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16

소설, 자서전 3

저자소개

황주리
화려한 원색과 흑백, 열린 상상력을 바탕으로 독특한 회화 세계를 구축한 신구상주의 계열의 가장 주목받는 화가로, 다양한 소재와 다양한 장르를 통해 도시적 인간의 내면세계와 인간 상황을 시적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원고지를 캔버스삼아 그림그리기를 시작했던 그녀는 뛰어난 산문가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있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그림이 그려지기를 기다리는 빈 캔버스다. 캔버스 외에도 안경과 돌과 오래된 목기 등에 그려진 그의 그림들은 사라지는 순간들을 지금 여기에 붙잡아두려는 ‘시간에 관한 명상’들이다. 26회의 국내외 개인전과 이백 여회의 기획단체전에 참가했으며, 석남미술상과 선미술상을 수상했다. 산문집 『날씨가 너무 좋아요』 『세월』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나 흙이 묻었다』『한 번, 단 한 번, 단 한 사람을 위하여』 등을 펴냈다.


자넷은 이혼을 하고 딸 ‘미아’와 함께 살고 있었다. 우리가 만나는 주말엔 주로 아빠와 지낸다고 했다. 나는 엄마와 살면서 주말에는 아빠와 만나는 그 아이가 부러웠다. 


나의 유년시절은 어떠했는가? 어머니의 존재는 내게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누구인가?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 그녀는 나를 한 번도 찾은 적이 없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뉴욕타임즈」에서 어머니와 그녀의 새 남편이 대서특필 된 기사를 본 기억은 있다. 우연히 지하철 옆자리에 탄 사람이 보는 신문을 건너다본 짧은 기억이다. 엄마의 이름이 얼핏 눈에 띄었다. 부부의 연구가 노벨상 후보에 올랐다는 기사였다. 어머니가 마리 퀴리를 연상케 한다는 기사의 제목이 얼핏 보였다. 나는 그저 못 본 듯 그 기억을 없애려고 애썼다. 나는 자넷을 사랑했다. 그녀가 우체국 직원인 것도 좋았고, 잘난 척하지 않는 겸허한 사람이라 좋았고, 대단한 뭔가를 하지 않고 성실하게 작은 일에 행복을 느끼는 그녀가 좋았다. 어쩌면 어머니에 대한 반항 같은 감정도 섞여 있을지 몰랐다. 어머니가 알면 그러겠지. “우체국 직원이랑 사귄다고? 네 아버지는 너한테 관심이나 있는 거냐? 영문학을 전공한다고? 아직 석사 학위도 못 따고 있다고? 미국에서 지금 이 시대에 영문학을 전공하다니.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구나. 애비 닮아서 착하기만 하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나 하는지.” 하고 혀를 찰지 모른다. 나는 똑똑한 어머니를 싫어했다. 아니 세상의 너무 똑똑한 여자들을, 아니 너무 잘난 사람들을 싫어했다. 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성공한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작은 행복을 일궈가는 자넷과 함께 나는 행복했다. 태어났다는 이유로 너무 열심히 사는 것도 지겨웠다. 가끔은 사라져서 우편물들을 땅에다 묻어버린 우체부처럼 무책임하게 살고 싶었다. 하긴 어머니처럼 무책임한 사람이 있을까? 나는 어머니가 묻어버린 낡은 우편물 중 하나라는 생각이 가끔 들었다. 자넷은 어머니가 대서특필된 「뉴욕타임즈」의 기사를 오려다가 액자에 넣어 내게 주었다. 내가 어머니에 관해 자넷에게 말해 준 것이 잘못이었다. 내가 너무 화를 내는 바람에 자넷과 나는 한 달 동안 만나지 못했다. 전화를 아무리 해도 받지를 않아 우체국 계단에 앉아 그녀를 하염없이 기다리기도 했다. 아버지가 연애 시절에 어머니에게 보낸 오래된 시 구절을 영어로 번역해 자넷에게 보내기도 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중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행복」, 유치환


자넷은 내가 영어로 번역한 이 시를 받고 너무 감동을 받아 더욱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돈도 아니고 보석반지도 아니고 비싼 명품 가방도 아닌 그 오래된 시가 먹히는 자넷을 나 역시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자넷이 사는 낡은 아파트는 겨울이면 창문이 잘 닫히지 않아 그 틈새로 폭풍우가 일 듯 덜거덕거렸다. 마치 한해 한해가 다른 백 살 노인처럼 아파트의 창문은 점점 늙어가고 있었다. 3월이 되어도 뉴욕의 겨울은 추웠다. 이 봄날의 추위는 누구의 분노인가 하고 나는 잠시 생각했다. 나는 무언가에 늘 화가 나 있었다. 이게 어머니를 향한 분노인지 3월의 추위를 향한 분노인지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국음식점에서 가끔 부딪치는 어떤 불쾌한 인물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자넷은 나의 분노를 포근히 녹여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나는 점점 미국 친구들의 파티에 가는 일에 흥미를 잃어갔고, 별로 친할 것도 없는 사람들과 별 의미 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때우는 일에 싫증이 났다. 점점 누군가와 친해지는 것이 쉽지 않아졌다. 나는 매일 자넷 옆에 매미처럼 들러붙어 있고 싶었다. 자넷이 사는 아파트 창문 밖으로 강물이 넘실대는 풍경을 바라보는 일은 행복했다. 강을 쳐다보다가 우울증에 걸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울하다가도 강물을 쳐다보면 나는 살고 싶어졌다. 그러다가 다음 순간 죽어버리고 싶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자넷의 딸 ‘미아’는 나를 무척 따랐고, 한국말을 하나씩 배우는 걸 좋아했다. 그 애가 좋아하는 한국말은 맛있다는 말이었다. 낯선 외계어로 들리는 미아의 “맛있다”는 발음은 영어의 ‘딜리셔스’와는 무척 다르게 느껴졌다. 주말이면 미아의 아빠가 딸을 데리러 왔고, 자넷과 나는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고 돌아와 꼼짝 않고 붙어 지냈다. 자넷이 잠시 간단한 와인 안주를 만드는 사이 나는 강물이 넘실대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다가 잠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아버지가 사시는 집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 집에 가려고 안개 낀 장터를 부지런히 걸어갔다. 사실 그 자리엔 오래전에 장터는 사라지고 커다란 쇼핑센터가 들어섰다. 꿈속에서 나는 오래된 장터에 있는 작은 식료품 가게에 들어가 라면을 사고 있다. 그동안 먹어보지 못했던 새로 나온 라면의 종류들을 바구니 속에 담았다. 얕은 꿈에서 깨니 자넷이 신라면을 튀겨서 유리그릇에 담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튀긴 라면은 그럴듯한 와인 안주가 되었다. 나는 ‘딜리셔스’를 연발하며 아버지가 끓여주던 오래된 라면을 떠올렸다. 그 시절엔 유효기간이 넘은 라면에 영어로 쓰인 딱지를 붙여놓은 그런 라면들이 많았다.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신선한 라면의 맛이란 얼마나 딜리셔스했는지. 어머니와는 워낙 어릴 때 헤어졌기 때문에 어머니가 해준 음식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나는 맛있다는 말이 슬펐다. 미아가 “맛있다”라고 발음할 때마다 나는 슬펐다. 나는 맛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딜리셔스”라고 말한다. 


영문학을 전공한 아버지가 내게 제일 처음으로 물은 말도 “맛있어?”가 아니라 “딜리셔스”였던 것 같다. 내게 ‘딜리셔스’는 에이프런을 두른 아버지를 생각나게 한다. 음악을 좋아하던 아버지는 어린 나를 가끔 음악회에 데리고 갔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갔던 음악회의 기억은 지휘자의 기억이다. 지휘자의 살아있는 몸짓은 닫힌 세상에서 열린 세상으로 날아가는 자유의 몸짓이었다. 그것도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과 그 음악을 듣는 사람들까지 데리고 우주로 날아가는 믿음의 몸짓, 명령의 몸짓, 나는 그 몸짓이 너무 멋져서 잠이 안 올 지경이었다. 지휘자를 보러 아버지를 따라 음악회에 따라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도 나는 지휘자가 되고 싶다.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라 더욱 애틋한 지휘자의 꿈, 꿈속에서 나는 지휘를 하는 꿈을 꾼다. 자넷은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교향곡을 틀어 놀고 제멋대로 하는 나의 엉터리 지휘를 구경하는 걸 좋아했다. 나는 그녀의 엉터리 지휘자, 그녀를 데리고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는 방향키를 잃어버린 조종사, 그래도 그녀는 먼먼 아득한 하늘을 나와 함께 날았다. 주말이면 우리는 센트럴파크에 가서 하염없이 걷다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가서 이집트관의 미라를 구경하기를 좋아했다. 미라를 구경하며 하염없이 조용히 앉아 우리는 죽음에 관해 생각했다. 죽은 뒤의 세상에서 영생을 누리려는 이집트인들은 현재의 삶을 내세에 가기 위한 준비로 생각했다고 책자에 씌어있었다. 그들은 내세에서 사용할 모든 물건들을 무덤에 넣기 시작했다. 죽은 이의 뇌는 버리고 각 장기를 소중히 여겨 단지에 담아 잘 보관했다고 한다. 다 버리고 뇌만 보존하면 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니 인간의 가장 큰 능력 중 하나는 보존의 능력일지 모른다. 지구의 생명이 끝난다면 인류는 그동안 보존해온 문명을 다른 행성으로 운반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럴 날이 진짜 올지도 모른다. 누군가 그랬었다. 미래란 오늘 있던 것이 사라지고 오늘 없던 것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그리고 미래란 늘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의 몫이라고. 이번 생이 그저 부담 없는 연습이라면 좋을 것 같았다. 내세에는 진짜 근사한 지휘자가 되어 자넷에게 멋진 지휘를 보여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