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28

은유와 환유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나요? 上

저자소개

이미선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앞글, 「이 동작의 의미는 무엇일까요?」에서는 ‘멋지고 똑똑한’ 은유와 환유의 예로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의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프랑스어: D'où venons-nous? Que sommes-nous? Où allons-nous?1897~1898와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da Urbino, 1483~1520의 『아테네 학당이탈리아어: Scuola di Atene1510~1511을 살펴봤습니다. 사실 이 두 작품은 순전히 제 개인적인 기준에 의해 고른 겁니다. ‘에이, 이런 은유와 환유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냥 평범하네.’라고 생각하는 분도 분명히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세계 미술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것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은 어떨까요? 그런 작품들에 ‘멋지고 똑똑한’ 은유와 환유가 들어 있을까요? 그런 작품들 속의 은유와 환유는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했을까요?  


런던의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 미술관은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를 기리는 터너상Turner Prize을 매해 수여합니다. 이 상은 한 해 동안 가장 주목할 만한 전시나 미술 활동을 벌인 미술가에게 수여되는 현대미술상이죠. 2004년에는 시상식에 참석한 미술 전문가 500명을 대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 미술 작품이 무엇인지 설문조사를 실시했답니다. 이때 1위로 선정된 작품이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의 『샘Fountain1917입니다. 2위는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아비뇽의 처녀들프랑스어: Les Demoiselles d'Avignon1907이고요. 이 두 작품이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으로 선정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두 작품은 어떤 식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이 두 작품 속에도 ‘멋지고 똑똑한’ 은유와 환유가 들어 있을까요?   


마르셀 뒤샹, 『샘』, 1917년.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사진.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Marcel_Duchamp,_1917,_Fountain,_photograph_by_Alfred_Stieglitz.jpg#/media/File:Marcel_Duchamp,_1917,_Fountain,_photograph_by_Alfred_Stieglitz.jpg 제공.


1917년에 뒤샹은 머트R. Mutt라는 가명으로 소변기에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전시회에 출품했다가 전시를 거부당합니다. 이 작품으로 인해 ‘소변기라는 기성 용품이 전시장에서 작품으로 전시된다면 다른 기성품은 왜 예술 작품이 아닌가?,’ ‘작가의 노력이나 정신이 반영되지 않은 소변기 같은 기성품도 작품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소변기 같은 기성 용품이 예술이라면 관객은 이런 작품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같은 문제들이 촉발됐죠. 위 질문들은 ‘미술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미술 작품인가?,’ ‘작가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확장할 수 있을 겁니다. 『샘』이라는 제목을 단 소변기 하나가 예술과 작가, 작품에 대한 기존의 정의를 마구 흔들어 놓은 거죠. 『샘』 이후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생활용품도 예술 작품으로 대접받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예술 작품으로 탈바꿈한 소변기, 『샘』을 뒤샹은 ‘레디메이드Ready-made’라 부릅니다. 레디메이드란 “어떤 일상적인 기성 용품을 또 다른 새로운 측면에서 보아 만든 미술 작품의 한 장르”「위키백과」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기성 용품을 또 다른 새로운 측면에서 본다’라는 말은 ‘기성 용품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제시한다’라는 의미일 겁니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기성 용품이나 일상 생활용품이라 할지라도 누군가 그 물건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의미를 제공해 준다면 예술 작품이 될 가능성이 『샘』 이후 열리게 된 거죠. 이 말은 작가가 직접 제작한 작품뿐만 아니라 생활용품을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물건이 다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성 용품을 예술 작품으로 인정해 주는 개념과 장르의 탄생은 그동안 엄격히 구분됐던 예술과 일상, 미술과 비미술의 경계를 없애는 획기적인 사건이자 혁명인 거죠. 바로 『샘』이 그 일을 시작한 최초이자 대표적인 레디메이드 작품입니다.   


몇 년 전 저녁 모임에서 찌그러진 양철 막걸릿잔을 보며 한 지인이 그러더군요. “이 막걸릿잔도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미술관에 작품으로 전시되지 않을까요?” 세상에 일어나지 못할 일은 없지만 그럴 확률은 극히 희박한 것 같습니다. 세상의 양철 막걸릿잔이 거의 모두 사라져서 ‘희귀템’이 된다 해도, 미술 작품으로 인정받긴 힘들지 않을까요? 희귀한 유물은 될 수 있겠지만 심미성은 떨어지니까요. 그렇다고 막걸릿잔이 미술 작품이 될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막걸릿잔에 『샘』처럼 멋진 제목을 붙여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면 됩니다. 아니면, 메렛 오펜하임Meret Oppenheim, 1913~1985이 찻잔과 받침, 스푼에 모피를 둘러서 『오브제, 모피로 된 아침 식사프랑스어: Le Déjeuner en fourrure1936를 제작하고, 맨 레이Man Ray, 1890~1976가 다리미 바닥에 압핀을 붙여서 『선물프랑스어: Le Cadeau1921을 만들었듯이, 막걸릿잔에 창의적인 변형을 가하면 됩니다.  


막걸릿잔을 예술 작품으로 승격한 예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옷걸이는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더군요. 맨 레이의 『방해Obstruction1920/1961라는 레디메이드 작품은 63개의 나무 옷걸이를 이용해 만든 일종의 샹들리에입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보고 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비슷하게 생긴 옷걸이를 찾아보다 포기했죠. 비슷한 옷걸이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몇 개만 달아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 같았으니까요. 또한 옷걸이 밑에 다른 옷걸이를 걸 수 있는 고리를 달아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이 작품의 백미는 옷걸이들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입니다. 미술관의 설명에 의하면 “걸리적거리며 서로를 방해하는 옷걸이들의 존재가 뒤틀리고 변형된 비물질적인 그림자의 형태로 연장되어” 나타난답니다. 옷걸이들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도 작품의 일부인 거죠.    


맨 레이, 『방해』, 1920/1961년. 나무 옷걸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샘』으로 인해 레디메이드라는 미술 장르가 탄생하고 일상과 예술의 경계가 무너졌다면, 미술 작품이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개념미술Conceptual Art 역시 『샘』에 의해 시작했습니다. 개념미술이란 “작품에 포함된 개념 또는 관념이 전통적인 미학적, 기술적, 물질적인 것보다 선행하는 미술”「위키백과」을 가리킵니다. 사실, 뒤샹이 『샘』에서 만들어 낸 것은 “물질적인” 대상이 아니라, 소변기와 샘 사이의 유사성을 토대로 소변기를 샘에 비유한 개념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제목으로서의 ‘샘’을 만들어 낸 거죠. 앞글, 「그림에도 은유가 있나요? ③」에서 살펴봤듯이 안규철1955~ 역시 『평등의 원칙』2014에서 화분과 높이가 다른 받침을 이용해서 평등의 원칙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피에로 만초니Piero Manzoni, 1933~1963의 『세상의 대좌프랑스어: Le Socle du Monde1961도 개념으로만 만들어진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초니는 덴마크 헤르닝Herning의 들판에 ‘세상의 대좌, 갈릴레오에게 경의를 표함’이라고 새겨진 커다란 금속 대좌臺座를 거꾸로 설치했습니다. 대좌란 상을 안치하거나 비석을 받치는 대를 의미합니다. 이 대좌를 통해 (그리고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를 언급함으로써) 세상/지구 전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고 알리는 거죠. 대좌가 일종의 작품 캡션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동안 은유와 환유에 대해 연습했던 것을 활용하면, 지구를 받치고 있는 대좌는 세계 내지는 지구가 작품임을 나타내는 환유입니다. 『샘』 못지않게 기발한 작품이죠? 작가 자신의 대변을 넣고 밀봉하여 제작한 『예술가의 똥이탈리아어: Merda d'Artista1961이나 자신의 숨을 풍선 안에 불어넣어 제작한 『예술가의 숨이탈리아어: Fiato d’Artista1960 같은 작품은 더 기발합니다. 캔과 풍선 안에 작가의 대변과 숨이 진짜로 들어있는지 아닌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똥이나 숨결도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개념이 중요한 거죠. 세상 모든 것이 작품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그 어떤 대상도 다른 대상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작가의 의도이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소변기가 이미 예술 작품으로 승격된 상황에서 작가의 대변이 예술 작품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죠.  

       

피에로 만조니, 『세상의 대좌』, 1961년. 철과 브론즈, 82 × 100 × 100 cm. 헤르닝 미술관, 덴마크. 사진: Ole Bagger.

 

피에로 만초니, 『예술가의 똥』, 1961년. 6.5 × 4.8 cm.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Piero_Manzoni_-_Merda_D%27artista_(1961)_-_panoramio.jpg#/media/File:Piero_Manzoni_-_Merda_D'artista_(1961)_-_panoramio.jpg 제공.


『샘』 이후 일상용품과 미술 작품의 경계가 사라지고, 오로지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미술 장르가 탄생함으로써, 예술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시각이 생겨납니다. 이렇게 기존의 미술 전통을 전복하고 예술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초래한 『샘』을 은유의 관점에서 한번 살펴보도록 하죠. 『샘』이 전시에서 거부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다다이즘 운동가들은 『블라인드 맨The Blind Man』 제2호에 항의성 사설을 실었습니다. “머트 씨가 『샘』을 손수 제작했는가는 중요치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그는 삶의 일상적인 물건을 골라, 새로운 제목과 새로운 관점을 붙여 유용성을 제거했다. 이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창조한 것이다.” 여기서 “일상적인 물건을 골라......새로운 제목”을 붙였다는 것은 일상적인 대상의 이름을 새 이름으로 대체했다는 말입니다. 원래 이름은 ‘소변기’인데 이것을 ‘샘’으로 대체한 거죠. 


그렇다면 ‘소변기’를 ‘샘’으로 대체한 것은 은유일까요? 아니면 환유일까요? 당연히 은유입니다. ‘소변기’를 ‘샘’으로 대체한 것은 둘 사이에 ‘물이 졸졸 흐른다’라는 유사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물이 졸졸 흐른다’라는 유사성을 토대로 이름에 ‘샘’이 들어간 일상용품이 있긴 하죠. ‘fountain pen만년필’에도 ‘샘’이 들어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말 번역어, ‘만년필’로는 ‘펜’과 ‘샘’의 유사성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fountain pen’이라는 영어 명칭을 보고 ‘아, 이 펜에서는 끊임없이 졸졸 흐르는 샘물처럼 잉크가 졸졸 흘러나온다는 거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겠지만, ‘fountain pen이라는 이름은 펜을 샘에 비유한 은유야’라고 생각하며 만년필을 사용하는 사람은 사실 거의 없을 겁니다. ‘샘’과 ‘펜’을 연결한 아이디어만 해도 굉장히 기발한데, ‘소변기’와 ‘샘’에서 유사성을 발견하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뒤샹의 『샘』이 ‘멋지고 똑똑한’ 은유의 명단에 오를 수 있는 한 가지 이유입니다. 여기서 복습 문제 하나 드리겠습니다. 똑같이 ‘물이 흐른다’라는 유사성을 토대로 만들어진 만년필과 『샘』인데, 왜 만년필은 미술 작품으로 간주하지 않을까요?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정의에 의하면 레디메이드란 “작가에 의해 선택되어 미술 작품으로 명명됨으로써 원래 의도된 용도에서 벗어나 미술의 위치로 승격된, 대량 생산된 기성품”을 가리킵니다. 이 정의뿐만 아니라 위에 있는 다다이즘 운동가들의 사설에 답이 들어 있습니다. 만년필은 “원래의 용도”인 ‘글 쓰는 도구’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죠. 만년필에서 “유용성을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만년필은 미술 작품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겁니다. 


피카소의 『황소 머리프랑스어: Tête de taureau1942 역시 은유에 토대를 둔 레디메이드입니다. 이 작품은 일상용품인 자전거 안장과 핸들로 만들어졌죠. 쓸모없이 굴러다니는 자전거 부품들을 모아 형태의 유사성을 토대로 새로운 이름을 붙인 겁니다. 뒤샹의 『샘』이 소변기와 샘이 가진 특성의 유사성에 토대를 뒀다면, 피카소의 『황소 머리』는 자전거 안장과 핸들이 황소 머리와 닮았다는 형태적 유사성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파블로 피카소, 『황소의 머리』, 1942년. 자전거 안장과 핸들, 33.5 × 43.5 × 19 cm, 피카소 미술관, 파리. http://en.wikipedia.org/wiki/File:Pablo_Picasso,_1942,_T%C3%AAte_de_taureau_(Bull%27s_Head),_Mus%C3%A9e_Picasso,_Paris.jpg#/media/File:Pablo_Picasso,_1942,_Tête_de_taureau_(Bull's_Head),_Musée_Picasso,_Paris.jpg 제공.


뒤샹이 『샘』에서 한 일은 전혀 관련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사물에서 비슷한 점을 찾아내서 ‘똑똑한 은유’를 만든 거죠. 이것이 상상력이자 창의성입니다. 세상을 바꾼 『샘』의 혁신성은 결국 ‘독창적이고 참신하면서도 똑똑한’ 은유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은유의 힘이 대단하죠? 여러분도 지금부터 주변을 잘 둘러보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기발한 유사성을 찾아보세요. 미술 초보에서 단번에 혁신적인 예술가의 반열로 퀀텀 리프를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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