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13

소설, 자서전 5

저자소개

황주리
화려한 원색과 흑백, 열린 상상력을 바탕으로 독특한 회화 세계를 구축한 신구상주의 계열의 가장 주목받는 화가로, 다양한 소재와 다양한 장르를 통해 도시적 인간의 내면세계와 인간 상황을 시적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원고지를 캔버스삼아 그림그리기를 시작했던 그녀는 뛰어난 산문가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있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그림이 그려지기를 기다리는 빈 캔버스다. 캔버스 외에도 안경과 돌과 오래된 목기 등에 그려진 그의 그림들은 사라지는 순간들을 지금 여기에 붙잡아두려는 ‘시간에 관한 명상’들이다. 26회의 국내외 개인전과 이백 여회의 기획단체전에 참가했으며, 석남미술상과 선미술상을 수상했다. 산문집 『날씨가 너무 좋아요』 『세월』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나 흙이 묻었다』『한 번, 단 한 번, 단 한 사람을 위하여』 등을 펴냈다.


자넷과 데이빗과 나는 목욕을 하지 않는 퇴역 중령 존과 그의 새 연인 ‘크리스틴 혜경’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림을 그리는 그녀의 한국 이름 ‘혜경’은 미국 이름 ‘크리스틴’ 뒤에 꼭 붙어 다녔다. 그녀의 그림에는 언제나 영어로 크리스틴, 옆에 한국어로 혜경이라는 사인이 되어 있었다. 우리 모두는 그녀를 크리스틴 혜경이라고 불렀다. 화가이면서, 휠체어를 타고 달리는 장애인 마라톤 우승자, 그녀 옆에 선 존은 늠름해 보였다. 결혼식은 존이 전처와 헤어졌던 뉴욕현대미술관 뒤 작은 간이 골목에 있는 인공폭포 앞에서 거행되었다. 존이 예의 ‘지아니 베르사체’ 양복을 입고 옷깃을 열며 번쩍거리는 훈장들을 보여준 뒤, 결혼 서약이 시작되었다. 주례도 사회도 없는 존의 일인삼역 결혼식은 왠지 슬프고도 웃음이 났다. 어느 날 기적이 찾아와 아내 크리스틴 혜경이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나 씩씩하게 걸을 수 있다 해도, 아내 크리스틴 혜경은 남편 존 웨인스타인을 버리지 않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의 곁에 있을 것을 맹세합니까? 남편 존 웨인스타인은 아내 크리스틴 혜경이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나 하늘을 날 때까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녀를 사랑하겠습니까? 크리스틴 혜경이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나는 모습이 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좀 있으니 초대도 하지 않은 객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들은 마치 결혼을 축하해 주러 모인 진짜 손님들처럼 주섬주섬 먹을 것들을 내려놓았다. 아마도 노숙자들인 것 같았다. 우리는 준비해 간 샌드위치와 김밥, 치킨과 케익 들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고 풍성한 결혼 피로연을 준비했다. 노숙자들은 어쩌면 존의 친구들인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목욕을 하지 않는 비밀결사대의 일원들인 것처럼 보였다. 그중 누군가가 축가를 불렀다. ‘달은 지금 몇 시인가?’ 하는 아일랜드 민요라고 했다. 그 노랫말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달에선 아무도 목욕을 하지 않는다. 왜냐면 달빛이 우리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씻어주기 때문이다.” 정말 잊을 수 없는 축가였다. 누군가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외로워 보이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는 커다란 고목을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옆에서 첼로를 켜는 여자도 슬퍼 보였다. 음악은 다 슬프다. 인생처럼. 내가 가장 처음 참석한 결혼식은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갔던 모르는 사람의 결혼식이다. 악기상점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주선으로 이름 없는 음악가들이 연주하는 작은 소년 합창단에 끼어서 축가를 불렀다. 그 노래가 뭐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미 아버지와 어머니가 헤어진 뒤라, 어린 나의 결혼에 대한 감정은 슬픈 크리스마스 저녁, 산타클로스가 선물이 가득 든 양말을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면서 나만 못 본 척 그냥 지나가는 결핍된 기분이었다. 허기진 감정의 습관이랄까, 그런 기분이 휠체어를 탄 신부의 보라색 드레스에 얹혀 증폭되어 눈물이 났다. 나는 ‘달은 지금 몇 시인가?’ 노래 구절을 혼자 읊조리며 늘 인생을 짝사랑해 왔다는 쓸쓸한 생각에 젖어 들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그 작은 결혼식의 평화를 깨며 뛰어 들어왔다. 아무도 말릴 겨를도 없이 그는 휠체어를 탄 신부와 퇴역 중령 존이 서 있는 방향으로 무작위로 권총을 몇 발 쏜 뒤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허공을 향해 날린 권총은 아무의 심장도 관통하지 못한 채, 잊을 수 없는 결혼 해프닝의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드디어 나는 마흔 살이 되었다. 자넷은 나의 오랜 프러포즈를 거절하고 전남편과 재결합했고, 나는 외로운 마흔 살을 맞았다. 그녀가 왜 나를 떠났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존의 결혼식 해프닝은 일주일 뒤 「빌리지 보이스」에 대서특필되었다. 한명의 사망자도 없는 결혼식 총기테러는 전위미술가이면서 화가, 장애인 올림픽 우승자인 크리스틴 혜경의 자작극으로 판명되었고, 결혼 퍼포먼스의 남자주인공인 퇴역 중령 존은 자취를 감췄다. 그의 행방은 아직 묘연하다. 존이 그 결혼이 퍼포먼스였음을 알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권총은 진짜 총이 아닌 걸로 판명되었다. 마치 극장에 앉아서 영화를 보는데 바람이 불고 의자가 흔들리고 화약 냄새가 나는 4D 영상을 보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던 거다. 나는 마흔 살이 되던 아침, 꿈을 꾸었던 것 같다. 낯선 골목에서 아무리 집을 찾으려 해도 집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 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낯선 길들이 나타났다. 빌딩 숲속의 골목 속의 골목, 어느 낯선 건물의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간다. 갑자기 장면이 바뀌어 옆집에서 들리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데, 노부부가 별 의미도 없는 잡담을 천천히 느린 말씨로 한없이 늘어놓고 있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옆집의 노부부를 모시고 택시를 잡아탄다. 그들이 내 어머니와 아버지라고 운전기사가 말해준다. 노부부 중 늙은 여인이, 어쩌면 나의 어머니가 다급한 말투로 내게 다른 택시를 잡아타고 빨리 공항으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얼떨결에 택시에서 내려 공항 가는 택시를 잡으려는데 어디에도 택시는 보이지 않고, 때는 밤이고, 인적 없는 좁은 길에 나 혼자 서있다. 어디선가 ‘달은 지금 몇 시인가?’ 하는, 존의 결혼식에서 울려 퍼지던 노래가 들려온다. 문득 내가 달에 착륙했다는 생각이 든다. 달에 가려면 공항에 가야 하는가? 그리고 달에는 왜 가는가? 그리고 그곳은 지금 몇 시인가? 그런 뜬금없는 생각들을 하는 사이 택시 한 대가 내 앞에 선다. 기사와 승객 사이 가림막 유리창이 있는 뉴욕의 옐로우 택시다. 기사와 나는 아무런 나라 말로도 소통이 되지 않는다, 어쩌면 달의 언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에어포트, 에어포트, 겨우 통한 듯 머리를 끄덕이는 기사가 내려주는 곳에서 내리니 캄캄한 골목길이다. 이곳에 공항이 있다고?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좁은 비탈길을 내려가니 갑자기 바다가 나온다. 맙소사, 캄캄한 밤에 누군가 바다를 사진 찍고 있다. 꿈속의 그 얼굴은 퇴역 중령 존이다.



자넷이 떠나고 난 뒤 나의 휴일은 외로웠다. 휴일이면 자넷과 맨해튼을 발바닥이 닳도록 걸어 다니는 대신 나는 차를 빌려 낯선 곳으로 떠났다. 하이웨이를 끼고 펼쳐지는 한없이 황량한 풍경, 영화 속의 「파리, 텍사스」나 「마이 오운 프라이빗 아이다호」 속의 주인공이 되어 주유소밖에 없는 끝없는 길 위에 서 있으면, 나는 우주인처럼 외로웠다. 드디어 오고야 만 마흔 살에 나는 늦은 석사학위를 끝내고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아버지의 가까운 친구가 경영하는 그 한국음식점에서 매니저 일을 했다. 영문학은 내게 달나라로 가는 길 같았다. 늦게 학위를 따봤자 교수가 되기는 하늘의 별따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그저 내 삶의 완성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싶었다. 세상의 가치의 신발에 나의 삶의 가치를 욱여넣기는 싫었다. 조금씩 외로움이 가장 친한 친구처럼 느껴지면서도 가끔은 분노가 치밀었다. 야근을 하고 돌아와 텔레비전을 켜니 투우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문득 평생 일만 하다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열광하는 사람들의 외침 속에서 혼이 다 빠진 채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칼에 맞아 죽는 투우 소의 운명은 어느 쪽이 나을까? 무기수와 사형수 중 어느 쪽이 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투우 소는 투우가 시작되기 전 24시간 동안 캄캄한 곳에 가두어 둔다고 텔레비전 속의 나레이터가 말하고 있었다. 햇빛 속으로 걸어 나온 소는 투우사가 휘날리는 빨간 망토의 흔들림에 흥분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투우사가 던져대는 작살에 찔려 피 흘리며 힘이 빠져나가다가 결국은 칼에 맞아 쓰러진다. 죽은 투우 소는 보통 쇠고기보다 훨씬 질긴데도 특유의 향이 있어서 훨씬 비싸게 팔린다고 한다. 싸우다 죽은 분노의 향기가 값으로 매겨지는 인간들의 어떤 세계, 이 잔인한 프로세스를 사람들은 축제의 이름으로 광분하며 즐기는 것이다. 나는 빨간 망토를 휘날리는 투우사를 보면서 갑자기 크리스틴 혜경을 떠올렸다. 나도 모르고 있던 어떤 궁금한 그리움이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