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한 ‘이 빠진 칼’ 아닌가
‘이 빠진 칼’이라니. 칼에 이빨이 있다고 처음 말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누가 언제 말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 시인의 눈을 가진 사람이었을 테다.
아시다시피, 칼과 이는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 다른 것이 더 많다. 가령 칼은 씹지 못하고 이는 베지 못한다. 칼끼리도 그렇다. 식칼의 ‘이’와 장검의 ‘이’는 얼마나 다른가.
그런데도 ‘이 빠진 칼’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우리의 의인화 능력은 때로 상상을 뛰어넘는다. 불전기이 들어온다, 약이 듣는다, 시계에 밥을 준다, 6학년 5반이다….
우리는 인간 아닌 것을 인간화하면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소통의 범위를 넓혀간다. 직유와 은유 같은 ‘에둘러 말하기’가 없었다면 우리 삶은 훨씬 더 팍팍했을 것이다.
천국은 비유로 이뤄져 있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고 비유가 ‘행복의 나라’의 전유물은 아니다. 우리는 돌려 말하기, 즉 다르게 말하면서 ‘불행의 나라’의 고통을 다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고찬규의 시 ‘칼’은 한때 “잘 드는 칼”처럼 자기 역할을 다하던 삶이 폐기 처분된 상황을 그리고 있다. 홀로 된 노인, 가난한 병자, 일터에서 쫓겨난 중년, ‘혼밥’ 먹는 비정규직 등 ‘이 빠진’ 약자 혹은 소수자의 삶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한다.
다행인 것은 “누구도 버리지 않”고 서랍장에 보관하고 있다는 것인데, 문제는 “더는 벼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서랍장을 열어보자. 내 마음속 서랍부터 열어보자. 그 안에 어떤 칼이 녹슬고 있는지.
이 나라의 서랍도 열어보라고 하자.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이 빠진 칼이 쌓여 있는지. 자기 안에, 그리고 주위에 있는 이 빠진 칼을 외면한다면, 그 또한 이 빠진 칼이 아닐 수 없다.
★ 이 글은 농민신문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