행진하는 촛불시위 행렬을 보면서 나는 선생의 그 말을 떠올리곤 한다. 하다 보니, 그때 선생의 또 다른 말도 생각난다. 당시는 2002 한·일 월드컵의 열기로 뜨거웠던 무렵이다. 선생은 월드컵 이면에 도사린 자본의 음모에 눈감고 축구에 열광하는 대중에게 실망을 넘어 환멸을 느꼈던 듯하다. 중학생 때는 축구선수였으며 연고전 오픈게임에도 출전했다는 선생은 “지금은 축구를 안 본다”라고 단언했다. “축구를 볼 수 없는 아이들과의 약속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선생이 좋아하던 클래식 음악을 ‘끊은’ 것도 축구를 보지 않는 것과 비슷한 배경이 있지 않을까 싶다. 직접 여쭤 보지는 않았지만, 현실의 엄혹함에 견주어 클래식 음악이 너무 우아하고 한가롭다고 생각하신 게 아닐까.


나로서는 월드컵의 열기와 클래식 음악의 아름다움을 두루 챙겨서 ‘인도에서 차도로’ 내려서는 역사적 행진의 일부로 삼을 수 없는 것일까, 늘 고민하고 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선생이 예전처럼 축구도 즐기고 클래식 음악도 즐기면서 ‘사랑을 강제’할 방법을 궁리할 수는 없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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