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28

은유와 환유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나요? 下

저자소개

이미선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그런데 은유만 세상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환유 역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은 바로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 예술 작품” 2위로 선정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입니다. 


파블로 피카소, 『아코디언 연주자』, 1911년. 캔버스에 유화, 130.2 × 89.5 cm. 구겐하임미술관, 뉴욕.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전면 사진. http://en.wikipedia.org/wiki/File:Les_Demoiselles_d%27Avignon.jpg#/media/File:Les_Demoiselles_d'Avignon.jpg 제공.


작품이 상당히 크죠? 그림 속 다섯 인물이 거의 실물 크기로 그려졌습니다. 엄청나게 클 거라고 기대하고 미술관에 갔는데 실물이 작은 작품이 있는 반면, 이 그림은 예상보다 훨씬 더 크더군요.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그림 앞이 계속 관람객으로 붐비는 바람에 그림만 온전히 담긴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그림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던 미술관 애벌레 시절, 저는 『아비뇽의 처녀들』이 프랑스에 있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린 그림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아비뇽의 다리 위에서프랑스어: Sur le pont d’Avignon』를 흥얼거렸죠. 아비뇽에 대한 추억도 떠올리면서요. 처음 파리를 방문해서 센강 크루즈를 할 때 노트르담 성당 근처 강가에 야간 조명으로 화려한 ‘오텔 드 빌Hôtel de Ville’이 보였습니다. ‘와, 멋진 호텔이다. 다음에는 저 호텔에 묵으면 좋겠다.’라는 소원이 생겼죠. 그런데 며칠 후 들른 아비뇽에 또 다른 ‘오텔 드 빌’이 있더군요. 처음에는 호텔 체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의 ‘오텔 드 빌’은 화려하고 웅장한 파리의 ‘오텔 드 빌’과 달리 아주 작고 낡았더군요. 시골 관공서 같은 느낌이 물씬 났습니다. 그제야 ‘오텔 드 빌’이 호텔 이름이 아니라 ‘시청’이라는 걸 깨달았죠. 그때 이후 아비뇽 하면 ‘아비뇽의 다리’나 ‘아비뇽 교황청’보다 ‘오텔 드 빌’이 더 많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아비뇽’은 프랑스 남부의 도시 이름이 아니라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있는 사창가 지역의 이름이랍니다. 그림 속 여성들도 창녀들이고요.


그림의 제목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하나 더 생각났습니다. 고등학교에서 프랑스어 수업을 들었을 때 제일 처음 배웠던 단어가 ‘mademoiselle마드무아젤’과 ‘madame마담’이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게는 ‘마드무아젤’을, 결혼한 여성에게는 ‘마담’이라는 호칭을 써야 한다고요. 그런데 프랑스 여행을 하다 보니 나이에 상관없이 모든 여성에게 ‘마담’이라는 호칭을 쓰더군요. 식당 웨이터가 어린 여학생에게도 ‘마담’이라고 하길래 그 이유를 물어봤죠. 결혼 여부에 따라 호칭을 달리하는 것이 차별적인 행동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1970년부터 여성에 대한 호칭을 ‘마담’으로 통일했다고 합니다. 영어권에서 ‘Mrs.’나 ‘Miss.’ 대신 통칭인 ‘Ms.’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맥락인 거죠.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에 들어 있는 ‘demoiselle드무아젤’은 ‘mademoiselle마드무아젤’의 약식 표현입니다. 만약 피카소가 이 그림을 1970년 이후에 그렸다면 제목이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이 그림은 흔히 입체주의Cubism 최초의 작품으로 불립니다. ‘입체주의’를 의미하는 ‘cubism’은 ‘정육면체 혹은 입방체’를 의미하는 ‘cube’와 ‘~주의’를 의미하는 ‘~ism’이 합쳐진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cubism’을 직역하면 ‘정육면체주의’ 혹은 ‘입방체주의’가 되어야겠죠. 그런데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의 표현처럼 입체주의 그림 속에 “기묘한 입방체들”이 두드러져 보인다 해도 다른 입체적인 형태인 원통형과 원추형도 존재하기 때문에, 세 입체적 형태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입체주의’라는 용어를 쓴 것 같습니다. 그냥 제 추측일 뿐입니다. 


뒤샹의 『샘』으로 인해 예술과 예술가, 예술 작품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 일어났다면,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혁명적이었습니다. 먼저, 『아비뇽의 처녀들』을 필두로 입체주의는 르네상스 시대 이후 이어져 온 원근법의 투시 개념에서 탈피했습니다. “19세기 이전의 서양 미술이 명암과 원근을 이용해 3차원의 세상을 2차원의 화폭에 담은 것과는 달리, 입체주의 화가들은 3차원의 대상을 여러 시점으로 분해해서 화폭에 재구성”「위키백과」했습니다. 원근법의 1점 투시one-point perspective가 아닌 복수 시점 혹은 다시점multiple perspectives이 시도된 거죠. 폴 세잔프랑스어: Paul Cézanne, 1839~1906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입체주의는 사물을 한 방향에서 바라보면서 재현하려고 했던 이전의 화법에서 벗어나 여러 방향에서 본 사물의 모습을 한 화폭 안에 담아내려고 했습니다.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그 예를 한번 찾아볼까요?


이 그림을 처음 보면 앉아 있는 오른쪽 아래 여성을 제외한 네 명의 여성이 모두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앉아 있는 여성과 그 여성 뒤에 서 있는 여성에게서만 거리감이 조금 느껴질 뿐 오른쪽에 서 있는 여성과 나머지 세 여성은 거의 같은 위치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고요. 그런데 서 있는 네 명의 여성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운데 두 여성의 자세가 이상합니다. 저런 자세로는 서 있기가 불가능하죠. 이 두 사람은 누워 있는 겁니다. 앞에서 누워 있는 사람을 보면 발만 보이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가운데 두 여성은 관찰자가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이 되겠죠. 왼쪽의 여성과 오른쪽 뒤에 있는 여성은 관찰자가 앞에서 바라본 모습이고요. 가운데 두 여성 중 오른쪽 여성의 하체를 봐주세요. 얼굴은 앞모습인데 하체 부분은 뒷모습입니다. 오른쪽 아래 앉아 있는 여성의 몸도 자세히 살펴봐 주세요. 얼굴은 앞모습인데 목 아래 몸은 뒷모습이죠? 또한 가운데 두 여성과 앉아 있는 여성의 얼굴에서 눈은 앞모습이지만 코는 옆에서 본 것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기존의 1점 투시 원근법을 이용해서 『아비뇽의 처녀들』을 재구성하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요? 아마도 왼쪽에 서 있는 사람과 오른쪽 아래 앉아 있는 사람은 앞에 크게, 가운데 누워 있는 두 사람은 안쪽으로 조금 작게, 그 옆에 커튼을 젖히며 나오는 사람도 조금 뒤쪽에 작게 그렸을 겁니다. 그러면 인물이 모두 전진하지 않고 뒤쪽으로 들어가 깊이감이 생겼겠죠. 목 밑에 등이 오거나 배 밑에 엉덩이가 오는 일도 당연히 생기지 않고요. 제가 그림을 잘 그리면 간단하게라도 그려서 보여드리면 좋을 텐데 그럴 수가 없어서 유감입니다.     


『아비뇽의 처녀들』의 두 번째 혁신성은 미술 작품이 대상을 충실하게 모방/재현해야 한다는 구속에서 벗어나 추상화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입니다. 여러 시점에서 본 사물의 모습을 한 화폭 안에 담아내면 한 시점에서 볼 때와는 다른 형태가 나타납니다. 사물이 입체적인 형태인 원통형, 입방형, 원추형 형태를 띠게 되는 거죠. 입체주의의 입체적 형태는 복수 시점의 결과물입니다. 한 방향에서 사물을 바라보며 충실하게 재현하려고 했던 이전의 그림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그림이 그려지는 겁니다. 재현은 사라지고 기하학적인 형태들만 남게 되는 거죠. 물론 『아비뇽의 처녀들』은 초기 입체주의1907~1911 작품이라 그림 속 인물 파악이 쉽지만, 대상을 기하학적으로 해체해서 재구성하는 분석적 입체주의1910~1912나 형태의 해체가 극단적으로 진행되는 종합적 입체주의1912~1914에서는 어떤 대상인지 형체를 알 수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아래 『아코디언 연주자프랑스어: L’accordéoniste1911도 그런 그림 중 하나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비뇽의 처녀들』을 필두로 입체주의는, 진중권『미학 오디세이 2』(1994)의 표현을 빌리면, “대상에서 형태를 해방”했습니다.


파블로 피카소, 『아코디언 연주자』, 1911년. 캔버스에 유화, 130.2 × 89.5 cm. 구겐하임미술관, 뉴욕.


형태가 거의 해체된 『아코디언 연주자』와 달리, 원시 입체주의Proto-Cubist 작품으로 분류되는 『아비뇽의 처녀들』에서는 대상을 알아보기가 상당히 쉬운 편입니다. 그래도 다섯 처녀와 하단의 과일을 제외한 나머지 사물의 형태에서는 추상화가 상당히 많이 이루어져 있죠. 오른쪽 위에 있는 여성은 커튼을 젖히며 나오는 모습이라고 하는데 커튼인 줄 알아보셨나요? 가운데 누워 있는 두 여성과 앉아 있는 여성 주변의 물체도 시트처럼 보이지 않고요. 오른쪽 두 여성의 얼굴은 피카소가 흑인조각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으로 알려졌지만 복수 시점으로 얼굴을 그리면 저렇게 추상적이고 왜곡된 모습이 나오지 않을까요? 앉아 있는 여성을 제외한 네 여성의 가슴 모양에서도 입체적 도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간 간격이 그리 크지 않은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의 『올랭피아Olympia1863~1865와 『아비뇽의 처녀들』을 비교해 보면 형태 표현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1865년. 캔버스에 유화, 130.5 × 190 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아비뇽의 처녀들』의 혁신성에 대한 논의는 주로 복수 시점과 추상화된 형태 표현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여기에 환유의 관점을 하나 더 보태려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오른쪽 아래 앉아 있는 여성의 얼굴은 앞모습인데 하체 부분과 목 아래 몸은 뒷모습입니다. 가운데 누워 있는 두 여성 중 오른쪽 여성의 상체는 앞모습인데 허리 아래 하체는 뒷모습이고요. 또한 가운데 두 여성과 앉아 있는 여성의 얼굴에서 눈은 앞모습이지만 코는 옆에서 본 것처럼 그려져 있죠. 이렇게 앞모습과 뒷모습, 옆모습이 뒤섞여 있는 모습은 복수 시점에 의해 그려졌기 때문이라고 흔히 설명됩니다. 지금부터는 복수 시점과 상관없이 환유의 관점에서 이것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 몸은 인접성에 따라 얼굴-가슴-허리-아랫배-다리로 이어집니다. 왼쪽 눈 옆에는 오른쪽 눈이 나란히, 눈 밑에는 코가, 코 밑에는 입이 있죠. 그런데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앉아 있는 여성의 몸은 얼굴-등-허리-엉덩이-다리로 자리바꿈이 일어났습니다. 가운데 누워 있는 여성의 몸은 얼굴-가슴-허리-아랫배-다리 대신 얼굴-가슴-허리-엉덩이-다리로 자리바꿈이 일어났고요. 가운데 두 여성의 얼굴은 왼쪽은 정면이, 오른쪽은 측면이어서 양쪽 눈의 위치가 어긋나 있습니다. 앉아 있는 여성의 얼굴은 눈, 코, 입의 방향이 제각각이라 기괴하게 보이죠. 이렇게 어떤 것이 제자리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전치轉置; displacement 혹은 전위轉位라고 부릅니다. 전치는 어떤 요소를 연관성이 있는 다른 것으로 자리바꿈한다는 점에서 인접성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환유와 같습니다.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중 일부. http://en.wikipedia.org/wiki/File:Les_Demoiselles_d%27Avignon.jpg#/media/File:Les_Demoiselles_d'Avignon.jpg 제공.


전치는 원래 지그문트 프로이트독일어: Sigmund Freud, 1856~1939가 무의식이 작동하는 두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정신분석학 용어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압축condensation이고요. 압축이란 여러 대상을 섞어서 압축하는 것이고, 전치는 한 요소에서 다른 요소로 강조점을 옮기는 거죠.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백만장자millionaire를 만난 일을 친구에게 자랑하다가 그 백만장자가 자신에게 “거만친절하게familionnare” 대해 줬다고 말실수를 범합니다. ‘거만했다’라는 것은 숨기고 싶었는데 억눌러뒀던 속마음이 튀어나온 거죠. “거만친절하다”라는 표현은 ‘거만하다millionaire’와 ‘친절하다familiar’가 압축되어 형성된 무의식의 형성물입니다. 파티에서 한 재력가에게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본 어떤 사람이 “19세기는 금송아지를 숭배하고 있어.”라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친구가 “에이, 송아지는 아니고 나이가 더 들었지.”라고 대꾸했고요. 앞 사람은 “금송아지”를 은유로 사용했는데 뒷사람은 그것을 은유의 영역에서 나이의 영역으로 이동시킨 겁니다. 프로이트 자신이 든 압축과 전치의 예입니다. 얼마 전, A 선배가 아들의 결혼식을 알리는 전자청첩장을 보냈습니다. 단체 채팅방에서 B 선배가 A 선배의 이름에 ‘little’을 붙여서 “형, 아들이 ‘리틀 A’네요.”라고 하자, A 선배가 “에이, 나보다 커.”라고 대답하더군요. 여기서도 전치의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B 선배는 아들의 얼굴 생김새를 이야기한 것인데, A 선배는 키의 영역으로 강조점을 이동했으니까요.     


그런데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은 프로이트의 압축과 전치 개념을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 1896~1982의 은유와 환유로 재해석합니다. 압축은 비슷한 요소들을 하나로 묶는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은유와 같고, 전치는 어떤 요소를 연관성이 있는 다른 것으로 자리바꿈한다는 점에서 인접성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환유와 같다는 겁니다. 라캉은 이 생각을 발전시켜서 나중에 “증상은 은유다,” “무의식은 언어와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욕망은 환유다.” 같은 유명한 공식을 만들죠. 구조주의 언어학의 시조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프랑스어: 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에서 시작된 은유와 환유론이 야콥슨과 프로이트를 거쳐 라캉에 이르러 일단락되는 겁니다. 


이것을 조금만 길게 부연 설명해 보겠습니다. 소쉬르는 언어가 계열관계와 통합관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계열관계는 등가관계인 단어들의 집합인 계열paradigm에서 각 단어가 맺는 관계를 의미하고, 통합관계는 단어들이 앞뒤로 결합할 때 맺는 관계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학생이다.’라는 문장을 만들려면 먼저 주어 자리에 올 수 있는 명사나 대명사 계열에서 ‘나’를 선택합니다. 다음에는 서술어 자리에 올 수 있는 명사나 형용사 계열에서 ‘학생이다’를 선택하고요. 그런 다음 주어 다음에 서술어를 넣어 선택된 두 단어를 결합하면 문장이 완성됩니다. 야콥슨은 소쉬르가 말한 선택과 결합을 은유와 환유로 재해석합니다. 유사성을 토대로 모인 계열에서 단어 선택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계열관계는 은유와 같고, 인접성을 토대로 단어들의 결합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통합관계는 환유와 같다고 보는 거죠. 이런 야콥슨의 은유와 환유 개념을 이용해서 라캉은 프로이트의 압축과 전치를 재해석합니다. 은유와 환유에 대한 논의가 소쉬르에서 프로이트와 야콥슨을 거쳐 라캉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아비뇽의 처녀들』 속 자리 바꾸기가 어떻게 전치와 환유로 연결되는지 살펴보다 보니 설명이 길어졌습니다. 사실, 『아비뇽의 처녀들』을 전치와 환유로 설명한 전례를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해석을 하는 것이 저로서는 큰 모험입니다. 물론 야콥슨이 「언어의 두 측면과 실어증의 두 형태Two Aspects of Language and Two Types of Aphasic Disturbances1956에서, “입체주의 그림에 환유적 경향이 있다”라고 말하긴 했죠. 그런데 야콥슨은 이 “환유적 경향”을 제유와 연결할 뿐입니다. “입체주의에서는 대상이 제유들의 집합으로 변형”된다고요. 전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야콥슨이 ‘입체주의 그림이 환유와 연관이 많다’라고 말한 것은 입체주의 그림에 부분으로 전체를 대신하는 제유synecdoche가 많이 사용됐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피카소의 『바스 병프랑스어: La bouteille de Bass1912~1914에서는, 진중권의 표현을 빌리면, “S자 모양의 곡선 하나로 기타를 나타내고, 흰 면에 음표 몇 개로 악보를 나타냅니다.”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부분으로 전체를 대신한 환유를 찾을 수 있을까요? 답은 ‘노’입니다. 부분으로 전체를 대신한 제유를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분석적 입체주의 그림들입니다. 『아비뇽의 처녀들』에는 자리바꿈, 즉 전치로서의 환유만 있습니다. 


파블로 피카소, 『바스 병』, 1912~1914년. 캔버스에 유화, 107.5 × 65.5 cm. 노베첸토 미술관, 밀라노. http://en.wikipedia.org/wiki/File:Pablo_Picasso,_1912-14,_La_bouteille_de_Bass_(The_Bass_Bottle),_oil_on_canvas,_107.5_x_65.5_cm,_Museo_del_Novecento,_Milan.jpg#/media/File:Pablo_Picasso,_1912-14,_La_bouteille_de_Bass_(The_Bass_Bottle),_oil_on_canvas,_107.5_x_65.5_cm,_Museo_del_Novecento,_Milan.jpg 제공.


의미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전치의 예는 여러 글이나 대화, 그림에서 무수히 찾을 수 있습니다. 앞글, 「그림에도 환유가 있나요?」 시리즈에서도 여러 예를 발견할 수 있고요. 그런데 『아비뇽의 처녀들』에 나타난 전치는 의미의 영역을 벗어나 순수하게 시각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자리바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비뇽의 처녀들』이 자리 바꾸기 놀이의 출발점이자 원조가 된 거죠. 자리 바꾸기 놀이의 원조, 『아비뇽의 처녀들』. 『아비뇽의 처녀들』에 대한 정의로 괜찮겠죠? 이 그림에서 시작된 자리 바꾸기 놀이는 모든 것을 조각으로 분해한 다음 분해된 조각들의 형체를 유추할 수 없을 정도로 자리 바꾸기의 놀이를 극한으로 밀어붙인 분석적 입체주의 단계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아비뇽의 처녀들』이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 미술 작품” 2위로 선정된 것은 이 그림이 순수하게 시각적 차원에서 자리바꿈을 시도한 최초의 미술 작품이라는 것도 한몫하지 않았을까요? 『아비뇽의 처녀들』은 그림 속 요소들이 인접성을 토대로 자리바꿈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시각적 차원으로 보여주는 최초의 그림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그림도 인접성을 뒤틀어서 얼굴 밑에 등을 그려 넣지는 않았습니다. 과일, 꽃, 동물, 사물 등을 이용해 사람의 얼굴을 표현한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 1527~1593의 기묘한 그림에서조차 눈, 코, 입이 제자리에 있고 얼굴 밑에 목과 상체가 온전하게 있습니다.             


주세페 아르침볼도,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겨울』, 『가을』, 『여름』, 『봄』, 1573년. 캔버스에 유화, 76 × 64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세계 미술사의 흐름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킨 것으로 평가받는 뒤샹의 『샘』과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은유와 환유의 관점에서 살펴봤습니다. 『샘』은 ‘소변기’를 ‘샘’에 비유한 은유를 토대로 예술과 일상, 미술과 비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렸고, 『아비뇽의 처녀들』은 인접성을 뒤트는 전치/환유를 토대로 미술을 재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했습니다. 이제는 “똑똑한” 은유와 환유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에 동의하시나요? 은유와 환유에 관한 앞글들에서 말씀드렸듯이,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1994에서 우편배달부 마리오Mario는 은유 덕에 사랑을 쟁취했고,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1596~1598에서는 안토니오Antonio가 환유 덕에 목숨을 건집니다. 그런데 이제는 은유와 환유가 할 수 있는 일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해야겠죠? 은유와 환유 덕에 세상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