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21

이 동작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자소개

이미선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은유와 환유는 시인이나 소설가 같은 작가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을 거예요.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도 날마다 은유와 환유를 셀 수 없이 많이 쓰니까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겨우 몇 분 동안 이루어진 대화 속에 얼마나 많은 은유와 환유가 들어 있는지 한번 살펴보세요. 짧은 대화 중에 이 정도의 은유와 환유를 사용한다면 하루 동안 우리가 사용하는 은유와 환유의 양이 얼마나 될지 가늠이 안 됩니다.     


월요일 아침에 친구와 이런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을 겁니다. 


“주말에 뭐 했어?” 

“파김치가 돼서 하루 종일 백설 공주처럼 잠만 잤어. 너는?”

“주말인데도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억지로 출근했어. 일은 노예처럼 시키면서 월급은 쥐꼬리만큼 주지만 그래도 어쩌겠어. 밥줄이 끊어지면 안 되잖아. 게다가 나는 금수저가 아닌 흙수저잖아. 사표를 던지고 나오고 싶어도 통장이 텅텅 비었는데 일해야지.”


이 짧은 대화 안에 열 가지 정도의 은유와 환유가 들어 있습니다. ‘파김치,’ ‘백설 공주,’ ‘산더미,’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노예,’ ‘쥐꼬리’는 은유고, ‘밥줄’과 ‘통장이 비다,’ ‘금수저,’ ‘흙수저’는 환유입니다. 은유는 모두 유사성을 토대로 ‘A’를 ‘B’로 대체한 것이고, 환유는 인접성을 토대로 ‘A’를 ‘B’로 대체한 것이죠. 은유와 환유가 국어책이나 문학작품 속에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나누는 대화 속에 널려 있습니다. 혹시 대화 중에 욕이라도 한다면 이 욕은 은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이나 상황을 동물에 비유하는 욕이 많으니까요. 욕을 은유와 연관해서 생각해 보신 적은 없죠? 어쨌든, 위 대화 속의 은유와 환유 중 새로운 은유와 환유는 없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만든 은유와 환유를 반복한 것일 뿐입니다. 이런 은유와 환유는 참신하거나 기발하게 느껴지지 않죠. 그런데 다른 사람이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은유와 환유를 만들어 낼 때, 다른 사람이 찾아내지 못한 유사성과 연관관계를 두 사물 사이에서 발견할 때, 그 연관관계로 세계와 인생, 우리 자신에 대해 새로운 관점과 통찰력을 제공할 때, 그런 은유와 환유에는 ‘창의적이고,’ ‘독창적이며,’ ‘기발하고,’ ‘참신하며,’ ‘상상력이 풍부하다’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은유와 환유를 ‘똑똑하다’라고 부릅니다. 어떤 은유와 환유에 이런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까요? 이런 수식어를 붙이고도 남을 ‘멋진’ 은유와 환유를 가장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일 겁니다.   


내일, 그리고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이

기록된 시간의 마지막 음절까지

하루하루 더디게 기어간다.

우리의 어제는 바보들에게 보여준다.

우리 모두 죽어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이여!

인생이란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

무대에서 잠시 거들먹거리고 종종거리며 돌아다니지만

시간이 지나면 말없이 사라지는 가련한 배우일 뿐이다.

인생이란 백치가 떠드는 이야기.

소리와 분노로 가득하지만

아무 의미도 없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맥베스』, 5막 5장.


인생무상이라는 주제를 이보다 더 통렬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 독백에서는 거의 모든 행에 은유와 환유가 들어 있습니다. ‘기록된 시간의 마지막 음절역사의 마지막 순간,’ ‘더디게 기어간다느리게 지나간다,’ ‘짧은 촛불짧은 수명,’ ‘무대세상,’ ‘배우인간,’ ‘걸어 다니는 그림자허상,’ ‘백치가 떠드는 이야기무의미함’는 은유고, ‘과거’와 ‘미래’를 ‘어제’와 ‘내일’로 표현한 것은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낸 환유입니다. 이 중 세상을 ‘무대’에, 인생을 ‘연극’에, 인간을 ‘배우’에 비유한 은유는 가히 최고라 할 수 있죠. 셰익스피어 수업 시간에 한 학생이 발표 중에 “이 부분 표현이 너무 멋지지 않아요?”라고 말하며 제 흉내를 내더군요. 한 학기 내내 이 말을 달고 살았더니 학생들이 절 놀린 겁니다.      


셰익스피어 작품처럼 ‘와, 멋지다. 똑똑해!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을까? 대단해!’라고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드는 미술 작품도 많습니다. 이 글에서는 ‘똑똑한’ 은유와 환유가 들어 있는 두 작품을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은유와 환유에 대한 앞글들에서도 이미 몇 가지 예를 소개해 드렸죠? 시간의 상대성 혹은 무의식의 시간을 녹아내리는 시계로 표현한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1904~1989의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1931, TV 시청자의 모습과 부처를 연결한 백남준1932~2006의 『위성 나무Satellite Tree1992, TV와 달을 연결한 『달은 가장 오래된 TV』1965/2000, 평등의 개념을 화분 높이로 연결한 안규철1955~ 의 『평등의 원칙』2014, 뮤즈 조각상으로 초상화 속 인물이 시인이라는 것을 표현한 오레스트 키프렌스키Orest Kiprensky, 1782~1836의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슈킨의 초상화러시아어: Арэст Адамавіч Кіпрэнскі1827, 두 개의 원으로 자신이 완벽한 예술적 기량을 지닌 화가임을 과시한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의 『두 개의 원이 있는 자화상Self-Portrait with Two Circles1665~1669 모두 ‘똑똑한’ 은유와 환유가 들어있는 작품입니다.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의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프랑스어: D'où venons-nous? Que sommes-nous? Où allons-nous?1897~1898 역시 이 ‘똑똑한’ 작품 리스트에 오르고도 남을 작품이죠. 이 그림은 보스턴 미술관 소장이지만, 서울시립미술관의 「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 그리고 그 이후」2013 전시회 때 우리나라를 다녀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목이 상당히 철학적이죠? 제목 속의 ‘우리’를 ‘나’로 바꾸면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가 될 겁니다. 이 질문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정체성’이죠. 그러니까 이 그림은 ‘나’의 ‘정체성,’ 조금 더 넓게는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엄청나게 거창한 그림의 제목을 보면 고갱이 이렇게 철학적이고 심오한 주제를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했을지 궁금해집니다. 두루마리 동양화를 펼쳐 보듯이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조금씩 시선을 옮기며 그림을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1898년. 캔버스에 유화, 139 × 375 cm. 보스턴 미술관, 보스턴.


고갱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이 그림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가운데 과일을 따고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잠자는 아기와 세 여성,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과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왼쪽에는 아이와 여자, 체념한 채 상념에 잠긴 늙은 여자와 그들 뒤로 “저 너머the Beyond”를 상징하는 신상神像과 말의 무익함을 상징하는 흰 새가 보입니다. 이 세 부분은 태어나서 성년기를 거쳐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흔히 해석되더군요. 그림 속 여러 사람은 다양한 형태의 삶을 보여주고요. 그러니까 제목으로 ‘나는 누구인가?’ 혹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다음 그림으로 ‘인간이란 태어나서 살다가 죽음에 이르는 존재다’라는 답을 제시하는 거죠. 학교 수업 교재인 『인간의 가치 탐색』 서문에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비슷한 답이 나와 있습니다. 


옛날 페르시아에 한 왕자가 있었는데, 그는 장차 자기가 왕이 되어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을 행복하게 하자면 무엇이 필요할까 곰곰 궁리하다가 좋은 왕이 되려면 우선 인간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나라 안의 학식 높은 사람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명을 내린다. “인간이란 무엇이냐?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어 오라.” 20년이 지난다. 그사이 왕자는 왕이 되어 있고, 학자들은 목 빠지게 해답을 기다리는 그 왕에게로 낙타 스무 마리에 책 2천 권을 싣고 나타난다. “너무 많다. 줄여 오라.” 또 10년이 지나 학자들은 낙타 세 마리에 책 5백 권을 싣고 나타난다. “이것도 너무 많다. 더 줄여 오라.” 또 여러 해가 지나고, 이번에는 낙타 한 마리에 책 1백 권을 실은 학자들이 돌아온다. 왕은 이미 늙고 병들어 임종의 침상에 누워 있다. 왕은 탄식하며 말한다.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그렇게도 어려운가? 죽는 순간에도 나는 인간을 알 수 없단 말이냐?” 절망한 왕에게 늙은 학자 하나가 귓속말로 알려준다. “폐하, 사실은 단 한 줄이면 됩니다.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 그게 인간입니다.”


     ―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재편찬위원회, 『인간의 가치 탐색』, 2022년


그런데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존재가 어디 인간뿐인가요? 다른 동물도 모두 태어나서 살다가 죽죠. 인간에 대한 정의로는 뭔가 살짝 부족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그리스어: Aristotélēs기원전 384년~기원전 322년의 정의 공식을 동원하면 정의에는 넓은 개념인 유개념類槪念; genus과 차이점인 종차種差; difference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정의에는 종차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처럼 유개념인 ‘동물’을 종차인 ‘생각하는’으로 한정해서 인간을 정의해야 합니다. 늙은 신하의 정의에는 유개념만 있고 차이점인 종차가 빠져 있습니다. 인간이나 다른 동물이나 모두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건 마찬가지니까요. 태어나고 죽는 것은 같다 하더라도, 중간의 사는 과정에서 종차가 생겨야 하지 않을까요? 고갱의 그림에서 종차를 하나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림을 보고 ‘인간은 태어나서 _________ 살다가 죽는다’에서 빈칸을 한번 채워보세요. 고갱은 인간이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가 죽는다고 표현했을까요?  


그림 오른쪽에서 삶의 시작인 출생은 아기로, 왼쪽에서 죽음은 늙은 여성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처럼 ‘아기’와 ‘늙은 여성’도 탄생과 죽음을 나타내는 환유입니다. 아기와 출생, 노인과 죽음은 인접성에 의한 연관관계로 이어져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그림 중앙의 과일을 따고 있는 사람은 ‘살다가’에 해당하는 성인기를 나타내겠죠. ‘과일 따는 행위’가 나타내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과일’은 구약성서 속 이브의 ‘선악과善惡果’를 연상하게 합니다. ‘선악과’란 ‘선악에 대한 지식Knowledge of Good and Evil’의 나무에 열린 열매죠. 그러니까 ‘선악에 대한 지식의 나무에서 열매를 딴다’라는 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확대하면, 고갱의 그림에서 중앙의 젊은이가 나무에서 과일을 따는 것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과일 따는 것picking fruits’과 ‘지식을 습득하는 것picking up knowledge’ 사이에 존재하는 ‘얻다, 획득하다pick’라는 유사성을 토대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과일 따는 것’에 비유한 은유입니다. 


그런데 그림 속 젊은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성인지, 여성인지 성별이 애매모호합니다. 남성처럼 보이기도 하고, 여성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글에서는 이 젊은이를 ‘남성’으로, 또 어떤 글에서는 ‘여성’으로 지칭하더군요. 웨인 앤더슨Wayne Andersen 같은 미술사학자는 중앙의 젊은이를 폴리네시아인 ‘이브’로 간주합니다. 고갱은 남성인지 여성인지 모호하게 이 젊은이를 그림으로써 ‘선악과’를 ‘죄’와 연관시키기보다는 ‘지식’과 연관시키기를 원한 것 같습니다. 한 성별에 구애되지 않고 모든 성을 아우르는 젊은이로 이 젊은이로 그린 거죠. 고갱 자신도 편지에서 이 젊은이를 ‘남성’이나 ‘여성’으로 지칭하지 않고 그냥 ‘인물figure’이라고 부릅니다. 가운데 젊은이 모습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시겠어요?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중 일부.


만약, 그림에서 중앙의 젊은이가 ‘여성’으로 그려졌다면, 성서와의 연관성이 더 커져서 ‘과일을 따는 행위’가 ‘죄와 타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겁니다. 실제로 중앙의 젊은이를 ‘이브’로 간주하는 앤더슨은 그림의 의미를 “출생-죄-죽음의 순환”으로 해석하더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과일 따는 것’에 들어있는 기독교적인 ‘죄’의 의미보다 ‘지식’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해석이 더 좋습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기 전까지 인간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인지, 끊임없이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설사 답을 찾지 못한다 해도요. 저 위에 있는 인용문 속의 페르시아 왕 역시 마찬가지였죠. 고갱의 그림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은 태어나서 자신과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배우며 살다가 죽는다’가 될 겁니다. 인간이 인생과 세계에 대해 이해하려 노력하며 살아가는 과정을 나무에서 ‘과일을 따는’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한 고갱의 은유에 ‘똑똑하고 멋지다’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분은 없겠죠?    


다음으로 소개해 드릴 ‘똑똑한’ 작품은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da Urbino, 1483~1520의 『아테네 학당이탈리아어: Scuola di Atene1510~1511입니다. 프레스코에 대한 앞글, 「이 그림은 어디에 그린 거예요 ②」에서 젖은 회벽에 그린 ‘진짜 프레스코’인 ‘부온 프레스코buon fresco’의 예로 『아테네 학당』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바티칸의 사도 궁전 벽에 그려진 이 그림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예를 부흥시킨다는 르네상스 정신에 걸맞게 고대 로마의 프레스코라는 형식 속에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사상이라는 주제를 보여줍니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09~1511년. 500 × 770 cm. 바티칸 사도궁, 바티칸 시국.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전면 사진.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22The_School_of_Athens%22_by_Raffaello_Sanzio_da_Urbino.jpg#/media/File:"The_School_of_Athens"_by_Raffaello_Sanzio_da_Urbino.jpg 제공.


제가 큰 작품을 보여드릴 때마다 거의 노래 후렴처럼 반복하는 말이 하나 있죠? 너무 큰 작품은 한 컷에 담기지 않습니다. 위 사진에서는 그림 양옆이 잘려 나갔기 때문에 「위키미디어」 사진도 함께 첨부합니다. 부실한 제 사진을 같이 보여드리는 것은 제가 찍은 사진 속 색감이 작품 원본의 색감에 더 가까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테네 학당』은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워낙 큰 그림이라 등장인물도 많죠.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와 인물이 54명 등장하는데, 이 중 플라톤Plátōn; 기원전 428/427년 혹은 424/423년~기원전 348년과 아리스토텔레스 외에 신원이 다소 확실하게 밝혀진 사람으로는 소크라테스그리스어: Σωκράτης, 기원전  470년~기원전 99년, 피타고라스 기원전 570년~기원전 495년, 유클리드그리스어: Εὐκλείδης, 기원전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그리스어: Ptolemaios, 100~170, 조로아스터그리스어: Zōroastrēs, 생몰년 미상, 소도마Sodoma, 1477~1549, 디오게네스그리스어: Diogénēs, 기원전 412 혹은 404~기원전 323, 라파엘로 자신이 있답니다. 나머지 사람의 신원은 불확실하다고 합니다.  


그림 속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정확히 알아낼 수는 없다 해도, 주변 대상을 이용해서 몇 사람의 직업은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요? 환유에 관한 앞글에서 연습한 것처럼 인접한 대상을 활용해서 위 그림 속 인물의 신원과 직업을 추측해 보죠. 등장인물 중에는 뭔가를 들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사람도 많습니다. 뭔가를 들고 있지 않은 사람의 신원을 추측하는 것은 제 능력 밖이니 논외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책을 들고 있는 학자가 많죠? 사실, 들고 있는 책으로 이 학자들이 철학자인지 아니면 수학자인지 알아내는 것도 제 능력 밖입니다. 엄청나게 시력이 좋거나 성능 좋은 망원경이 있으면 무슨 내용의 책인지 알아내기가 조금 더 쉬워지겠죠. 그런데 설사 그런다 해도, 그리스어를 모르면 책 내용을 알 수가 없습니다. 너무 난해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을 때 영어로는 ‘That’s Greek to me.’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리스어를 배우는 게 쉽지 않아서 그런 표현이 나왔겠죠? 예전에 그리스를 방문했을 때 ‘그리스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들을 때 “That’s Greek to me.”에서 그리스어 대신 어느 나라 말을 집어넣을까?’ 궁금해하며 혼자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어를 모르면 책 내용으로 책을 들고 있는 사람의 신원을 알아내는 것도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림의 오른쪽 아래에서 컴퍼스로 뭔가를 그리고 있는 빨간 옷을 입은 사람은 수학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맞습니다. 이 사람은 수학자인 유클리드랍니다. 유클리드 뒤쪽으로 천구본天球本 혹은 지구본地球本을 들고 있는 두 사람은 천문학자인 것 같죠? 노란색 옷을 입은 사람은 천문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고, 흰옷을 입은 사람은 천문학자인 조로아스터랍니다. 계단에 누워 햇살을 즐기며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은 자세와 분위기로 봐서 알렉산더에게 해를 가리지 말라고 부탁했다는 디오게네스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루크레티스와 단검, 클레오파트라와 독사, 판도라와 상자, 페르세포네와 석류처럼 어떤 인물과 인접한 대상과의 사이에 독점적인 연관관계/결합관계가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인접 대상을 통해 인물의 이름을 정확하게 추측해 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아테네 학당』 속 등장인물의 신원을 정확하게 알아내지 못했다고 너무 기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아, 저 사람은 철학자일 것 같아. 저 사람은 수학자겠지? 또 저 사람은 천문학자 같아.’ 이 정도로 만족하고 각 등장인물의 정확한 이름과 신원은 그림 설명서나 인터넷에서 확인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림 중앙에 있는 두 학자의 경우에는 들고 있는 책 덕분에 자신들의 정체를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왼쪽 학자가 들고 있는 책은 『티마이오스그리스어: Τίμαιος기원전 360년경이고, 오른쪽에 있는 학자가 들고 있는 책은 『니코마코스의 윤리학그리스어: Ēthika Nikomacheia』입니다. 책에 제목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어서 쉽게 읽을 수 있죠. 이 책 덕분에 왼쪽 학자는 플라톤이고, 오른쪽에 있는 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모습을 빌려 플라톤을 그렸고, 조각가인 줄리아노 다 상갈로Giuliano da Sangallo, 1445~1516의 모습을 빌려 아리스토텔레스를 그렸다고 합니다. 두 철학자의 모델이 누구였건 책을 통해 두 사람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것을 드러낸 것은 저작물로 저자를 나타내는 환유입니다. 그런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이보다 더 중요한 또 하나의 환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의 자세, 구체적으로는 손동작을 자세히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이 두 학자의 손동작에서 어떤 환유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중 일부.


플라톤은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른손을 펴서 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을 비롯한 저작물을 통해 추상적 경험과 이데아의 세계를 강조하죠.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에서 현세를 살아가는 인간의 도덕을 이야기하고요. 두 사람의 철학에서 강조점이 다릅니다. 플라톤이 이데아의 관념 세계를 강조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세를 강조합니다. 이데아의 세계는 물질적 세계인 현세를 넘어서는 곳, 고갱의 위 그림에서 “저 너머the Beyond”라고 불리는 곳이죠. 그래서 이데아의 자리는 땅 너머에 저 멀리 있는 하늘입니다. 반면에 현세는 바로 이곳,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땅입니다. 하늘과 이데아의 세계, 땅과 현세는 인접성을 토대로 연결된 연관관계/결합관계를 형성합니다. 라파엘로는 『아테네 학당』에서 이 결합관계를 이용해서 이데아의 세계를 하늘로, 현세를 땅으로 대체했습니다. 환유인 거죠. 라파엘로는 하늘을 가리키는 손동작으로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을, 땅을 가리키는 손동작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세 중심 철학을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그 어떤 철학자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보다 더 간명하게 핵심을 보여주진 못할 겁니다. 이렇게 똑똑하고 멋진 환유가 또 있을까요? 


사실,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 대해서는 이미 무수히 많은 해석과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수많은 평론가가 고갱의 그림 속 과일을 지식과 연관시킨 해석을 제시했고, 『아테네 학당』 속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세를 두 사람의 철학과 연관시켜서 설명했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는 것은 제 능력 밖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은유와 환유의 관점에서 기존의 해석을 살펴보고, 그런 해석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 과정을 보여드리는 겁니다. 고갱의 그림 속 젊은이의 과일 따는 동작을 은유로, 『아테네 학당』에서 두 철학자의 동작을 환유로 설명하면 결과적으로는 기존 해석과 비슷하다 해도 해석 과정이 좀 더 명료해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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