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02

소설, 자서전 2

저자소개

황주리
화려한 원색과 흑백, 열린 상상력을 바탕으로 독특한 회화 세계를 구축한 신구상주의 계열의 가장 주목받는 화가로, 다양한 소재와 다양한 장르를 통해 도시적 인간의 내면세계와 인간 상황을 시적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원고지를 캔버스삼아 그림그리기를 시작했던 그녀는 뛰어난 산문가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있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그림이 그려지기를 기다리는 빈 캔버스다. 캔버스 외에도 안경과 돌과 오래된 목기 등에 그려진 그의 그림들은 사라지는 순간들을 지금 여기에 붙잡아두려는 ‘시간에 관한 명상’들이다. 26회의 국내외 개인전과 이백 여회의 기획단체전에 참가했으며, 석남미술상과 선미술상을 수상했다. 산문집 『날씨가 너무 좋아요』 『세월』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나 흙이 묻었다』『한 번, 단 한 번, 단 한 사람을 위하여』 등을 펴냈다.



자넷은 문학이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모든 예술을 다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영화를 특히 좋아했다. 알라바마에서 온 무명화가인 데이빗과 함께 우리 셋은 주말마다 영화를 보러 다녔다. 그 시절 본 영화 중 가장 잊히지 않는 건 데릭 저먼Derek Jarman의 영화 「블루」다. 온통 파란 하늘색의 화면으로 시작되어 계속 깊고 음울한 음향만 들려온다. 보면서 십 분까지는 이제나저제나 화면이 바뀌기를 기다리다가 언제부턴가 화면이 바뀌리라는 기대도 사라진다. 살짝 조는 사이 배경음악과 어울리는 감독 자신의 목소리로 시작되는 조용한 나레이션은 죽음과 삶에 관한 깊은 사색으로 남아 있다. 


영화감독이면서 설치미술가, 성소수자 인권운동가 등 다양한 이력이 붙어있는 데릭 저먼은 그림을 공부한 사람이다.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의 생애를 그린 영화에서는 감독 자신의 화가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림으로도 그릴 수 없는 절대미에 도달한 파란 화면을 보면서 언젠가 미술관에서 본 이브 클라인Yves Klein의 온통 푸른 화면이 생각나기도 했다. 실체가 없는 막연함, 색을 통해 무형의 세계를 창조한 이브 클라인은 34세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브 클라인은 실제로 자신의 강렬하고 막막한 푸른색에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영화 「블루」는 1994년 에이즈로 생을 마감한 데릭 저먼 감독의 마지막 영화다. 문자 그대로 블루로 가득 찬 하나의 화면밖에는 볼 수 없지만, 79분 동안 그 푸름을 지켜보면서 도중에 나가버리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 아니,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영화라고조차 여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촬영할 당시 감독은 거의 앞을 못 보는 상태였다고 한다. 단지 흐릿한 파란색만 언뜻 볼 수 있는 상태였다. 그에게 보이는 유일한 색, 굳이 분류하자면 이브 클라인의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를 거대한 캔버스에 칠해놓은 것 같은 그림이면서 영상시… 거의 삼십 년 전에 본 그 앞선 영화를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물론 그 영화를 함께 본 자넷과 데이빗도 잊을 수 없다. 감독 자신의 낮은 목소리로 독백하듯, 절규하듯 풀어가는 이야기는 동성애자로 1990년대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 그 시절의 보스니아 전쟁, 눈이 잘 안 보여 옷을 자꾸 뒤집어 입고 일상 속에서 에이즈 환자로 불편하게 살아가는 일… 그러면서 하늘을 걷는 기분은 어떨까? 우주비행사는 드넓은 우주에서 어떤 감정을 느낄까? 하늘에는 어떤 것들이 존재하는가? 나에게 얼마의 시간이 남아있을까? 이제 점점 보이지 않는다, 이러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점점 죽음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매일 서른 알의 알약을 먹으며 절망적인 감정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남기는 메시지, 그 중간 사이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블루, 삶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던 영화 「블루」. 영화가 드디어 끝나고 파란색 화면도 서서히 사라지다 아주 사라진다. 나는 그 무렵 읽었던 생텍쥐페리의 ‘하늘 길에서 만난 적막한 태양’을 떠올렸다. 저 적막한 태양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내게 남아있는 삶의 색, 블루를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그때 데릭 저먼의 「블루」는 내게 생텍쥐페리의 적막한 태양과 겹쳐졌다. 

 

나는 수업시간에 들어가기 전에 자넷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우체국으로 가곤 했다. 일에 열중하는 얼굴도 슬쩍 보면서 편지를 창구에 던지고 나오곤 했다. 1990년대 맨해튼의 우체국 창구는 감옥을 연상시켰다. 스산하게 내려져 있는 쇠창살 앞에 서면 마치 형을 언도받기 위해 기다리는, 번호표를 단 죄수의 조급한 마음이 되곤 했다. 아니 나는 단지 소포를 부치러 왔을 뿐이야, 하고 마음을 바꿔 먹으면 갑자기 세상은 아름다워졌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녀에게 소포를 부치러 온 것이다. 물론 맨해튼의 우체국 창구에는 “친절한 우체국, 우리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씌어있기도 했다. 자넷과 사귄 이후로 우체국은 내게 더 이상 감옥이 아니었다. 그즈음 자넷은 우편폭탄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편지나 소포에 폭탄을 장치해서 부치는 일들이 흔치 않게 일어나 우체국들이 비상에 걸렸다. 나는 아주 가끔 본지 오래된 어머니에게 편지폭탄을 보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연애 시절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썼음 직한 시를 기억하며, 어머니와 나 사이의 사랑에 관해 생각하곤 했다. 어머니도 우리들 사랑도 온데간데없고 그저 폭탄만 있었다. 분노폭탄, 무관심폭탄, 진짜폭탄… 아버지와 나를 버린 어머니를 향해 나는 마음속으로 매일 폭탄을 던졌다. 오늘도 나는 우체국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어머니 당신에게 편지를 쓴다. 내 글씨는 한 자 한 자 읽을 때마다 터지는 우편폭탄이다. 편지를 받으시거든 부디 봉투는 열지 마시라. 어머니를 향한 분노는 잘 익은 과일처럼 내 마음속에서 자랐다. 그즈음 어느 게으른 우체부가 편지들을 배달하지 않고 몽땅 땅에다 묻어버린 일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조차도 낭만적이다. 영원히 도착하지 않을 연애편지를 상상해본다. 너무 많은 우편물들이 분실되었고 그중에는 가족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도 있었으리라. 


영화광이던 자네트는 우체국 직원이 나오는 영화가 나오면 꼭 나를 데리고 극장에 갔다. 데이빗이 바쁘지 않을 땐 셋이 함께 갔다. 이상하게도 그 시절엔 우체부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들이 많았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존경하고 그의 시를 사랑한 우체부 청년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일 포스티노」를 기억한다. 폴란드 감독 키에슬로프스키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라는 영화도 그즈음 우리가 본 우체국에서 일하는 아름다운 청년에 관한 영화였다. 그 시절을 마지막으로 우체국에 관한 상상력은 사라졌는지 모른다. 아날로그의 종말이 시작되고 있었다. 우체통을, 우체국을, 우체부를 통하여 전달되는 네게로 가는 편지 ― 나는 그것을 우체국적 상상력이라 부른다. 나의 사랑 자네트는 그 시절의 우체국을 대표하는 사랑과 소통의 상징이었다. “우체국적 상상력을 금지한다면 더 이상 시인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나는 썼다. 하지만 그 시절 맨해튼의 우체국엔 어느 편지에 폭탄이 숨어있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선지 우체국은 점점 더 경계가 삼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샅샅이 편지 한 장 한 장, 소포 한 상자 한 상자를 검사하는 자넷의 모습을 상상하며, 내가 그녀에게 보낸 소포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검열을 당할 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나빠졌다. 그즈음 나는 매일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주말에 한 번 만나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포를 부칠 때는 누가 무엇을 누구에게 왜 얼마나 부치는 것인지, 위험한 물건은 아닌지를 아주 상세하게 적어야 했다. 



오늘도 나는 우체국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너에게 편지를 쓴다, 그런 시를 쓰던 옛 시인은 우편폭탄이라는 말을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자넷은 우편폭탄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었다. 그 시절 우리가 본 우체부에 관한 또 다른 영화도 잊히지 않는다. 채플린을 생각나게 하면서도 사뭇 다른 자크 타티Jacques Tati의 문명비판적인 영화, 최첨단 스피드 시대의 한 우체부의 존재 양식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내고 있는 1947년도 영화 「축제일」이라고 기억된다. 초고속 인터넷시대에도 아직도 우체부라는 직업은 존재한다. 우체부에서 더욱 발달한 배달원의 존재란 거의 신적인 존재가 아닌가? 한밤중에도 일용할 양식을 배달하는 배달부의 존재가 없는 우리의 삶은 상상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하지만 그건 상상력이라는 떡고물을 뺀 그저 현실이다. 현대문명의 속도에 관한 우려를 주제로 한 자크 타티의 영화 「축제일」은 그럼에도 불구라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따뜻한 웃음이 담긴 진지한 사색이다. 자넷은 자크 타티의 영화들을 좋아했다. 영화를 보고 우리는 그녀의 아파트를 향해 걸었다. 맨해튼에서 우리는 웬만하면 다 걸어 다녔다. 그녀의 집은 월드트레이드센터 옆의 자유의 여신상이 내려다보이는 33층 아파트였다. 우리는 넘실대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와인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