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08

이중인격을 넘어 다중인격으로

저자소개

정여울
자신의 상처를 솔직하고 담담하게 드러내며 독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작가. 글쓰기·듣기·읽기·말하기 네 가지는 그를 살아가게 하는 가장 중요한 활동이다. 세상 속 지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글을, 한없이 넓고도 깊은 글을 쓰고자 한다. 일정한 틀에 매이기보다 스스로가 주제가 되어 더욱 자유롭고 창조적인 글쓰기를 하고 싶은 목마름으로 ‘월간 정여울’이라는 새로운 실험을 시작한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독자와 소란하지 않게, 좀 더 천천히, 아날로그적으로 소통하기를 바란다. 제3회 전숙희문학상을 수상한 산문집 『마음의 서재』, 심리 치유 에세이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인문학과 여행의 만남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청춘에게 건네는 다정한 편지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인문 교양서 『헤세로 가는 길』, 『공부할 권리』 등을 출간했다.

시민은 자아를(물론 발육부진의 자아에 불과한데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어쨌든 그는 강렬한 삶을 희생한 대가로 자신을 보전하고 안정을 얻으며, 신에 사로잡히는 대신에 양심의 평온을 거두어들이고, 쾌락 대신 쾌적을, 자유 대신 편안함을, 치명적인 작열 대신 적당한 온기를 얻는다. 따라서 시민은 그 본질상 삶의 추진력이 약한 존재, 불안에 떨며 자신을 희생하기를 두려워하는, 지배하기 쉬운 존재이다. 그래서 시민은 힘 대신에 숫자를, 권력 대신에 법률을, 책임 대신에 투표를 내세우는 것이다.

- 헤르만 헤세, 김누리 옮김, <황야의 이리>, 민음사, 2013, 72~3쪽. 



하리는 시민적인 가치, 즉 이 사회에서 ‘멀쩡한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그 모든 인정투쟁을 경멸한다. 그가 말하는 ‘시민’이란 곧 그의 ‘두 얼굴’ 중 인간적인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시민사회의 문화, 법률, 제도 속으로 편입할 수 없는 자신의 야생과 정열과 일탈의 욕망을 ‘이리의 범주’로 포함시킨다. 인간과 이리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자신의 이중성을 경멸하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하리는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양면성 때문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하리의 관찰자 ‘나’의 입장은 다르다. 그는 하리조차도 어떤 이분법에 갇혀 있다고 비판한다. 인간은 누구나 양면적이며, 그것은 하리의 특별한 고통이 아니라 보편적인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특히 하리가 자신 안의 수많은 자아를 식별해내지 못하고, 그저 단순하게 뭉뚱그려 ‘두 개의 자아’가 충돌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이분법의 오류라는 것이다. 



‘나’는 더욱 복잡한 시선으로 하리를, 그리고 인간의 보편적인 자기분열에 대해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하리에게 매혹을 느끼면서도 하리를 비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리는 높은 교양을 지닌 인물이지만, 마치 둘 이상은 셀 줄 모르는 야만인처럼 군다고. 그는 자신의 한 부분을 인간이라고, 또 다른 부분을 이리라고 정해놓고는, 그것으로 다 끝났다고,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다고. 인간적인 범주에는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한 모든 정신적인 것, 승화된 것, 혹은 교육받은 것을 집어넣고, 이리의 범주에는 모든 충동적인 것, 야성적인 것, 혼돈적인 것을 쑤셔 넣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제3자의 시각, 관찰자의 시각이기도 하다. 하리가 ‘문명인의 범주’와 ‘야만인의 범주’ 사이에서 느끼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고, 하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은 일상’을 지속해낼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혼란을 느낀다. 요컨대 자기분열의 ‘이중성’만이 문제가 아니며 ‘다중성’이 문제였다. 또한 더 큰 문제는 ‘이중인격’을 넘어 ‘다중인격’으로 치닫는 자신의 고통을 남보다 훨씬 예민하게, 훨씬 

고통스럽게 느끼고 있었다는 점이다. 



융 또한 이 문제에 대해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했는데, 그는 ‘자기 안의 또 다른 자아’가 있다는 것이 병증의 징후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안의 전체성을 발견하는 데 긴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남성 안의 여성성인 아니마, 여성 안의 남성성인 아니무스 이외에도, 수없이 다양한 ‘또 하나의 자아들’이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음을 간파해냈다.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있음을 발견하는 것. 그것은 정신병적 징후가 아니며 우리의 무수한 영혼들이 내면에서 저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결국은 최고의 무의식의 하모니를 연주하기 위해 분투하는 일련의 과정이 아닐까. 오히려 늘 ‘한 가지 자아’만을 지루하게 반복하는 사람들의 영혼이야말로 피폐해지기 쉽다. 남들에게 늘 ‘나다운 나’를 보이기 위해, ‘나답지 않다고 여겨지는 그 모든 다채로운 자아’들을 감각의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학교 선생님들 사이에서 즐겨 회자되고, 속물들이 소름 돋을 정도로 경탄해 마지 않는 경구, 즉 "아! 내 가슴 속에는 두 개의 영혼이 살고 있다"라고 말할 때, 그는 자기 가슴 속에 있는 메피스토와 수많은 다른 영혼들은 잊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황야의 이리도 가슴 속에 두 개의 영혼(이리와 인간)을 품고 있다고 믿고, 그래서 자신의 가슴이 이미 몹시 좁아졌다고 생각한다. 가슴, 즉 육신은 언제나 하나지만, 거기 살고 있는 영혼은 둘도 다섯도 아니다. 영혼은 무수하다. 인간은 수백 개의 껍질로 된 양파이고, 수많은 실로 짜인 천이다. 이것을 인식하고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고대 아시아인이었다. 그들은 불교의 요가에서 개성이라는 망상을 폭로하기 위한 정확한 기술을 발명했다. 

- 헤르만 헤세, 김누리 옮김, <황야의 이리>, 민음사, 2013, 7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