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11

나는 황야의 이리다

저자소개

정여울
자신의 상처를 솔직하고 담담하게 드러내며 독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작가. 글쓰기·듣기·읽기·말하기 네 가지는 그를 살아가게 하는 가장 중요한 활동이다. 세상 속 지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글을, 한없이 넓고도 깊은 글을 쓰고자 한다. 일정한 틀에 매이기보다 스스로가 주제가 되어 더욱 자유롭고 창조적인 글쓰기를 하고 싶은 목마름으로 ‘월간 정여울’이라는 새로운 실험을 시작한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독자와 소란하지 않게, 좀 더 천천히, 아날로그적으로 소통하기를 바란다. 제3회 전숙희문학상을 수상한 산문집 『마음의 서재』, 심리 치유 에세이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인문학과 여행의 만남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청춘에게 건네는 다정한 편지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인문 교양서 『헤세로 가는 길』, 『공부할 권리』 등을 출간했다.

언젠가 황야의 이리라고 불리던 사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하리였다. 그는 두 발로 걷고 옷을 입은 인간이었지만 본래는 한 마리 황야의 이리였다. 그는 이해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배울 수 있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엄청나게 똑똑한 사내였다. 그러나 그가 배우지 못한 것도 있었다. 그건 자신과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불만투성이 인간이었다. 그가 그렇게 된 건, 마음 저 아래에서는 자신이 본래 인간이 아니라 황야에서 온 이리라는 것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헤르만 헤세, 김누리 옮김, <황야의 이리>, 민음사, 2013, 59~60쪽. 



사람들에게 결코 이해받지 못하는 자신의 성격이나 욕망 때문에 힘들어 본 적이 있는가. 나 자신만은 그 ‘이해할 수 없는 측면’이 본래의 나 자신에게서 결코 떼어낼 수 없는 그 무엇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타인에게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그런 야생의 나, 날것의 나를 에티켓이나 체면의 가면 아래 잘 숨겨둔다. 이런 면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싫어할 거야. 이런 진심을 말하면 모두들 내게서 등을 돌리겠지. 이런 판단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이해받을 수 없는 성격’을 세상에 길들인다. 그것은 ‘사회화’라고 불리는 문명인 되기의 과정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안의 늑대를, 우리 안의 야생성을 부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하리 할러는 자기 안에서 꿈틀거리는 늑대의 본성을 남들보다 훨씬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이었다. 



하리 할러는 자기 안에 결코 누구도 길들일 수 없는 야생의 늑대 한 마리가 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우아하게 문명사회의 일부에 종속될 수 있는 교양과 재능을 갖춘 훌륭한 지성인이기도 했지만, 야성의 본능을 숨길 수 없는 한 마리의 늑대이기도 했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다. 그는 외모는 분명 인간이었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반인반수의 운명을 타고났다. 하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확히 그의 ‘반쪽’만을 사랑했다. 교양이 넘치는 우아한 지성인으로서의 하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강한 야성의 마력을 뿜어내며 인간 내면의 야생성을 표출할 줄 아는 하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두 가지 모두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은 없었다. 하리의 지성에 반하는 사람들은 하리의 야성을 발견할 때 충격을 받았고, 하리의 야성에 빠져드는 사람들은 하리의 지성을 부담스러워했다. 그는 자기 안의 두 개의 자아가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그 둘을 자기 자신조차 통합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에 고통스럽다. 



융은 우리 안에 이해받기 어려운 또 하나의 자아가 있다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일이라고 보았다. 그는 완전하게 이해받는 것이야말로 끔찍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해받을 수 없는 내가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자아를 그 누구의 것과도 바꿀 수 없다는 고유성을 증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중 완전하게 이해받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개인적 존재 이유를 즉시 빼앗길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무척 싫다. 이해를 통해 지극히 중요한 차이점을 희미하게 만들어버리는 바람에 그 즉시 영혼이 진정 죽어버릴 때가 있다. 개인의 핵심은 완전히 파악될 때 오히려 파괴되어버리는 삶의 신비이다.”(클레어 던, <카를 융 영혼의 치유자>, 지와 사랑, 2013, 147쪽.) 하리는 누구에게도 완전히 파악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자기 삶의 신비를 고이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리에게는 인간과 이리가 병존하지 못했고, 서로 돕는 일은 더더욱 없었으며, 둘은 줄곧 철천지 원수처럼 맞서서 한 쪽이 다른 쪽을 괴롭혔다. 둘이 하나의 피와 영혼 속에서 서로 죽일 듯이 적대한다면, 그건 저주받은 인생이다. (…) 그가 이리일 때는 그의 내면에 있는 인간이 항상 바라보고 판단하고 조종하면서 잠복해 있었고, 그가 인간일 때는 이리가 똑같이 그런 짓을 했다. 예를 들어, 하리가 인간으로서 훌륭한 생각을 갖거나, 섬세하고 고상한 감정을 느끼거나, 이른바 ‘좋은 일’이란 걸 행할 때면, 이리가 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면서 그를 철저하게 조롱한다. 좋아하는 일이라고 해봐야 고작 외로이 황야를 달리다가 때때로 피를 빨아먹거나 암컷을 뒤쫓는 따위에 불과한 한 마리 이리에게 이 고상한 척 하는 연극이 도대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웃기는 짓이냐고 비웃어대는 것이다. 

- 헤르만 헤세, 김누리 옮김, <황야의 이리>, 민음사, 2013, 6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