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16

소설, 자서전 6

저자소개

황주리
화려한 원색과 흑백, 열린 상상력을 바탕으로 독특한 회화 세계를 구축한 신구상주의 계열의 가장 주목받는 화가로, 다양한 소재와 다양한 장르를 통해 도시적 인간의 내면세계와 인간 상황을 시적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원고지를 캔버스삼아 그림그리기를 시작했던 그녀는 뛰어난 산문가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있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그림이 그려지기를 기다리는 빈 캔버스다. 캔버스 외에도 안경과 돌과 오래된 목기 등에 그려진 그의 그림들은 사라지는 순간들을 지금 여기에 붙잡아두려는 ‘시간에 관한 명상’들이다. 26회의 국내외 개인전과 이백 여회의 기획단체전에 참가했으며, 석남미술상과 선미술상을 수상했다. 산문집 『날씨가 너무 좋아요』 『세월』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나 흙이 묻었다』『한 번, 단 한 번, 단 한 사람을 위하여』 등을 펴냈다.


크리스틴 혜경을 다시 만난 건 맨해튼의 반젠 노블 책방에서였다. 가을이었고 놀랍게도 그녀는 책 사인회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고, 화제의 책 제목은 『크리스틴 혜경의 이중생활』이었다. 나는 문득 언젠가 본 영화 제목을 떠올렸다. 폴란드 출신의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말이다. 놀랍게도 그녀는 휠체어를 타고 있지 않았고 멀쩡한 걸음걸이로 서서 독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 갑자기 눈앞에 펼쳐졌다. 버스 안에서 스쳐 가는 바르샤바 거리 풍경과 영상 음악이 인상적이었던 그 영화의 느낌이 전생처럼 아득히 떠올랐다. 영화보다 더 오래 남는 영화음악들이 아주 드물게 있다. 아니 정확한 말은 음악과 영상과 연기와 편집이 다 살아남는, 매력적인 타피스트리를 닮은 영화, 보고 또 봐도 아직 못 본 부분이 남는 영화, 아니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디테일들이 다 그럴 것이다.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난 똑같이 생긴 두 여인, 폴란드의 베로니카와 프랑스의 베로니끄는 각자 다른 도시에서 다른 일상을 영위해 간다. 그러던 날들 중 노래를 잘 부르는 베로니카가 공연 중 갑자기 심장이 멎어 숨을 거둔다. 같은 시간에 베로니끄는 까닭 모를 슬픔에 눈물을 흘린다. 


저기 믿을 수 없이 똑같은 크리스틴 혜경이 휠체어를 타지 않고 의자에 반듯이 앉아 독자들을 위해 자신의 책에 사인을 해주고 있는 풍경에 나는 꼼짝달싹도 못 하고 그 자리에 붙박이 되어 서 있었다. 나도 책을 한 권 사들고 줄을 서서 그녀의 약간 삐딱하게 숙인 고개와 민첩한 손놀림에 시선을 두고 차례를 기다렸다. 그녀의 모습은 내가 아는, 한국 이름이 섞인 미국인 크리스틴 혜경이 틀림없었으나 느낌은 왠지 낯설었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고 내가 그녀 앞에 서서 이름을 말하자 그녀는 아무 감흥 없이 사인을 해주었다. 나는 줄을 길게 서 있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책방을 빠져나왔다. 그녀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틀림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책을 읽기 시작한 나는 블랙홀에 빠진 것 같은 아득함을 느꼈다. 책 속의 크리스틴 혜경은 내가 아는 크리스틴 혜경이 아니었다. 일종의 자전적 에세이인 그 책은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인 입양아의 고독한 성장에 관한 기록이었다. 한국인이라고 분류하기엔 서구적인 모습이 두드러진 혼혈이었기에 얼핏 보면 아무도 그녀가 입양아라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가 입양되어 간 집에는 이미 또래의 한국인 남자아이 하나를 비롯해 세 명의 동양인 여자아이들이 같이 살고 있었다. 자선이라기보다는 영업에 가까운 나쁜 입양의 한 예였다. 부부는 매일 밤 독설을 퍼부으며 싸우기 일쑤였고, 형제 아닌 형제들은 밥을 먹기 위하여 앵벌이를 나가야 했다. 떠돌이 음악가이던 부부는 해가 지면 거리에 나가 듀엣으로 바이올린을 켰고 아이들은 모자를 들고 지폐를 걷었다. 여자아이들은 교대로 집에 남아서 빨래를 하거나 식사를 준비했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 바로 집에 남는 시간이었다. 일당도 받지 않고 도우미 일을 하는 거였지만, 그녀의 유일한 자유 시간이었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 아동복지센터의 선생님은 그녀에게 알 수도 없는 말을 중얼거리곤 했다. 그녀도 보육원 출신이라 했다. “너는 딱 서양 사람처럼 생겨 미국서 사는 게 더 편할 거야. 늘 살기 위해 먹어야 해. 생존의 비결은 군인처럼 생각하는 거야.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쉴 수 있을 때 쉬는 것이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녀는 잠 안 오는 밤에 이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 삼십 년 뒤쯤 어느 영화에서 이와 똑같은 대사를 되뇌는 간호사가 나오는 장면을 목격했다.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사는 일이 고달플 때마다 그 말을 되뇌며 먹기 싫어도 먹고 쉴 수 있을 때 쉬었다. 


부부가 기분이 좋은 저녁에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듀엣을 위한 환상곡」들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피아노 한 대에 두 사람이 좌우로 앉아 같이 팔을 스치며 연주를 하는 곡이었다. 슈베르트 특유의 아름답고 섬세하고 비극적인 서정이 어린 그녀의 마음속에 파고들었다. 그 음악이 들려오는 날은 모든 게 순조로웠다. 양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창조한 슈베르트가 생전에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가난한 천재 음악가였고, 외롭고 절망적인 짧은 삶을 살다 갔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해 들려주곤 했다. 하지만 부부가 심하게 싸운 날 밤이면 양부가 술을 잔뜩 먹고 온 집안을 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 책 속에 술을 마신 양부는 헐크를 닮았다고 씌어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이 어렴풋한 유년의 기억을 일깨우는 것도 같았다고. 왜냐면 그럴 때마다 그 헐크의 모습이 친부의 기억나지 않는 얼굴과도 겹치곤 했으니까. 그녀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헐크가 내면에 들어앉은 대상을 피해 다녔다. 헐크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는 너무 멀쩡하다가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이 되기 일쑤였다. 양부가 괴력으로 온 집안의 기물을 부술 때마다 양모는 못들은 척 피아노를 쳤다. 그럴 때도 슈베르트의 소나타나 세레나데를 아무 일도 없는 듯 평화롭게 연주했다. 그 집에 있던 한 2년 동안 슈베르트는 그녀에게 구원이자 열정, 휴식이었고 반대로 고독과 불안, 절망이었다. 그녀는 양부모의 이중적인 면모가 늘 혼란스러웠다. 때로는 나쁘거나 좋거나, 나쁘지도 좋지도 않거나, 너무 나쁜 그들이었다. 



먼저 입양을 온 한국인 남자아이가 술 취한 양부의 폭력을 말리다가 두드려 맞아 온몸에 멍이 들었을 때, 그들은 같이 도망쳤다. 그렇게 그들은 거리에서 몇 년을 보냈다. 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지하철역의 허락된 공간에서 오빠라고 부르던 그가 바이올린을 켰다. 입양된 몇 년 동안 양부모는 그에게 앵벌이용으로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기억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바이올린을 켠 기억이 있다는 듯 그가 익숙하게 바이올린 연주를 했기 때문이다. 악보를 읽고 그대로 연주하기보다는 슈베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들을 제멋대로 듣기 좋은 음률로 연주하곤 했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어린 바이올린 연주자를 둘러싸고 지폐를 모자 속에 넣어주었다. 미국의 큰 건물들은 따뜻했고 화장실에서 세안과 간단한 샤워를 하곤 했다, 그녀가 오빠라 부르던 그와의 시간은 생애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들은 늘 운이 나쁘지는 않았으며 때로는 운이 좋기도 했다. 익명의 독지가가 꽤 큰돈을 모자에 넣어주고 가기도 했으니까. 남매는 돈이 생기면 비싼 한국음식점에 가서 포식을 했다. 입맛의 기억은 절대 잊히지 않았다. 존으로 불리던 오빠는 어른스러운 말투로 어디선가 여러 번 들은 듯한 낯익은 말을 들려줬다. “생존의 비결은 군인처럼 생각하는 거야.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쉴 수 있을 때 쉬는 거지.”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같은 이름의, 훈장을 잔뜩 걸고 다니는 퇴역 중령 존을 떠올렸다. 그는 갑자기 사라져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과연 그는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일까? 내가 우연히 극적으로 재회한 크리스틴 혜경도 나를 알아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휠체어를 타고 있지도 않았으며 내가 알던 그녀의 삶의 내용과 책 속의 그녀의 인생은 전혀 딴판인 두 사람의 인생이었다. 어디선가 들은 소리지만 인생에서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언젠가 본 슈만의 정신병원 체류 시절에 쓴 악보는 음악이 아니라 그림이었다. 클레의 그림을 닮은 그림, 악보가 그림이 아닐 이유가 있을까? 본인 외에는 해독을 못 할 뿐. 아니 본인은 해독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천재들은 암호들을 새겨놓고 세상을 떠난다. 후세의 팬들과 그들의 유산으로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암호를 해독하려 애를 쓸 뿐이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하나의 암호이다. 그 암호를 풀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사실 거의 실패할 뿐 아니라,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알려고 하면 알수록 점점 더 모르게 되는 블랙홀 같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문득 어디선가 읽은 이런 문구가 떠올랐다. 


“당신은 시체를 지고 다니는 작은 영혼이다.”

― 에피테토스


어디선가 읽은 얼마나 많은 글들이 우리의 영혼을 위로하는가? 그들이 바로 나의 스승이며 친구인 것이다. 


“우리가 듣는 모든 말은 사실이 아니라 의견이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관점이지 진실이 아니다.”

― 아우렐리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