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12

소설, 자서전 8

저자소개

황주리
화려한 원색과 흑백, 열린 상상력을 바탕으로 독특한 회화 세계를 구축한 신구상주의 계열의 가장 주목받는 화가로, 다양한 소재와 다양한 장르를 통해 도시적 인간의 내면세계와 인간 상황을 시적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원고지를 캔버스삼아 그림그리기를 시작했던 그녀는 뛰어난 산문가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있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그림이 그려지기를 기다리는 빈 캔버스다. 캔버스 외에도 안경과 돌과 오래된 목기 등에 그려진 그의 그림들은 사라지는 순간들을 지금 여기에 붙잡아두려는 ‘시간에 관한 명상’들이다. 26회의 국내외 개인전과 이백 여회의 기획단체전에 참가했으며, 석남미술상과 선미술상을 수상했다. 산문집 『날씨가 너무 좋아요』 『세월』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나 흙이 묻었다』『한 번, 단 한 번, 단 한 사람을 위하여』 등을 펴냈다.


크리스틴 혜경이 쓴 책을 다시 읽으며 겨울을 보냈다. 강물에 휩쓸려 내려가는 것처럼 몇 년도라든지 하는 시간의 이름은 내게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구분과 24시간의 이름은 삶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필요했다. 내가 삶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였을까? 삶을 낭비한다는 죄책감은 때로 관계의 허무함에서 왔다. 우리가 끝까지 읽지도 않을 책을 사는 이유는 뭘까? 의미를 확대하면 얼마 못 가 헤어질 연인과 얽히거나 ―얽힌다는 표현은 관계를 설명하기에 너무도 사실적이다.― 끝까지 같이 살지도 않을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그냥 대책 없이 제목과 필자만 보고 설레는 것이다. 내가 머나멀다고 느끼는 어머니라는 책과 세상에서 가장 가깝게 느끼는 아버지라는 책과 그나마 가장 오래 만났다고 할 수 있는 『자넷』이라는 책을 제대로 읽은 건지 점점 알 수가 없어졌다. 책도 연애와 같아서 분명히 연애라는 걸 했는데 그게 연애도 뭣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게 연애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시간이 지난 후에 그게 분명 연애였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모든 게 생각의 장난인지도 모른다. 


어제는 꿈속에서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가면무도회에 참석했는데, 무슨 게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누군가를 찾고 있는 기분인데 그게 알고 보니 ‘나’를 찾는 게임이었다. 여러 사람이 화려한 옷을 입고 가면을 쓰고 내게 다가와 서로 다 ‘나’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남자도 여자도 아이도 노인도 외국인들도 있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인지도 몰랐다. 언젠가 자넷과 함께 뉴올리언즈에 갔을 때 이층에서 갖가지 가면을 쓰고 깃털이 달린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 꽃을 던지던 생각이 났다.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성별은 중요하지도 않았다. 길을 가다가 꽃을 받는 사람은 꽃을 던진 사람과 그날 밤을 함께 지내는 오랜 관습이 전해 내려온다고 들은 것 같다. 꽃으로 온몸을 뒤덮은 누군가가 다가와 “내가 당신이오.” 한다. “그럼 당신의 부모는 누구입니까?” 하고 물으니 여자도 남자도 아닌 것 같은 사람이 “나는 짝짓기 없이 알을 낳는 대벌레의 자손”이라고 답한다. 설마 내가 벌레의 종이라니. 어릴 적부터 나는 벌레를 무서워했다. 잠자리와 나비의 다양한 종들과 귀뚜라미를 빼고는 보기만 해도 기겁을 했다. 귀가 얼마나 얇은지 그들은 무해한 곤충이란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누군가 붕붕거리는 벌레의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당신은 아무리 자라도 10cm가 고작인 벌레입니다. 몸체가 길고 가늘고 색깔은 담갈색이며 가슴 등 쪽에 희미한 붉은 띠가 있습니다. 특히 당신의 종은 죽은 척하기로 유명합니다. 누군가 슬쩍 건드리거나 놀라게 하면 죽은 것 같이 나무에서 떨어져 다리를 전후로 길게 늘여 몸에 붙이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갑자기 나는 머리도 다리도 꼬리도 없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르는 고작 10cm의 대벌레가 된다.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는 참에 연회장 구석으로 기어가 죽은 척하고 있으려는데, 이상한 벌레 한 마리가 옆에 와서 툭 치며 말한다. 


“어이, 나는 ‘그레고르 잠자’라고 해. 많이 들어 본 이름이지? 그대는 벌레가 된 지 얼마 안 된 것 같군. 한 오 분 전만 해도 사람 꼴을 하고 있는 걸 봤는데 말이야. 좀 지나면 익숙해진다네.” 


나는 그 유명한 이름을 듣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전설의 벌레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앞으로의 세상은 벌레들이 아주 힘든 세상이 될 거네. 지구의 식량이 바닥이 나서 단백질 대체재로 벌레들을 양식하는 세상이 올 거거든. 바다가 오염되어 생선을 못 먹게 되니까 말이야.” 문득 어릴 때 메뚜기 반찬을 도시락에 싸갔다는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영양가 만점에다 맛도 좋았다는 메뚜기를 나는 오래된 영화 펄벅의 「대지」에서 보았다. 수없는 메뚜기 떼가 끝없는 대지의 풀 한 포기 안 남기고 다 먹어치우는 장면이 공포의 기억으로 내 의식 속에 남아있다. “메뚜기 같은 곤충 말이시군요?” 그러자 그레고르 잠자는 말했다. “각자 살아가는 메뚜기는 힘없는 곤충에 불과하지. 하지만 환경의 변화로 알의 부화율이 급격히 증가하여 일정 공간의 메뚜기 수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면 각자 자생하던 메뚜기들이 하나의 군단으로 변화하게 된다네. 집단으로 움직이면서 성격이 포악해지고 식욕이 급격하게 증가하지. 수가 작을 때는 각자도생이지만 수가 많아지면 수십억에서 수천억 마리가 되어 군단을 이루며 한번 지나간 자리는 황무지가 돼버린다네. 메뚜기의 무섭게 증가한 식욕은 이들이 분비하는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 때문이라네. 세로토닌은 감정, 기분, 수면 등의 조절에 관여하는 신경전달물질이지. 결핍되면 우울증과 불안감이 생긴다는, 우리가 행복호르몬이라 부르는 바로 그 호르몬이라네. 그런데 메뚜기 수가 늘어나면서 세로토닌 분비가 3배 이상 증가하게 되어 이 과다한 행복호르몬이 메뚜기의 공격성을 높여 과도한 식욕으로 변하는 거지. 메뚜기에게 살아가는 공간의 밀도가 높아진다는 건 먹을 것이 부족해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그들의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 인간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준다는 말일세.” 


그레고르 잠자가 밑도 끝도 없는 메뚜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도중에, 근사한 배트맨 가면을 쓴 남자가 걸어오더니 그를 손으로 들어 올려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러자 나도 벌레가 아닌 사람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등이 간지러워 긁으려는데 조금 전에 없던 손의 기척이 느껴졌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기 전에 베트맨은 자신의 가면을 나의 얼굴 위에 씌어주고는 사라져 버렸다. 꿈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나는 배트맨과 행복호르몬과 메뚜기와 그레고르 잠자라는 연관성 없는 존재의 의문부호들을 지니고 현실로 귀환했다. 미국에서 출생해 어린 나이에 한국으로 돌아가 아버지 손에 의해 자란 소년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짝짓기를 해서 자신을 낳은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둥지에 낯선 새가 낳은 알 속에서 스스로 깨고 나온 고독한 소년은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도 친아버지는 아니라서, 알에서 태어난 자신을 주워다 기른 거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나를 찾는 게임은 어쩌면 죽을 때까지 계속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에게 행복호르몬 세로토닌을 스스로 배양해 온 능력은 오로지 언제나 따뜻했던 아버지의 등 때문이었다.



어느 영화에선가 성모마리아 상 앞에서 기도하던 나이 든 여인이 생각난다. “죄없이 수태한 이여. 거짓말한 것을 자백합니다.” ‘죄없이 수태한’이라는 대목이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았다. 자연의 섭리인 짝짓기는 왜 죄가 되는가? 아버지를 따라 가끔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곤 하던 나는 늘 그 의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버지는 이멜다 여사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아무리 서로 다른 점이 매력이라 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 간의 마음의 간격은 점점 넓어졌다. 아버지의 겸허한 음악은 이멜다 여사의 허영 가득한 명품의 세계 앞에서 맥없이 무너졌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갯츠비 흉내를 내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날 이멜다 여사는 아버지 돈으로 사들인 값비싼 물건들을 다 팔아치우고, 빚을 잔뜩 지워놓고는 자취를 감춰버렸다. 가장 지적인 여자와 사랑에 실패한 아버지는 정반대의 여자와 만나 또 실패했다. 빈털터리가 된 아버지는 나이 든 분들만 오는, 친구가 경영하는 클래식 바의 매니저 일을 맡기 시작했다.


어느 추운 겨울 오후 나는 두 통의 편지를 받았다. 한 장은 잘 지내고 있으니 염려 말라는 아버지에게서 온 짧은 손 편지였고, 다른 한 장은 크리스틴 혜경의 이메일이었다. 맨해튼의 반젠 노블 서점에서 사인회를 하던 작가 크리스틴 혜경이 아니라, 휠체어를 탄 화가이면서 장애인 올림픽 우승자인 크리스틴 혜경의 메일이었다. 나는 똑같이 생긴 같은 이름의 두 사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 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결혼식에서 남편이 될 퇴역 중령 존을 가짜 권총으로 쏘는 자작극을 벌이고 사라진 뒤,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제야 소식 전합니다. 나는 지금 서울에 있습니다. 자넷과 당신이 가끔 생각났지만 때로는 설명이 불가한 일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나는 서울 강남의 뒷골목에서 나이 든 분들만 들어갈 수 있는,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는 와인 바에 갔다가 당신과 똑같이 닮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흘러나오는 음악이 낯익어서 무슨 음악이냐고 물으니,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환상곡」이라 하더군요. 슈베르트가 그의 생애 마지막 해인 1828년에 작곡한 곡으로 사랑했던 제자 캐롤라인에게 바친 곡이라고,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시더군요. 마침 손님이 없어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와인 한 병을 다 비웠답니다. 그가 바로 당신의 아버지라는 걸 알고는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