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01

소설, 자서전 1

저자소개

황주리
화려한 원색과 흑백, 열린 상상력을 바탕으로 독특한 회화 세계를 구축한 신구상주의 계열의 가장 주목받는 화가로, 다양한 소재와 다양한 장르를 통해 도시적 인간의 내면세계와 인간 상황을 시적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원고지를 캔버스삼아 그림그리기를 시작했던 그녀는 뛰어난 산문가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있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그림이 그려지기를 기다리는 빈 캔버스다. 캔버스 외에도 안경과 돌과 오래된 목기 등에 그려진 그의 그림들은 사라지는 순간들을 지금 여기에 붙잡아두려는 ‘시간에 관한 명상’들이다. 26회의 국내외 개인전과 이백 여회의 기획단체전에 참가했으며, 석남미술상과 선미술상을 수상했다. 산문집 『날씨가 너무 좋아요』 『세월』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나 흙이 묻었다』『한 번, 단 한 번, 단 한 사람을 위하여』 등을 펴냈다.


자서전을 써보려고 한다. 있는 그대로도 아니고 연대기적도 아닌, “이 영화의 내용은 실제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실제로 일어난 적은 없다.” 이렇게 시작되는 어느 영화의 프롤로그처럼 시작도 끝도 없는, 어느 페이지를 펼쳐 읽어도 상관없는 자서전. 주인공은 굳이 본인이 아니라도 무방하며, 이 글을 읽는 독자라도 무방하다.


삶이 꿈이라는 걸 실감 나게 느끼기 시작한 건 기억이 생기기 시작한 어린 시절부터다. 실제와 분간이 가지 않는 우리가 평생 동안 꾼 꿈들과 기억의 불확실성을 토대로 제멋대로 그리는 그림 같은 거랄까? 하지만 실제 있었던 일들이 이 현란한 가상기억 속에 낡은 집의 주춧돌처럼 남아 있을 것이니.

    

아버지


사람들은 아버지를 갯츠비라고 불렀다.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갯츠비』를 영화로 본 사람들은 많아도 책으로 읽은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사다 준 그 책을 이해하기 위하여 두어 번 읽었고, 영화는 미아 패로우가 나오는 옛날 영화도 디카프리오가 나오는 나중 영화도 아버지와 함께 보았다. 지금처럼 한국음식이 인기가 있지 않았던 시절, 1980년대 말 나는 뉴욕대학에서 낮에는 수업을 듣고 저녁에는 아버지의 절친이 운영하는 뉴욕 맨해튼 32번가에 있는 식당에서 음식을 날랐다. 일찍이 대학 시절부터 커플이었던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을 한 지 오래였고,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교수였던 어머니는 인도 출신의 같은 과 교수와 결혼해서 그 분야의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있었지만, 나는 어머니와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 지 오래였다. 내가 태어날 무렵, 어머니가 박사과정을 끝낼 동안 아버지는 휴학을 하고 나를 보살폈다. 영문학을 전공한 아버지가 가장 애독하던 책이 『그레이트 갯츠비』였다. 


어린 나를 데리고 서울로 돌아온 아버지는 친한 대학동창과 함께 악기상점을 열었다. 전공을 살리지 못한 아버지의 꿈은 악기의 꿈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첼로를 배워 연주를 하는 취미를 삶의 자랑으로 삼았다. 나도 늘 작은 삶의 기쁨을 누릴 줄 아는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나는 늘 첼로와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조율하는 소리 속에서 성장했다. 나는 삶이란 그저 조율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떠난 나를 만나러 봄가을로 뉴욕에 오셨다. 악기를 구입하러 오시기도 했고, 오랜 시간 뉴욕에서 살았던 향수 때문이기도 했다. 큰돈은 아니라도 아버지는 올 때마다 두툼한 달러를 주고 가셨다. 영문판 『위대한 갯츠비』를 읽고 또 읽던 아버지가 왜 그 책을 그리 좋아했는지 지금도 나는 잘 모르겠다. 사실 그 책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운이 좋아 갑자기 돈을 번 신흥 부자가 날 때부터 화려한 저택에서 사는 부잣집 딸내미와의 짧은 연애를 잊지 못해, 사랑의 덫으로 걸어 들어가는 가슴 답답한 이야기인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부잣집 딸내미이면서 공부도 잘하고 외모도 수려한 어머니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에게서 갯츠비를 발견한 건지도 모른다. 유학은 어머니에게 기회가 되었지만 아버지에게는 반대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걸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32번가 식당에서 웨이터 일을 끝내고 5번가 쪽으로 걸어 올라가, 뉴욕 페닌슐라 호텔 옥상 선베드에 누워 지는 해를 바라보며 칵테일을 한잔하는 게 나의 낙이었다. 진토닉에 토마토 주스를 섞은 매운맛의 칵테일의 이름이 무엇이었지? ‘블러드 메리’, 그 이름을 잊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시절 내 인생에 제목을 붙인다면 ‘블러드 메리’라고 붙이고도 남을 테니까. 나는 그 칵테일의 맛처럼 매콤하게 살고 싶었다. 블러드 메리 한잔을 비우고 두 번째 잔의 삼분의 일 정도 마시고 거리를 내려다보면 사람들이 걸어가는 풍경은 비현실적이었고, 나는 어머니를 본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도 산다는 게 힘들다는 사실도 다 잊어버렸다. 


그때만 해도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꽤 있었던 맨해튼 거리에서 담배 한 대 물고 쏘다니는 일은 즐거웠고, 우디 알렌의 영화 속처럼 우수 어린 시절이었다. 나는 그 시절 우체국 직원과 열애 중이었다. 우체국 직원이면 공무원으로 든든한 밥벌이를 하는 직업이다. 어깨가 나보다 넓은 그녀는 힘이 좋았고 왜소한 내 어깨를 감싸 안아주었다. 나는 늘 우체국이 좋았다. 그 시절의 흑인 우체국 여직원들이 동양인들에게 얼마다 불친절했는지 아버지께 소포를 붙이러 갈 때마다 나는 넌덜머리가 났다. 하지만 그녀와 사귀기 시작한 이후부터 내게 우체국은 꿈의 장소였다. 나는 정말 그 유명한 누군가의 시처럼 우체국 계단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기다림이 행복한 거라는 걸 배웠던 시간들이었다. 한국음식점 사장님은 아버지 친한 친구분이라 월급도 넉넉히 주셨고 손님들이 주는 팁도 만만치 않아 나는 그녀를 데리고 페닌슐라 호텔 옥상에 올라가 칵테일 몇 잔 사주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늘 학비도 미리 보내주셨고 엄마 없이 자란 내 마음의 구멍들을 세심히 살펴주셨다. 


내게는 예술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지금은 땅값이 올라 상상도 할 수 없는 번화가로 변했지만, 그 시절 이스트빌리지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누추한 서식처였다. 그래도 주말이면 옥상에서 와인파티가 늘 열렸고 우리는 싸구려 와인을 한 병씩 가져가 각자 만들어온 작은 음식들을 앞에 놓고 조촐한 행복을 나누곤 했다. 무더운 여름날 해가 늦게 지는 것도 자연의 선물이었다. 지금도 나는 1980년대 이스트빌리지의 고독하고 정겨운 와인 파티를 종종 떠올린다. 


우체국 직원 자넷을 만난 것도 그곳에서였다. 그녀는 화가 지망생 친구를 따라서 낯설고 신기한 파티에 참석한 중이었다. 누군가 『위대한 갯츠비』를 읽었느냐고 물었다. 그중에서 그 책을 읽은 사람은 나와 자넷 둘뿐이었고, 어쩌면 그걸 공통점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파티를 연 화가의 작업실의 흑백 텔레비전에서 로버트 레드포드와 미아 패로우가 주연을 맡은 「그레이트 개츠비」를 보았다. 골동 흑백 텔레비전은 아마도 길에서 주워온 것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 뉴욕은 길거리에서 주울 것이 많았다. 


주말마다 장을 서는 개러지 세일에서도 우리는 의자니 식탁이니 멀쩡하고 근사한 물건들을 싼값에 사가지고 오곤 했다. 자넷은 나의 예술가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알라바마에서 온 친구 데이빗과 잘 어울렸다. “머나먼 알라바마 너의 고향은 어디?” 얼굴을 보면 그 노래가 떠오를 만큼 순수하고 때가 안 묻은 청년이었다. 밤이 깊어가고 이스트빌리지 옥상은 세상과 괴리된 고독한 우주였다. 그 시절 우리는 젊었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그래서 더욱 내면에 가득한 열정과 사랑으로 폭발 직전의 별들이었다. 


파티는 봄날에도 여름날에도 가을날에도 심지어는 겨울에도 열렸다. 담요를 두르고 난로를 피워놓고 우리는 옥상파티를 즐겼다. 과연 즐겼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들의 파괴적인 젊음을.


밤이 깊어지자 하나씩 둘씩 다른 친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 시절은 에이즈로 죽어가는 예술가들이 적지 않았다. 그만큼 동성애자들이 많았고, 예술계는 그 형상이 더욱 심했다. 누군가 옥상 문을 열고 들어서며 “키츠 헤링이 죽었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분위기가 익어가면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대마초를 돌려 피우는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나 자넷을 데리고 몰래 그곳을 빠져나왔다. 거리로 나오자 길에는 마약을 파는 장사들이 여기저기 숨어 있곤 했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어릴 적 밤중에 들은 메밀묵, 동지팥죽 등을 팔고 다니는 장사들의 소리처럼 ‘대마초’ ‘크렉’ ‘코카인’ 등을 몰래 숨어 파는 장사들의 수런거리는 소리가 딱 연옥을 생각나게 했다. 천국도 지옥도 가지 못하는 죽은 영혼들의 수런거림을 피해 우리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가 위쪽으로 업타운 쪽으로 계속 걸었다. 하늘의 별은 그날따라 총총했고, 맨해튼은 걷기에 좋은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