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 4일 〈느낌표〉 프로그램을 통해 공개된 ‘기적의도서관’ 프로젝트.

기적의도서관이 내게로 왔다

책을 좋아하고 도서관에서 일하고 싶어서 문헌정보학과를 선택했지만, 2000년대 즈음의 정보화, 디지털화의 물결 속에서 나는 내 미래가 도서관이라는 세계와는 연결되지 않을 것 같았다. 당시에는 도서관이 많지도 않았거니와 공공도서관에서 일하자면 학점도 좋아야 하고 자격증도 두루 갖추어야 하며 채용시험까지 봐야 했다. 학교도서관에도 관심이 있어 교직까지 이수했지만 사서교사를 뽑는 학교는 거의 없었다. 졸업을 앞둔 2002년 말, 나는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겠다’는 생각을 단념하고 ‘책이나 도서관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일을 찾아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러고 얼마 되지 않아 ‘문화연대’ 소식지에 조그맣게 구인광고가 났다. “어린이도서관 건립 프로젝트 실무 간사 구함.” 명함 크기만 한 구인광고는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동시에 대학 졸업도 전인, 그래서 실무경험도 없는 사회초년생을 채용한 ‘책읽는사회’의 결정은, 이 프로젝트가 얼마나 실험적이고 새로워야 하는지를 선언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관행과 선입관에서 자유로운 ‘새 도화지’ 같은 역할이 나에게 부여된 것이다. (때로는 ‘이 프로젝트에도 사서가 있다’는 증명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나는 문헌정보학을 전공한 보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대학에서 배운 도서관’을 현실에서, 현장에서 새롭게 마주한다.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열정적으로 일하고 집중적으로 공부한 시간이기도 했다. 학위는 없지만, 기분상으로는 거의 대학원 석사과정을 이수한 것 같다. 어린이도서관 개론, 도서관 건축 개론, 도서관운동사, 어린이도서관 개관 실무, 어린이도서관 운영론, 도서관 정책론, 도서관과 교육, 도서관과 민관협치, 도서관과 시민참여 등. 기적의도서관을 통해 내가 배운 것들을 떠올려 마음대로 과목명을 붙여보았다. 대중매체론이나 인간관계론, 사회공헌론처럼 전공은 아니지만 교양으로 공부한 것들도 꽤 많았고, 모든 과목에 현장실습은 필수였던 것 같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탁월한 선생님이었다. 써넣고 보니, ‘책읽는사회’에서 월급을 받을 것이 아니라 학비를 내야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석사논문을 썼다면, 논문 제목은 아마 ‘기적의도서관은 사회를 어떻게 바꿨나’가 되지 않았을까. 도서관과 씨름하고 때로는 포옹하며 도서관과 연결된 사람들과 지역, 문화운동과 사회구조를 알게 되고 새로운 사회의 모델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과 그 매력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개봉된 판도라의 상자, ‘어린이도서관’

‘책읽는사회’에 입사하자마자 한 일은 어린이전용도서관에 대한 현황조사였다. 아동도서를 취급하는 곳에서 사설로 운영하는 서점이나 도서실 규모의 도서관이 있기는 했지만, 공립 어린이도서관은 전국에 하나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세상에!’ 놀랄 일이지만, 당시에는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만큼 어린이도서관은 물론 도서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낮았기 때문에 기적의도서관 프로젝트로서는 그 사실을 드러내고 환기시키는 것 자체가 큰 동력이 되었다. 현실에는 거의 없지만, 방송을 통해 ‘어린이도서관’이 회자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어린이도서관이 왜 필요하고 얼마나 중요한지 직관적으로 알아챘다. 도서관은 누구나 쉽고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도서관은 책만 보는 곳이 아니라는 인식도 자리 잡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이러한 인식 변화가 기적의도서관을 만들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도서관 이용자인 시민, 사서, 도서관학자, 도서관운동가 등 도서관과 관련된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도서관을 진단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도서관을 바라보았다. 지자체에 도서관 건립을 요구하거나 스스로 도서관을 만들기 위한 움직임도 생겨났다. 기적의도서관만이 아니라 기존의 도서관들도 바뀌기 시작했다. 책을 빌려 가고 시험공부를 하던 납작한 도서관들이 점점 풍성한 입체감과 역동성을 가지게 되었다.  

도서관운동가들의 재발견

공립 어린이도서관이 없다고는 하지만, 다행히도 민간에서는 오래전부터 어린이도서관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전국의 도서관운동가들을 수소문해 만나고 워크숍을 열어 앞으로 만들어질 어린이도서관에 대한 상을 함께 그렸다. 제주 설문대도서관, 서울 파랑새도서관, 대구 새벗도서관, 용인 느티나무도서관, 청주 초롱이네도서관 등 사비를 털고 방 한 칸을 내어 어린이도서관을 운영해 온 분들은 존경받아 마땅한 선배이자 스승이었고 기꺼이 우리의 동료가 되어주었다. 기적의도서관은 故 정기용, 조건영 두 건축가가 설계했다. 내로라하는 훌륭한 건축가들이지만, 이들 역시 도서관운동가들의 도서관 운영 철학과 노하우를 귀 기울여 듣고 설계에 반영했다. 실상 도서관 설계 과정은 어린이도서관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토론의 연속이었고, 도서관을 완공하는 순간까지 이들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도서관운동가들이 재발견되어 빛을 발하고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기적의도서관의 큰 성과다.

서귀포기적의도서관.

건축, 삶을 조직하고 관계 맺는 일 

어린이도서관을 짓는다고 했을 때 나는 도서관의 외형인 건축물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기존 도서관보다 조금 세련되고 어린이를 배려하겠지, 정도. 하지만 건축가들과 처음 현장답사를 하던 날, 나는 앞으로 굉장한 일이 벌어질 것임을 직감했다. 두 건축가의 구상에는 ‘어린이’와 ‘도서관’이라는 주제 이외에도, 장애인을 위한 배려, 친환경 건축, 여러 세대를 고려한 공간, 지역성을 반영한 설계 등 ‘유니버셜 디자인’의 개념이 세심하고 자연스럽게 녹아있었다. 지금은 보편적으로 이러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고 일부는 제도화되기도 했지만, 나로서는 건축이라는 분야를 다시 보게 된 계기였다. 또 하나. 중요한 정신에는 다른 중요한 정신들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이는 이후 내 삶의 중요한 지표이자 태도가 되었다. 

서귀포 지역 답사를 갔을 때, 정기용 선생은 도서관 부지에 서 있는 소나무를 보고 “저걸 그대로 살려야 해”라며 소나무가 가운데 위치한 도넛형 도서관을 설계했고, 제주시에서는 “제주 기적의도서관은 삼방산의 능선을 닮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부지의 원형을 살리고 주변과 조화롭게 도서관을 계획하는 것은 1호관인 순천부터 쭈욱 이어졌다. 도서관은 책만 보는 곳이 아니라 사람과 공간, 자연, 지역이 관계 맺는 곳임을 두 건축가는 기적의도서관을 통해 보여주었다. 나는 건축엔 문외한이었지만, 일곱 개의 기적의도서관을 개관하면서 ‘건축은 삶을 조직하는 일’이라던 정기용 선생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완전히 이해하게 됐다. 

건축가와 가구디자이너, 도서관 운영자 모두 어린이도서관이 일반 도서관의 축소판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크기만 줄여놓았다면 그것은 어린이도서관이 아니라 ‘(크기가) 작은 도서관’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어린이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크기뿐 아니라 공간의 배치나 동선, 가구의 모양이나 색깔도 달라야 했다. 기적의도서관 프로젝트는 어린이를 ‘덜 큰 어른’, ‘아직인 존재’가 아니라 독립적인 인격체로 보고 ‘어린이라는 세계’가 있음을 도서관 건축물과 프로그램, 운영체계를 통해 보여주었다.  

〈느낌표〉선정도서 25권.

방송, 밀당이냐 협업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책 판매수익금으로 어린이도서관을 짓는다는 컨셉에 한편에서는 상업적이며 단발성 이벤트라는 비판이 있었다. 도서를 판매해 수익금이 모아진다 한들 도서관이 지어지겠냐고 비웃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불과 3년 만에 10여 개의 어린이도서관이 개관했고 사회적 반향이 대단했다. 기적의도서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예상과 달랐던 일들이 많았지만, 그중 가장 예상을 뛰어넘었던 일은 시민들의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방송 인터뷰와 온라인게시판에 올라온 글, ‘책읽는사회’로 온 이메일 등은 도서관에 대한 시민들의 갈증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민들의 호응은 기적의도서관 프로젝트의 가장 큰 추진력이었다. 방송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시민단체가 방송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애초 방송과 시민단체는 일하는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었는데, 시간과 돈이 달린 문제라 방송이 프로젝트를 끌고 가는 형국이었다. ‘일정을 무리하게 앞당기면 안 되는데…’ ‘도서관 선정 때문에 경쟁을 부추겨서는 안 되는데…’ ‘좋은 면만 부각돼서 오해가 생기면 어쩌지’ ‘연출은 최소화해야 하는데…’ 실무자인 나는 별게 다 걱정이었다. 매사 방송제작진과 밀당하는 기분이었고 의견 차이로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하지만 방송제작진도 프로젝트가 진행될수록 책임감을 갖게 되었고, ‘책읽는사회’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방송의 힘’으로 헤쳐 나가며, 무사히 프로젝트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방송과 시민단체가 협업한 사회변화실험의 사례로 남았다. 먹방과 연예인 생활담 일색인 요즘의 예능프로그램을 보면, 책과 도서관을 중요한 테마로 설정하고 공익성까지 담보했던 ‘느낌표’가 얼마나 특별했는지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