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30

숭고한 연민을 담은 유서

저자소개

송필경
치과의사. 대구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베트남평화의료연대 대표이사.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공동대표. 펴낸 책으로 《제국주의 야만에 저항한 베트남 전쟁》 《지난밤 나는 평화를 꿈꾸었네》가 있다.

〈첫 번째 유서, 1969년 9월〉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에 나를, 영원히 기억해 주기 바라네.

그러면 뇌성 번개가 천지를 무너뜨려도

하늘이 바닥이 빠져도 나는 두렵지 않을 걸세.

그 순간 무엇이 두려워야 된단 말인가. 두려워서야 될 말인가.

도리어 평온해야 될 걸세. 조금이라도 두려움을 가진다면 나는 나를 버릴 걸세.

완전한 형태의 안정을 구하네. 순간, 그 순간만이 중요한 거야.

그 순간이 지나면 그 후론 거짓이 존재하지 않네.

그 후론 아주 안전한 완성된 白일세.

그 순간은 향기를 발하는 백합의 오후였다고 이야기를 나누게.

그리고 내 자리는 항상 마련하여 주게. 부탁일세. 테이블 중간이면 더욱 만족하겠네.

그럼 이만 작별을 고하네. 안녕하게.

아. 너는 나의 나다. 친구여 만족하네. 안녕.


〈두 번째 유서, 1970년 4월〉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주게.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 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 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이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의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네.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 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좋겠네.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태일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세 번째 유서, 1970년 8월 9일〉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작 완전에 아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의 결단을 내린 이 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1970년 8월 9일, 삼각산에서


전태일 자필 유서(사진제공= 송필경)


나는 우리가 전태일의 유서 세 편의 글을 읽지 않고서는 전태일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정성을 다해 읽어야 온전한 전태일을 만날 수 있다.


전태일은 22년이란 짧은 삶을 살았지만 생각에 힘이 깊었고, 생각의 대상이 비록 다양하지 못했지만 생각한 주제만큼은 크고 깊고 치밀했다. 이 짧은 유서에 전태일은 자신의 모든 정신을 압축해 놓았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전태일은 자신의 본성에 충실히 따른 삶을 성실히 정리하여 유서들을 남겼다. 유서의 글은 자신의 삶과 완벽하게 일치했으며 그런 만큼 감동적이면서 숭고하다.


대장경은 붓다의 말씀경장, 불교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규칙율장, 말씀과 규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해석한 논술논장을 1천여 년 편찬해 모은 불교 경전을 말한다. 약 5천2백만 글자로 81,258개에 달하는 경판에 담아 놓은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불교 대장경전이라 한다.


반야심경은 방대한 대장경을 압축하고 압축해서 약 5천여 만개 글자를 270자로 만든 불교사상의 핵심이다.


누군가 그 방대한 팔만대장경을 한마디로만 줄인다면 ‘착하게 살자’가 된다고 했다. 윤리가 요구하는 삶에서, 종교가 요구하는 삶에서 ‘착하게 살자’란 마음 다짐과 실천보다 더 아름답고 더 값어치 있는 인간 행위는 무엇일까?


전태일처럼 착하게 살자!


전태일의 짧은 유서를 반야심경에 비유하면 어떨까? 반야심경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압축한 것처럼, 전태일 유서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음과 숭고함을 압축한 것이 아닐까?


전태일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참으로 착했다. 


우리가 그런 전태일을 만나려고 한다면 우리의 다짐과 실천은 어떠해야 할까?


“전태일처럼 착하게 살자!”


전태일은 나보다 ‘우리’를 찾았다. 너는 남이 아니라 ‘우리’다. 너가 ‘우리’일 때 나는 나에게만 집착할 수 없다. ‘우리’일 때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이다.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일 때 ‘우리’라 말할 수 없다. 너와 나를 분리하지 않을 때 나는 너의 고통에 깊은 연민을 느낀다.


부모가 자식이 아플 때, 연인이 연인의 고통을 알았을 때 “아프냐? 나도 아프다!”고 우리말은 멋지게 표현한다. 우리일 때 나는 너의 아픔을 함께 느낀다. 


연민이 있다면 ‘우리’ 안에 있는 너를 인격적으로 만난다. 그렇게 만나기 때문에 ‘우리’인 너를 나는 착취할 수 없다.


전태일은 약육강식 자본주의의 이기주의 시대에 나만을 찾지 않고 ‘우리 함께’라는 공동체적 삶을 구현하려고 노력했고 실천했다.


인간 사회에서 가장 기초적인 만남은 가족이다. 몹쓸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가족을 이기적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만난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자식은 부모를 위해, 배우자는 서로를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아픔을 외면할 수 없는 인간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전태일은 1969년 12월 31일 일기에서 이렇게 자기 마음을 적었다. 


“어떤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과제이다.”


전태일은 어린 여공의 아픔을 남의 일 보듯 한 게 아니라 나의 아픔으로 느꼈다. 어린 여공을 동생처럼 가족으로 끌어안았다.


전태일의 위대함은 ‘우리’라는 개념을 최대한 넓힌 것이다. ‘우리’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어린 여공에게 우월적 지위를 누렸을 것이다. 밑바닥 시다 여공들이 한 달 월급이 1,500원이었다면 전태일은 재능 있는 재단사로서 월급이 여공의 20배에 가까운 3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장남으로서 가장 노릇을 한 전태일은 모셔야 할 어머니와 학교를 다니는 어린 동생이 셋이나 있었다. 전태일이 우리라는 개념을 가족에만 한정 지웠다면 어린 여공에 대한 연민을 품을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어린 여공들의 하루 15∼16시간 일한 일당은 업주의 커피 한 잔 값에 불과했으며 그들이 먹는 점심값의 반도 되지 않았다. 노동 혹사에다가 임금 착취당하는 어린 여공에 비해 20배 가까운 월급을 받았다고 하지만 아버지 없는 가장으로서 가족 5명을 돌보기 위한 최소 생활비를 책임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전태일은 수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렇듯 전태일은 약하고 가난한 사람의 아픔을 들었던 사람이었다. 그들의 아픔을 동정심으로 바라만 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의 깊이 있는 철학적인 견해를 들어보자.


타인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주체야만 ‘서로주체’다. 그런데 어떤 것이 인격적인 만남인가? 그건 바로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서양 인식론에서 앎이란 보는 것이다. 그런데 볼 때 나는 주체가 되고 보이는 대상은 객체가 된다. 봄으로서 객체는 사물화되고 나는 우월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가령 파놉티콘의 작동원리죄수를 효과적으로 감시할 목적으로 고안한 원형 감옥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편하다. 감시가 그렇듯 시선은 권력이다. 뿐만 아니라 보는 나는 보이는 자의 표면밖에 알지 못한다. 사물로서 드러나는 외면을 아는 것이 봄의 한계다. 이런 층위에서는 인격적인 만남이 불가능하다.


반면 들을 때 우리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 주체인 동시에 객체가 된다. 누군가가 말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들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는 자는 주체고 듣는 자는 객체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가 들어주지 않으면 말은 허공으로 흩어질 따름이다. 말이 의미를 가지려면 듣는 자가 말을 자기 속에서 주체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말을 들을 뿐만 아니라, 알아들을 수 있고 만남의 장이 열린다. 이때는 말하는 자가 객체가 되고 내가 주체가 된다. 그러므로 봄이 아니라 들음으로 우리는 서로 객체이면서 주체인 관계, 즉 ‘서로주체’가 된다.


쉬운 말로 하면 이렇다. 가난한 사람의 고통을 떨어져서 보는 게 아니라, 가까이서 그들의 고통을 들음으로써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말이다.


전태일 영혼의 벗, 조영래


전태일 영혼의 벗 조영래를 보자. 조영래는 유신 시절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로 수배되어 1974년부터 1979년까지 6년간 쫓기는 생활을 했다.


위인은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는다고 한다. 조영래는 도피 생활을 하면서 전태일의 영혼이 깃든 청계천에 찾아갔다. 이소선 어머니를 만나 당시 전태일과 함께했던 청계천 노동자와 노동 현실을 알기 위해 청계천 일대를 누볐다. 조영래가 본 것은 인간 이하 대우를 받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삶이었다. 많은 노동자를 만나며 지식을 전해 주기도 했지만, 오히려 노동자들에게서 삶은 귀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말해 최고 학력 사법시험 합격자 조영래는 청계천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듣는 자세였기 때문에 우리 현대사에서 너무나 고귀한 책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평전』을 쓸 수 있었다.


전태일은 어린 여공인 너를 우리 가족으로, 너를 우리 사회의 ‘우리’로 넓혔다. 사회가 가족이고 나였다. 가족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듯이 사회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었다. ‘나’ 안에 이웃이 있고 사회가 있었다. 이웃과 사회는 나와 분리될 수 없었다.


전태일은 너무나 짧은 생과 비천한 환경 때문에 ‘나’가 민족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민족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라는 걸 우리 사회가 알기까지는 문익환 목사의 등장까지 기다려야 했다. 물론 그 이전에 수많은 통일애국지사가 있었지만 언론에 민족적 이슈를 공개적으로 거침없이 계속 던진 분으로서 말이다.


짧은 삶, 그 삶의 한계 때문에 전태일의 정신은 민족으로까지 더 나아가지 못했지만, 짧은 삶이었을지라도 그의 정신에는 이미 인류애라는 씨앗이 담았다. 어린 여공의 고통을 해소하려 한 전태일은 가장 고귀한 페미니스트의 선구자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22살이었던 1970년 초에 쓴 소설작품 초고에서 전태일은 이렇게 말했다.


나이가 어리고 배운 것은 없지만 그들도 사람, 즉 인간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생각할 줄 알고, 좋은 것을 보면 좋아할 줄 알고, 즐거운 것을 보면 웃을 줄 아는 하나님의 만드신 만물의 영장, 즉 인간입니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빈한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안식일을 지킬 권리가 없습니까?


종교는 만인이 다 평등합니다.


법률도 만인이 다 평등합니다.


왜 가장 청순하고 때 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 묻고 더러운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입니다. 부한 자의 생명처럼 약자의 생명도 고귀합니다.


호세 마르티와

카스트로


“게으르지도 않고 성질이 고약하지도 않은 사람이 가난하게 살고 있다면 그곳에는 불의가 있다.”


사회 불의를 규정하는데 나는 이보다 더 적확한 표현을 아직 찾지 못했다. 혁명을 해야 하는 이유 또는 사회를 개혁해야 하는 이유를 이보다 더 절실하게 호소하는 표현을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이는 쿠바 혁명의 성자이자 쿠바 인민이 국부로 추앙하는 호세 마르티José Julián Martí y Pérez, 1853~1895의 말씀이다.


1869년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한 젊은이가 군인에게 부당하게 살해당하자 폭동이 일어났다. 호세 마르티는 ‘자기 나라를 위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달콤한가?’라는 시를 썼다. 이때 호세 마르티는 고작 16살이었다. 전태일이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어린 여성 노동자 참상을 처음 보고 괴로워했던 그 나이였다.


쿠바 하면 흔히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를 연상하기 쉬운데, 막상 쿠바에 가면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과 거의 같은 시기에 활약한 호세 마르티에 대한 기억과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쿠바 인민들도 쿠바 혁명의 완성자였으며 현세의 권력자였던 카스트로나 혁명의 풍운아 체 게바라보다 훨씬 더 존경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수운 최제우의 이론과 녹두장군 전봉준의 실천을 한 몸에 지닌 인물이라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이 아니다. 쿠바의 호찌민이란 비유가 적절할 것 같다.


카스트로는 1959년 혁명 성공 후 2016년 사망까지 57년간 최고 자리에 있었으나 자신에 대한 어떤 우상도 금지했다. 그래서 쿠바에는 카스트로 동상이나 조형물이 하나도 없다. 


쿠바에서 중요한 혁명 도시 산타클라라 전체를 혁명 시절 자신의 부하이자 동료였던 체 게바라 도시로 꾸몄다. 거대한 동상과 기념관 그리고 드넓은 혁명 광장을 조성했다.


쿠바는 광장의 나라라 할 만큼 광장이 많다. 전국 지역 곳곳 광장마다 식민지 시절 독립 투쟁이나 혁명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많은 인물 조형상이 널려 있다. 나아가 지역 주요 시설, 공항이나 광장, 이름을 독립투사나 혁명전사 이름으로 부른다.


특히, 카스트로는 쿠바 전역 거의 모든 중요한 광장에 호세 마르티의 조형물을 세웠다. 쿠바의 관문인 아바나에 있는 공항 이름이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이다.


깨어 있는 시민이 대구 시장이 된다면, 대구 공항 이름을 ‘전태일 국제 공항’으로 바꾸리라.


쿠바 제2의 도시 산티아고 데 쿠바에 ‘산타 이피헤니아 묘지Santa Ifigenia Cemetery’가 있다. 많은 독립 혁명 지사들이 묻혀 있다. 특히 호세 마르티의 웅장한 조형물과 그 속에 무덤이 있다. 쿠바에서 카스트로의 유일한 흔적도 여기에 있다. 카스트로는 그토록 존경하는 호세 마르티 곁에 잠들고 싶어 여기에 묘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카스트로 자신의 무덤은 그저 바위덩이 하나만 달랑 세워, 바위에 홈을 파서 화장한 자그마한 유골함을 넣어 놓고, 유골함 홈을 가린 녹색 동판에는 카스트로 이름인 ‘FIDEL’ 다섯 자만 있을 뿐이다. 바윗돌에는 새겨 놓은 글이 전혀 없다. 죽음 뒤에 더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최고 권력자였다.


나는 쿠바를 답사하는 동안에 자신에게는 소박하게 하면서도, 선배와 동료 후배에게는 최대한 예의를 표한 카스트로의 처세가 참 돋보였다. 


묘지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묘지 담장에 큰 간판이 보였다. 무언가 중요한 표어인 것 같아 일단 사진을 찍었다.


PATRIA ES HUMANIDAD


나중에 이 스페인어 뜻을 가이드에게 물으니 이렇다. PATRIA=조국, ES=…이다, HUMANIDAD=인류.


‘조국이 인류’인지, ‘인류가 조국’인지 그렇다 치고 이런 표어를 내걸 수 있다는 게 쿠바 혁명의 품격을 말해 주는 증거라고 생각하니 쿠바의 혁명 정신이 엄청 부러웠다. 이 표어는 호세 마르티의 말씀이라 했다.


“나는 세상의 가난한 이들에게 내 운명을 걸고 있다.”


이는 호세 마르티가 쓴 유명한 시 「소박한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가난한 사람과 운명을 함께한 사람이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바로 전태일 열사가 남긴 세 번째 유서에 있는 이 구절만큼 말이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산타 이피헤니아 묘지. (사진 위)두세 평 크기의 둥글고 납작한 바위만 달랑 세워 놓은 것이 피델 카스트로의 무덤이었다. 바위 한 가운데에 화장한 유골을 안치하고 쑥색 바탕의 금속판으로 덮었다. 금색 알파벳 5자 'FIDEL'만 있다. 더 이상 장식이나 문구가 없다. 피델의 무덤 뒤에는 웅장한 조형물이 있고 그 안에 호세 마르티의 무덤이 있다. (사진 아래) 묘역 입구에는 '조국은 인류다(PATRIA ES HUMANIDAD)'란 표어 간판이 있다.(사진


“너는

나의 나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모란공원묘지’가 있다. 여기에는 전태일 열사뿐만 아니라 조영래 변호사, 이소선 어머님, 문익환 목사님 등 수많은 민주지사의 묘가 있다. 산타 이피헤니아 묘지와 같은 엄숙한 공간이다.


모란공원묘지는 우리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성역이다. 남한 땅에서 5·18묘역과 함께 웅혼한 혼을 담은 가장 엄숙한 공간이다.


나는 2018년 쿠바에 다녀온 후 모란공원묘지에는 어떤 정신을 담은 표어가 좋을까 죽 생각해 봤다. 전태일 열사의 묘 앞 흉상은 언제나 ‘단결, 투쟁’이란 머리띠를 두르고 있다. 이를 넘어 전태일의 인류애적인 정신 크기를 나타내는 표어로는 무엇이 적합할까?


전태일 열사의 유서 가운데 “너는 나의 나다”는 구절에서 절절한 이웃 사랑을 느꼈고 나아가 웅혼한 인류애가 담겨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너는 나의 나다.”


너무 추상적인가? 순 내 생각이다.


(사진 위) 모란 공원 내 전태일 열사의 묘, 바로 뒤에 이소선 어머니 묘소가 있다.(사진 아래) 조금 떨어진 앞쪽에 조영래 변호사의 묘가 있다.(사진제공= 송필경)




★ 이 글은 〈건치신문〉에 연재된 글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