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0

대천사 가브리엘에게도 성별이 있어요? 下

저자소개

이미선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알로리의 『수태고지』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구도로, 비슷한 형식으로 그려진 『수태고지』를 한 점 더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페테르 칸디드Peter Candid, 1548~1628입니다. 


페테르 칸디드, 『수태고지』, 1585년. 나무에 유화, 231.8 × 173.3 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알로리의 『수태고지』와 상당히 많이 비슷하죠? 차이점이 있다면 그림의 전반적인 색조입니다. 이 『수태고지』에서는 핑크가 가장 중요한 색인 것 같습니다. 위에 있는 그림들 속 성모 마리아는 모두 파란색 겉옷을 걸치고 있는 반면, 이 『수태고지』 속 성모 마리아에게서는 파란색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앞글, 「이 파란색은 무엇으로 만들었을까요? ①」에서 말씀드렸듯이, 성모 마리아는 대개 파란색 옷을 입고 있거든요. 그래도 핑크 덕분에 그림 전체가 화사한 건 부인할 수 없죠. 그런데 대천사 가브리엘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셨나요? 알로리의 그림에서 가브리엘이 다리를 많이 노출하고 있다고 했는데 칸디드의 『수태고지』에 비할 바가 아니죠. 이 그림 속 대천사 가브리엘은 알로리의 그림 속 가브리엘만큼 앳된 소년의 모습입니다. 물론, 귀도 레니Guido Reni, 1575~1642의 『수태고지』1629처럼 앳된 소녀의 모습을 한 대천사 가브리엘도 있습니다.        


귀도 레니, 『수태고지』, 1629년. 캔버스에 유화, 319 × 221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소녀가 맞는 거죠? 자세히 보면 소년 같기도 해서 백 퍼센트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 칸디드의 『수태고지』에서 대천사 가브리엘의 노출이 심하다고 말씀드렸는데, 사실 이보다 더 노출이 심한 대천사 가브리엘도 있습니다. 라파엘전파前派Pre-Raphaelites 화가인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의 『수태고지』 속 대천사 가브리엘을 살펴보세요.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수태고지』, 1850년. 캔버스에 유화, 73 × 41.9 cm.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 런던.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Dante_Gabriel_Rossetti_-_Ecce_Ancilla_Domini!_-_Google_Art_Project.jpg#/media/File:Dante_Gabriel_Rossetti_-_Ecce_Ancilla_Domini!_-_Google_Art_Project.jpg 제공.


라파엘전파 화가인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에 대해서는 앞글, 「그림에도 환유가 있나요? ②」에서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라파엘전파란 매너리즘 화가들처럼 양식화된 형식에 맞춰 그림을 그리지 않고,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화풍을 되살리는 것을 목표로 삼은 일군의 화가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라파엘전파는 매너리즘에 대한 반발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위에 있는 알로리의 『수태고지』와 칸디드의 『수태고지』에 비하면 로세티의 『수태고지』는 옷부터 배경, 한정된 수의 색상까지 아주 소박하고 단출합니다. 그림 전면의 빨간색 대는 수틀입니다. 성모 마리아가 자기 전에 놓던 자수천을 걸어놓은 거죠.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는 저도 뭔가 했습니다. 화려한 옷이나 실내 장식을 배제한 것은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했을 당시의 생활상이 반영되도록 사실적으로 그린 결과겠죠. 이 그림 속 성모 마리아는 다른 『수태고지』 속 성모 마리아와 달리 책을 읽거나 베를 짜는 모습이 아니라 자다 일어나 놀라서 침대에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이전의 『수태고지』들과 또 다른 점은 대천사 가브리엘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대천사 가브리엘의 모습에서 뭔가 이상한 점이 있지 않나요? 천사와 강력한 연관관계/결합관계를 맺고 있는 날개가 안 보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이 『수태고지』의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겠죠. 로세티는 날개 대신 발밑에 불꽃을 그림으로써 가브리엘이 바닥에 발을 붙이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 떠있다는 것을 표현했습니다. 또 다른 특이한 점은 가브리엘이 반라半裸의 모습으로 그려졌다는 겁니다. 여미지 않은 옷 사이로 속살이 다 드러나 있죠? 제가 지금까지 본 『수태고지』 중 노출이 가장 심한 대천사 가브리엘인 것 같습니다. 위에 있는 여러 『수태고지』 중 리피의 『수태고지』와 칸디드의 『수태고지』를 제외하고, 사실 대천사 가브리엘의 모습은 남성인지, 여성인지 살짝 애매모호합니다. 반면에 로세티의 『수태고지』 속 대천사 가브리엘은 0.1%의 모호함도 없이 남성, 그것도 건장한 청년 혹은 장년의 모습이라는 걸 알 수 있죠. 그런데 이 그림은 성모 마리아가 대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예수 잉태 소식을 듣는 엄숙하고 성스러운 순간을 그린 것이라기보다 여동생이 오빠에게 혼나서 잔뜩 주눅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중세의 이콘 『수태고지』부터 시작해서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시대의 『수태고지』를 거쳐 매너리즘과 라파엘전파의 『수태고지』까지 살펴봤으니까, 이제는 동시대 『수태고지』가 어떤 모습일지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화성의 남양 성모 성지 성당에는 제대祭臺가 있는 변형된 앱스후진, apse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을 중심으로 양쪽에 두 점의 성화가 공중에 걸려 있습니다. 한 점은 『수태고지』고, 다른 한 점은 『최후의 만찬』입니다.  


남양 성모 성지 성당, 화성.


줄리아노 반지, 『수태고지』, 1991년. 패널, 300 × 1,000 cm. 남양 성모 성지 성당, 화성.


이 그림은 이탈리아 조각가인 줄리아노 반지Giuliano Vangi, 1931~ 의 작품으로 뒷면에 전면 그림의 뒷모습을 그린 양면화입니다. 앞면과 뒷면에 각각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는 캔버스를 미술관에서 간혹 보긴 합니다. 캔버스 양면을 알뜰하게 활용하는 방법이죠. 그런데 이곳 성당의 성화들은 앞면 그림과 뒷면 그림이 독립된 주제를 다룬 별개의 그림이 아니라 앞면 그림의 뒷모습을 볼 수 있는 특이한 형식의 양면화입니다. 마치 조각작품을 360도 감상하듯이 그림 속 대상의 앞면과 뒷면을 연결해서 볼 수 있게 한 재미있는 발상이죠. 이 그림은 다섯 개의 패널로 구성돼 있고, 왼쪽 세 패널에는 수태고지 장면이, 오른쪽 두 패널에는 성모 마리아가 세례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한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한 그림에 두 장면이 합쳐져 있는 거죠. 이 『수태고지』의 특성을 몇 가지 살펴볼까요? 우선, 이 『수태고지』는 단일한 색조로 명도와 채도만 변화를 준 단색조의 그림입니다. 그림의 형태와 구도가 단순화되고 살짝 추상화됐다고 해서 맨 처음 보여드린 이콘 『수태고지』 상태로 되돌아갔다는 의미는 아니죠. 이 그림에는 명백히 원근법이 사용됐으니까요. 이 그림의 또 다른 특징은 복장의 현대화 및 현지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이 언제 그려졌느냐에 따라 시대적 배경이 대천사 가브리엘과 성모 마리아의 복장을 통해 드러나는 거죠. 이 그림의 특이점은 현대적 복장에 더해 한국의 성당에 설치된 성화라는 사실을 고려해서 한복이 등장합니다. 맨 오른쪽 패널에서 맨 끝에 서 있는 여성이 한복을 입고 있죠. 등장인물들의 얼굴도 한국인처럼 보이지 않나요? 더불어, 이 수태고지에서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명백한 여성으로 그려졌습니다. 


중세의 『수태고지』부터 현대의 『수태고지』에 이르기까지, 몇 점의 『수태고지』를 보면서 『수태고지』에 나타난 시대별 회화의 특징을 살펴봤습니다. 원근법이 없는 중세의 『수태고지』, 원근법이 사용된, 사실적이지만 진지한 분위기의 르네상스 시대의 『수태고지』, 늘어난 신체 비율과 강렬한 명암 대비 속에 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매너리즘과 바로크 시대의 『수태고지』, 배경과 복장이 사실적이고 소박한 라파엘전파의 『수태고지』, 살짝 추상화된 현대의 『수태고지』. 이것만 기억해 둬도 미술관에서 만나는 『수태고지』가 어느 시대에 그려진 것인지 대충 맞힐 수 있지 않을까요? 


‘수태고지’라는 주제는 이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변화를 거치며 다양하게 그려졌습니다. 특히 대천사 가브리엘은 어떤 때는 나이 든 남성의 모습으로, 어떤 때는 청년의 모습으로, 어떤 때는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어떤 때는 공중에 뜬 상태로, 어떤 때는 무릎을 꿇은 상태로, 어떤 때는 그림의 왼쪽에, 어떤 때는 그림의 오른쪽에 그려졌습니다. 아, 여기서 잠깐 오른쪽에 대천사 가브리엘이 있는 『수태고지』를 하나 더 보여드리겠습니다. 대개 가브리엘은 왼쪽에 있거든요. 이 그림은 마르티니와 멤미의 『수태고지』를 살펴볼 때 잠깐 언급했던 스트리겔의 『수태고지』입니다. 말풍선 역할을 하는 말 리본도 보고, 르네상스 및 매너리즘 회화의 특성도 복습해 보시길 바랍니다.  


베른하르트 스트리겔, 『수태고지』, 1515~1520년. 패널에 유화, 각 패널 118 × 50 cm.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마드리드.


이 글에 실린 여러 『수태고지』들 중 유일하게 이 그림에서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그림의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후기 작품에 속하는 스트리겔의 『수태고지』에서는 등장인물의 신체 비율이 길어지는 매너리즘의 특성이 이미 나타나고 있고요. 대천사 가브리엘의 몸이 엄청 길죠? 이 그림에서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여성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자세히 보면 남성처럼 보이기도 하니까요.  


대천사 가브리엘의 다양한 모습 중에서도 성별을 넘나들며 어느 때는 남성으로, 어느 때는 여성으로 그려지는 것을 보면 저절로 궁금해집니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남성일까요? 아니면 여성일까요? 물론 다양한 성정체성을 인정하는 21세기에 겉모습으로 성별을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발상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왜 대천사 가브리엘은 때로는 남성으로, 때로는 여성으로 그려지는 걸까요? 천사에게도 성별이 있을까요? 성서에 의하면 천사는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서에서 천사라는 단어가 나오면 항상 남성형 관사가 붙어 있고, 인간에게 모습을 드러낼 때는 항상 남성의 모습으로 묘사된답니다. 또한 남자아이에게만 가브리엘이나 미카엘Michael, 라파엘Raphael, 우리엘Uriel 같은 천사 이름을 붙인다네요. 이런 여러 상황이 겹치다 보니 천사를 남성으로 인식하게 된 거죠. 더구나, 하느님의 전령으로 전해지는 가브리엘의 히브리어 어원을 따져보면 ‘하느님의 사람man of God’ 혹은 ‘하느님의 힘power of God’이랍니다. 이름에 ‘man’이 들어 있으니 남성으로 묘사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죠. 그런데  샌드라 고르기에프스티Sandra Gorgievski나 크리스토퍼 에반 롱허스트 Christopher Evan Longhurst 같은 학자들에 의하면, 천사는 순전히 영혼만 있는 존재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천사가 명확한 형태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술가들이 천사를 묘사할 때 재량권을 폭넓게 발휘할 수 있는 거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대천사 가브리엘을 비롯해 천사들이 때로는 남성으로, 때로는 여성으로 묘사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겁니다. 그래도 대천사 가브리엘을 남성의 모습으로 그린 『수태고지』가 대천사 가브리엘을 여성으로 묘사한 『수태고지』보다 훨씬 더 많은 것 같아요. 지금도 어디에선가 수많은 『수태고지』가 그려지고 있을 테니 아직은 속단하기 이릅니다. 앞으로 대천사 가브리엘을 여성으로 묘사할 『수태고지』가 더 많아질지 모릅니다. 기독교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수태고지』는 계속 그려질 것이고, 지금까지 그려진 『수태고지』와는 달라질 겁니다. 미래의 『수태고지』들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