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23

나의 이야기를 액자 속에 넣어두기

저자소개

정여울
자신의 상처를 솔직하고 담담하게 드러내며 독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작가. 글쓰기·듣기·읽기·말하기 네 가지는 그를 살아가게 하는 가장 중요한 활동이다. 세상 속 지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글을, 한없이 넓고도 깊은 글을 쓰고자 한다. 일정한 틀에 매이기보다 스스로가 주제가 되어 더욱 자유롭고 창조적인 글쓰기를 하고 싶은 목마름으로 ‘월간 정여울’이라는 새로운 실험을 시작한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독자와 소란하지 않게, 좀 더 천천히, 아날로그적으로 소통하기를 바란다. 제3회 전숙희문학상을 수상한 산문집 『마음의 서재』, 심리 치유 에세이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인문학과 여행의 만남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청춘에게 건네는 다정한 편지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인문 교양서 『헤세로 가는 길』, 『공부할 권리』 등을 출간했다.

이 수기에는 그 이상의 것이 들어 있다. 그것은 한 시대의 기록인 것이다. 할러가 앓았던 영혼의 병은 한 인간의 괴팍한 생각이 아니라 시대의 병리 그 자체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그건 할러가 속한 저 세대의 노이로제였으며, 이 신경증 때문에 미천하고 약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바로 사상이 깊고,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강한 사람들도 좌초한 것이다. (…) 이 수기는 말 그대로 지옥의 순례이다. 지옥을 가로질러가며 카오스에 맞서고 악의 고통을 끝까지 맛보려는 의지를 가지고 칠흑같이 컴컴한 영혼의 세계를 때로는 두려워하며 때로는 용기 있게 통과하는 것이다. 

- 헤르만 헤세, 김누리 옮김, <황야의 이리>, 민음사, 2013, 35쪽. 

  


자신이 직접 쓴 일기나 메모를 소리 내어 읽어본 경험이 있는가. 내가 쓴 나의 글을 내 목소리로 들어보면 놀랍게도 ‘내가 쓴 글’이 ‘타인이 쓴 글’처럼 객관화되어 보인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백지 위의 바둑알처럼 선명하게 보이고, 스스로도 미처 몰랐던 자신의 단점이나 습관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그리고 나 자신이 쓴 글의 ‘첫 번째 독자’가 되어 그 사람의 입장에서 내 글과 내 맘과 내 삶을 성찰해보게 된다. 좀처럼 거리감이 생기지 않는 나의 이야기, 너무 주관적이거나 너무 나 자신에게 밀착된 이야기라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없었던 나의 이야기가 ‘타인의 이야기’로 읽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나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을 통해 내면의 성숙을 꿈꿀 수 있다.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를 바라봄으로써 평소에는 나 자신에 흠뻑 빠져 살아가느라 보이지 않았던 스스로의 결핍과 오만과 편견을 조율할 수 있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혹은 액자형 구성이라 불리는 문학작품들을 읽을 때도 그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이었다면 잘 보이지 않았을 주인공의 복잡한 내면이 좀 더 객관화된 거리를 통해 더 멀리, 더 높은 곳에서 조감되는 것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이 ‘나’로 불리는 나무 한 그루의 섬세한 디테일을 보여준다면,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지닌 액자형 구조는 주인공의 삶을 거대한 숲의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해준다. <황야의 이리>는 바로 그런 액자형 구조를 통해 하리 할러의 삶을 더욱 다각도에서 입체적으로 보이게 해준다. 만약 아무런 설명 없이 하리 할러의 수기가 곧바로 시작되었다면 우리는 할러의 기이한 행동이나 그가 펼치는 파격적인 사건들이 지닌 의미를 깨닫는 데 더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할 것이다. 하리 할러를 바라보는 1인칭 관찰자인 ‘나’의 시선이 이 작품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닉의 1인칭 관찰자 시점이 더욱 개츠비의 매력을 돋보이게 해주듯이 말이다.  



이 작품은 평범한 시민사회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는 하리 할러의 극단적인 방황과 내면의 분열을 통해 ‘지금 우리가 견딜 수 있다고 믿지만 실은 견디지 못하고 있는 문명의 어둠이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만든다. 스스로를 ‘황야의 이리’라 부르는 기상천외한 인물인 하리 할러가 만약 옆집에 세 들어 산다면 우리는 그와 대화는커녕 통성명조차 하지 못한 채 그를 지나쳐 버릴지도 모른다. 그는 ‘우리들’이라고 불리는 그 어떤 심리적 울타리에도 쉽게 가둬지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인간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이해하는 일과 같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이며, 친해진다 해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사람이고, 이해한다고 믿는 순간 그 이해의 그물을 빠져나가는 영원한 이방인이기도 하다. 융이라면 하리 할러를 ‘인류의 그림자’로 보았을 것 같다. 우리가 반드시 인식해야만 할 우리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상징하는 존재. 우리가 서로에 대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절망할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희망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융은 ‘개인’이라는 실체의 핵심이 바로 ‘완전히 파악될 때 오히려 파괴되어 버리는 삶의 신비’라고 믿었다. 즉 우리가 ‘이해했다’고 믿는 순간, 타인의 고유성은 파괴되어 버리는 것이다. 타인은 물론 나 자신조차도 ‘완벽한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영원히 이해받을 수 있는 존재’로 겸허하게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더욱 너그러운 태도를 취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삶이 정말로 고통으로, 지옥으로 변하는 건 두 시대, 두 문화, 두 종교가 서로 교차할 때뿐입니다. 어떤 고대인이 중세에 살았어야 했다면, 그는 그것 때문에 애처로우리만치 숨 막혀 했을 겁니다. 그건 한 야만인이 우리의 문명 한가운데에서 숨 막혀 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지금은 한 세대 전체가 두 시대 사이에, 두 개의 생활양식 사이에 끼여, 어떠한 자명한 이치도, 도덕도, 어떠한 안정감이나 순수함도 상실해버린 시대입니다. 물론 너나 할 것 없이 이것을 똑같은 강도로 느끼는 건 아니겠지요. 가령 니체 같은 사람은 오늘날의 고뇌를 한 세대 이상이나 앞서 체험해야 했지요. 그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이 고뇌를 고독하게 곱씹어야 했지만, 오늘날엔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체험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수기를 읽으면서 이 말을 자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할러는 두 시대 사이에 끼여 있는 자였고, 일체의 안정감과 순수함을 상실한 자였다. 인간의 삶이 지닌 모든 문제를 자신의 개인적인 고통과 지옥으로 승화시켜 체험하는 것. 이것이 그의 숙명이었다. 

- 헤르만 헤세, 김누리 옮김, <황야의 이리>, 민음사, 2013, 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