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08

기적의도서관은 나의 인생을 어떻게 바꿨나 ②

저자소개

신은미
기적의도서관 프로젝트 초창기 실무자.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에서 활동하며 1호관인 순천관을 시작으로 7개 기적의도서관 개관을 도왔다. 2006년 충북 제천으로 귀촌해 대안학교에서 근무, 2014년부터는 농사짓는 환경운동가로 충남 홍성에서 살고 있다. 작은 텃밭에 작은 집을 짓고 강아지와 닭, 염소, 꿀벌들과 함께 산다.

2003년 2월 기적의도서관 부지 답사. 사진 왼쪽부터 홍성담 화백, 신은미 전 책읽는사회문화재단 간사, 정기용 건축가, 도정일 책읽는사회문화재단 대표.


지방과 농촌에 더 필요한 도서관


기적의도서관 프로젝트가 처음 방영되고 난 후 며칠은 사무처에서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신청 문의와 방문이 쇄도했다. 짧은 시간에 전국 40여 개 지역에서 신청서를 제출했고, 건축가와 도서관전문가, 실무진 등으로 구성된 어린이도서관 부지선정위원회가 거의 모든 지역을 답사했다. 초기 도서관 건립 지역 선정 원칙 중 하나는 서울 및 수도권은 제외후순위로하고 그 외 지역은 광역별로 고르게, 가급적이면 소도시를 선정한다는 것이었는데, 모든 게 중앙, 대도시 중심적인 현실에 대한 일침이기도 했다. 나 역시 대학 진학으로 서울에 왔고 평생 서울에서 직장생활하며 사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는데, 도서관 건립 신청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니 지방과 농촌이 완전히 새롭게 보였다. 아무리 소도시여도 풀뿌리 시민조직이 있고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베테랑들이 있었다. 전국 단위의 명망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복잡하고도 투명한 지역사회에서 생활밀착형, 관계지향형으로 활동하는 사람들, 나고 자란 고향을 사랑하고 또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큰 감명을 받았다. ‘이 지역에 도서관이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동문서답으로 자기 고장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지 열변을 토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뿌리박고 사는 곳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 그래서 그곳에 어린이도서관이 꼭 필요하다는 어필이었을 것이다. 토착성의 상징인 사투리마저도 동경하게 되었다. 도서관 건립 지역이 선정되고 몇몇 지역과 집중적으로 소통하는 동안 전라도순천 사투리, 충청도제천 사투리, 경상도진해 사투리를 자연스럽게 습득해 번갈아 쓰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사무처 간사들이 놀리던 게 기억난다. 변방에서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바로 이 답사 덕분이었다. 실제로 나는 2006년 충북 제천으로 귀촌해 대안학교 교사로 일했고 2014년부터는 충남 홍성에서 환경운동과 농사를 병행하며 살고 있다.    


신은미. 2022년 기후정의 행진.


‘이벤트’가 아닌 ‘제도’가 되려면


방송을 앞세운 프로젝트이고 시민단체가 도서관 건립 지역을 선정하는 위치에 있다 보니, 도서관 건립과 운영에 대한 원칙을 분명히 제시할 수 있었다. 


도서관 건축비용은 선정도서 판매수익금으로 부담하기로 했지만, 예상보다 신청지역이 많았고 부지선정위원회는 건축비 일부를 지자체에서 부담하도록 제안했다. 도서관은 다 짓고 나면 해당 지자체에 기부채납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에 큰 이견이 없을 것 같았지만, 일부 지역은 반발하며 신청을 포기하기도 했다.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한편, 어차피 지역의 재산이 될 터이니 건축비 전액을 부담하겠다는 지역도 있었다. 결국은 지자체의 의지에 달린 문제였다. 이는 지속가능한 도서관 운영과도 직결되는 일이라, (의도하지 않았지만) 건축비 분담 여부는 기적의도서관에 대한 ‘적극 행정’이 가능한가를 되묻는 절차가 되었다.   

 

도서관 건립 신청을 위해서는 도서관건립추진위원회 구성이 필수였다. 형식적인 위원회가 아닌, 도서관을 유치하고 건립과정에 참여하며 초기 운영을 지원할 수 있는 위원회였고 이는 지역 선정에 굉장히 중요한 단서이기도 했다. 이름과 간단한 직책이 적힌 위원회 명단은 지역에 도서관운동의 씨앗이 있는가, 지역공동체에 관심이 있는가, 지역에 어떤 풀뿌리운동이 있는가를 잘 보여주었다. 도서관을 빌미로 지역의 다양하고 유능한 사람들이 발굴되고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행정의 입장에서는 평소 같으면 불편했을 인사들도 있었겠지만, 도서관 유치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지 대부분 의도에 맞게 위원회가 구성됐다. 시인이나 배우, 작가나 화가 들이 기꺼이 위원장이나 명예관장을 맡아줘 기적의도서관은 사회적 신뢰를 쌓을 수 있었고 위상도 한결 높아졌다. 이 준비위원회는 도서관 건립 이후 자연스럽게 운영위원회로 전환, 정비되었고 행정을 견제하며 도서관 운영을 지원하게 된다.   


‘어린이도서관 건립과 운영에 관한 조례’ 제정 역시 기적의도서관을 유치하는 지역에서 약속해야 하는 조건이다. 기적의도서관 프로젝트의 목표는 어린이도서관 건립이지만, 지역에서는 이후 도서관을 잘 운영할 의무를 져야 하는 것이다. 방송의 효능이 사라지고 ‘책읽는사회’와의 직접적인 연결이 끊어져도 지역에서 기적의도서관 설립 취지와 정신을 살려나가기 위해서는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했다. 도서관전문가들로 구성된 조례제정분과에서는 여러 차례의 논의를 거쳐 적정한 운영비 책정,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운영위원회 구성, 전문가 관장 임명 등이 명시된 기본조례안을 제안했다. 합리적인 내용이지만, 당시 여러 지자체가 부담스러워해서 담당공무원들에게 이 내용을 반복해 설명하고 설득했던 기억이 난다. ‘책읽는사회’가 운영에 개입하고 마음대로 하려는 것 아니냐는 오해도 받았다. 하지만 오히려 외부의 간섭 없이 원칙에 맞게 도서관을 운영하기 위해 조례가 필요했다. 지자체장이 바뀌어도 도서관 운영에 차질이 없도록, 도서관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꼭 필요하고 중요한 활동이 지속되려면 제도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도 이때 배웠다. 


〈느낌표〉 2003년 5월 3일 방영분.


‘도서관의 변화’만큼 놀라운 ‘사람의 변화’


기적의도서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아마도 나는 평생 만나야 할 공무원들을 거의 다 만난 것 같다. 어린이도서관 건립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긴 했지만, 시민단체와 행정 사이가 원활하고 좋을 리 없다. 지금이야 민관협치니 거버넌스니 하는 개념이 자리 잡았지만, 당시 행정에서는 원칙을 고집하는 시민단체가 고자세로 보였을 것이고, 시민단체로서는 관행대로만 하려는 행정이 답답했을 것이다. 전화로 한 시간 넘게 통화하며 언쟁을 했던 일이 숱했고, 때로는 먼 거리를 마다않고 사무처로 항의 방문을 했던 공무원들도 기억난다. 새로운 방식과 새로운 내용의 일을 작은 시민단체와 해나가자니 불안했을 공무원들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에 호기심을 가지고 기꺼이 뛰어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실은 고마운 일이지 않은가. 설계할 때도, 안전기원제 때도, 인테리어를 할 때도, 개관 준비를 할 때도 엇갈리는 의견이 많았지만, 이 프로젝트를 함께 만들어 가는 메인 파트너로서 서로의 역할이었을 것이다. 어렵사리 도서관을 개관하고 나면 모든 오해나 묵은 감정은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오히려 전우애 같은 게 생긴달까. 활동가 이상으로 열성적인 도서관 운동가가 되는 공무원들도 있었다. 전국 최초로 사서직 도서관운영과장이 되어 지역 도서관 업무를 총괄하는 순천시 공무원, 대학원에서 문헌정보학을 전공한 울산 북구 주무관, 아들에게 사서가 되어보라고 한 금산군 공무원 등. 기적의도서관 보너스 선물같이 기분 좋은 변화다.

  

기적의도서관을 채운 것, 시민의 참여와 기부문화


도서관마다 오천 장의 벽돌을 기부한 벽돌회사, 친환경페인트를 기부한 페인트회사, 도서관 직원과 이용자가 함께 볼 수 있는 양면모니터를 기부한 모니터회사, 비데와 정수기를 기부한 정수기회사, 감리비용 일부를 후원한 감리회사, 가구비용 일부를 후원한 가구회사, 도서관마다 오백 권의 환경 도서를 기부한 환경재단, 점자도서를 기부한 점자도서관, 태양광 설치를 약속한 태양광회사, RFID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 무인대출반납 시스템을 기부한 기술회사, 안전을 위해 보안시스템을 기부한 보안전문기업… 여기에 지역마다 크고 작게 기부된 물품과 서비스가 수두룩하다. 고향에 지어지는 도서관이라며 흔쾌히 자기 이름으로 기금을 조성한 연예인도 있고 책 구입비를 후원한 아이스크림 회사도 있다. 한 은행은 기적의도서관 프로젝트에 쓰라고 수억 원을 지정기탁하기도 했다. 광고효과라는 게 있긴 하지만, 방송에 한두 번 비춰지기 위해서라기엔 참으로 실질적이고 진정성 있는 기부행위들이다. 어린이도서관이라는 공공의 자산을 만드는 데 누구나 자기가 가진 뭐라도 내놓고 이 과정에 참여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달까. 개관 준비로 몇날 며칠을 늦은 밤까지 도서관에서 보낸 수많은 자원봉사자들, 제천관이 개관할 때 축하공연으로 학춤을 추시던 어르신들, 마임공연단을 만든 진해관의 블랙라이트 엄마들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기적의도서관이 개관할 때마다 아이들에게 선물한 그림책 『돌멩이국』의 이야기는 공동의 선과 공동체, 참여와 기부문화를 잘 설명해 준다. 기적의도서관이 만들어진 과정이 은유적으로 표현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각박한 세상 같지만, 사람은 누구나 공동의 선을 위해 함께할 마음이 있다는 것, 이러한 마음이 또 다른 공동의 선을 만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후 가난한 대안학교에서 돈을 모아 생활관을 짓고, 군 단위 농촌지역에서 환경단체를 만들어 운영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기적의도서관 실험, ‘가치를 실현하는 모델’의 모델


기적의도서관 프로젝트는 미래세대의 재발견, 정보 접근과 교육의 평등성, 민주시민 양성과 지역공동체 활성화, 인권과 다양성 등 어린이도서관이 중요하게 다뤄질 수 있는 사회적 토대이자 우리 사회가 우선해야 할 가치들을 확인시켜 주었다.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해 드러내고 가치를 실현하는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내가 기적의도서관에서 얻은 가장 큰 배움이다. ‘어린이도서관은 꼭 필요하고 완전히 새로운 공간이어야 한다’는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그에 맞게 구현해 낸 것, 그래서 정책을 바꾸고 시민들의 인식을 바꾼 것은 비단 어린이도서관 운동사에서만 의미 있는 일이 아니라, 모든 시민사회운동에서 곱씹어 볼 사례다. 


별 준비도 없이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간 것, 대안학교에서 다른 교육을 실험하고자 했던 것, ‘반정당의 정당’을 표방하는 녹색당 당원으로 사는 것, 농사를 지으며 지역 환경운동을 하는 것 모두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모델을 만들어 온 여정이 아닐까 싶다. 기적의도서관이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을 바꾸었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내 삶이다.  


벌써 20년 전이고 초창기 얼마간의 경험이라 기적의도서관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나 분석은 어려워 추억여행 하듯 개인적인 경험과 느낌을 나눈다. 지면을 빌어 기적의도서관이라는 한배를 탔던 모든 분들께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