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30

분신, 그 숭고한 불길 2

저자소개

송필경
치과의사. 대구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베트남평화의료연대 대표이사.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공동대표. 펴낸 책으로 《제국주의 야만에 저항한 베트남 전쟁》 《지난밤 나는 평화를 꿈꾸었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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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공양 이후 탄압은 더해지고


지엠 정권 각료들은 대책 마련을 서둘렀다. 타오르는 스님의 모습은 전 세계 신문지면에 머리기사로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충격을 받고 전율했다. 그리고 베트남 국내에서는 ‘영원의 심장’에 대한 열기가 번져갔다. 지엠은 매우 당황했다. 이대로는 미국 정부의 지원을 못 받게 될지도 몰랐다. 우선 '영원의 심장'을 어떻게든 없애야 했다. 그래서 비밀경찰 두목을 싸러이사로 파견했다.


두목은 ‘영원의 심장’에 황산을 뿌렸다. 하지만 심장은 녹지 않았다. 비취처럼 단단해졌고, 비밀경찰이 그 심장을 가져가려고 했다. 승려들은 '영원의 심장'을 지키기 위해 금속 용기에 담아 구리줄로 단단히 봉인하고 나서 사이공 시내의 스웨덴 은행에 맡겼다. 거기라면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다. 베트남전쟁이 끝나자 하노이 국립은행으로 옮겼다. 지금은 사이공호찌민시에 돌아와 카이 호이 다라 근처에 있는 국립은행에 보관하고 있다.


꽝득 스님 소신공양 이후 정부의 탄압은 더 심해졌다. 8월 21일 계엄령이 내려진 한밤중, 특수부대가 베트남 각지의 절을 습격하여 1,400명에 달하는 승려들을 일제히 체포했다. 훼에서는 백 명에 가까운 승려와 불교도들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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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태평하고 국민이 안락하기를 기도합니다”


꽝득 스님! 농민의 아들이 일곱 살에 출가해서는 올곧고 정직하고 진지한 승려가 되었다. 1963년, 스님은 예순여섯의 노령임에도 불교도들의 데모나 단식에 참여했다. 5월 초 탄압은 더욱 과격해지고 훼에서는 잔인한 학살이 일어났다. 스님은 훼에서 있은 학살을 두고 말씀을 남겼다.


“이 가슴 아픈 사건을 앞에 두고, 베트남공화국 헌법과 응오 딘 지엠 대통령이 주장하는 민주법치, 공동공진 사회의 노선에도 명기되어 있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그 이상을 위한 투쟁에 베트남 불교도는 일어서야 한다.


정리情理에 맞는 투쟁을 위해, 규율을 지키고 비폭력적인 온건하게, 베트남 불교 승려들은 이 베트남 불교에서 일찍이 없었던 국면을 맞이하여, 투철한 의지를 가지고 진정한 의사 표현을 해야 한다.”


5월 27일 스님은 베트남 통일불교회에 스스로 몸을 불사르겠다는 '소신공양 청원서'를 제출했다. 통일불교회는 지도자 열다섯 명의 지도자가 있다. 이들이 최종 결정을 한다. 분신 허가를 신청한 청원서는 이 지도자들에게 제출했다.


스님은 지엠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나, 비구 꽝득은 관태음사 주지입니다. 우리나라 불교가 고난의 때임을 보고, 수행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불교가 멸망해가는 것을 좌시할 수 없어 이 한 몸 불살라 불교를 지키는 공덕을 행할 수 있기를 기꺼이 청합니다.


(……)


나라가 태평하고 국민이 안락하기를 기도합니다. 눈을 감고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감히 응오 딘 지엠 대통령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박애와 자비의 마음으로 국민을 위해 종교 평등의 정책을 실행하고, 그리하여 영구적으로 나라를 지키도록 말입니다.


나는 승려와 불교도들에게 진심으로 청합니다. 불법을 지키기 위해 일치단결해야 합니다.


나무아비타불

사이공, 1963년 6월 4일

비구 꽝득 올림”


스님은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내가 불타서 만약 뒤로 쓰러져 하늘을 보면 우리들의 투쟁은 성공하고 평화가 올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엎드려 쓰러지면 불길한 징조이니, 그때는 해외로 도망하라.”


제자들은 다짐했다.


“스님의 희생을 개죽음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아시아인 단 한 사람의 정신력으로 전 세계를 떨게 만드는 것이 우리 역할이다.”


스님은 분신의 목적을 단 한 줄로 적었다.


“우리들의 입장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 이 몸을 불사른다.”


남베트남 정부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유린해 오는 미국에 항의하기 위해 가솔린을 뒤집어쓰고 제 몸을 불사르기로 결심했다.


꽝득 스님이 대통령에게 보낸 청원문과 제자들에게 한 당부는 전태일이 대통령에게 보낸 ‘인간 최소한의 요구’란 내용의 호소문과 청계천 노동자 동료에게 한 당부와 너무나 닮지 않았는가.


꽝득 스님 제자들은 ‘스님 희생을 개죽음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이는 전태일의 마지막 유언인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와 너무나 닮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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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제자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다


서구 언론은 물론 전 세계가 경악했다. 


서양인들은 분신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폭력적 행위로 볼 수밖에 없었다. 분신이 의미하는 커다란 사랑과 희생적인 정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소신공양은 대승불교 경전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성스러운 『법화경Lotus Sutra』의 극적인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23장에서 보살, 즉 깨달은 존재는 붓다에 대한 열렬한 희생으로 자신의 손가락과 발가락, 팔을 태우고 그리고 끝내는 자산의 신체 전부를 태운다.


“이것은 참다운 법으로써 여래를 공양하는 길이다. 나라를 다 바치고 처자로 보시하여도 이것이 제일의 보시다”라고 했다. 따라서 소신공양은 모든 종교 행위 가운데 가장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틱 꽝 득 스님과 다른 사람들의 희생은 대승불교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만이 온전히 헤아릴 수 있는 의미를 갖는다.


개인적인 좌절이나 절망을 이기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자살하고도 다르다. 프랑스에서 국제 참여불교 운동의 지도자로 주목받는 활동을 펼친 낫 한 스님Thich Nhat Hanh; 1926〜은 당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에게 편지를 썼다.


“1963년 베트남 스님들의 소신공양은 서구 기독교적 도덕 관념이 이해하는 것과는 아무래도 좀 다릅니다. 언론들은 그때 자살이라고 했지만, 그 본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저항 행위도 아닙니다. 분신 전에 남긴 유서에서 그 스님들이 말하는 것은 오로지 ‘압제자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그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 목적이며, 베트남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 세계 이목을 집중하게 하는 목적입니다.”


꽝득 스님의 소신공양은 힘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없애려는 데 가장 큰 목적이 있었다. 꽝득 스님의 분신은 현대 불교의 사회적 정치적 특징을 강력하게 드러냈다. 화염 속에서 죽어가며 좌선하고 있는 승려 모습을 통신사와 텔레비전이 보도했고, 이어 36명의 다른 스님들과 1명의 재가 여성 신도가 분신함으로써, 지엠 정권을 향한 불교도들의 고통과 저항의 메시지를 전 세계 사람들 마음에 깊이 새겼다. 그러나 이들 죽음의 불교적 의미를 대부분의 서구 시청자와 논평가들은 놓쳤다.


승려가 정치적인 저항에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었을까? 이 스님들은 대중들의 감정을 대변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극단적인 행동가들인가? 자기 몸을 바치는 것이 전통적인 수행의 하나였는가 아니면 정도를 크게 벗어난 것인가?


베트남의 대승불교에서 전통적으로 비구계를 받으려는 사람은 승가의 250계를 준수하겠다고 맹세하면서 작은 점 크기로 자신의 신체를 태운다. 이는 격렬한 고통을 경험하면서 말한 맹세는 ‘마음의 모든 진지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더 큰 무게를 가질 것이다’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의 자유와 평화를 되찾으려는 불교인들의 행동 동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은 불교인들이 정치적 목표와 종교적 목적을 하나로 봤기 때문에 이들이 언제든 공산주의자와 연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불교계는 남이나 북, 또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았다. 불교계의 가장 큰 목적은 힘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없애주자는 데 있었다.


8

세계에 알려진 베트남의 참혹한 실상


지엠 대통령의 친동생이자 비밀경찰 총수인 응오 딘 누의 부인 '마담 누'는 온갖 사치를 누리면서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까지 휘둘러 국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그런 ‘마담 누’가 승려들의 분신을 보고 “중의 바베큐라니, 재미있네. 하지만 그 중은 모순이야, 반미라면서 미제 가솔린을 사용했잖아.” “그래 봐야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바비큐들”이라는 독설을 외신기자들에게 퍼부었다. 결정적인 악수였다. 이 망발이 전 세계 언론을 탔고, 이를 듣고 분노한 시민과 학생 데모대가 날마다 사이공을 휩쓸었다.


베트남의 혼란은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미국이 감춘 베트남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이 그토록 꺼려했지만, 이 사건으로 베트남 문제가 비로소 유엔에 상정됐다.


케네디 정권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일어난 지 1년도 채 안 되었고, 앨라배마주에서는 흑인데모가 막 일어났다.


그런 시기에 분신을 계기로 남베트남이 펄펄 끓는 기름 솥이 되었다. 미국은 지엠 정권을 밀어주는 게 헛일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미국은 결국 지엠 정권을 단념하고 베트남에 직접 개입하기로 했다.


1963년 11월 1일 CIA가 면밀하게 배후 조종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지엠은 대통령 궁에서 도망쳐 중국인 거주 지구에 숨어 있다가 들켜 자신의 경호원에게 살해당했다. 다음날 지엠은 피투성이 사체로 승용차 트렁크에 처박혀 있었다. 동생 누도 살해당했다.


20일 뒤인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도 댈러스에서 총격을 당해 죽었다. 베트남전쟁 개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케네디도 11월 22일 겨우 1,000일의 임기만 채운 채 암살당했다.


그러나 ‘마담 누’는 금은보화를 이고 지고 사이공을 탈출하여, 파리에서 은밀하게 살다 수를 다하고 죽었다.


9

약자를 사랑한 이유로, 강자에게 죽음을 선물로 받았다


베트남 스님의 자기희생 메시지는 양심적인 서구인에게 자신들의 교회사를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얀 후스Jan Huss; 1370∼1415는 체코의 신학자이자 종교 개혁가였다. 성서만을 유일한 권위로 인정했다. 왕족들의 사치를 혐오하고 고위 성직자들의 세속화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성직을 사고파는 로마 교황청에도 반기를 들었다.


이 순수한 민중의 전도사는 ‘약자를 사랑한 이유로, 강자에게 죽음을 선물로 받았다.’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에 불려가서 이단적인 발언을 취소할 것을 요구받았으나 거절하자 화형을 당하였다. 얀 후스는 사자후를 외치듯 유언을 남겼다. 


“오늘 당신들은 볼품없는 거위를 태우지만, 100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당신들이 영원히 태워 없앨 수 없는 백조의 노랫소리를 듣게 될 것이오!”


이 유언은 곧 예언이 되었다. 100년이 흐른 뒤 마틴 루터1483∼1546가 나타나 1517년 로마 교황청이 면죄부를 마구 파는데 격분하여 이에 대한 항의서 95개조를 발표했다. 이 사건은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개혁의 불을 댕겼다.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는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수도사였다. 수도원에서 정통 신앙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수도원에서 나와 유럽 여러 나라 대학에서 다양한 학식을 쌓았다. 브루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했다. 이 때문에 이단으로 몰리자 칼뱅주의가 지배하던 스위스로 도망갔다. 그곳에서 만난 칼뱅주의 역시 가톨릭에 못지않은 교조주의에 빠져 있는 것을 보았다.


자신만이 옳고 결코 자신의 편견을 고치지 않는 자들을 브루노는 참지 못했다. 신앙에 따라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칼뱅주의에 반대하여 인간의 모든 활동은 존엄하다고 주장했다. 브루노는 신교와 구교 모두에게 이단으로 몰려가는 곳마다 추방당했다.


브루노는 결국 로마 종교 재판소에 끌려가 로마 교황청 소속 감옥에서 7년간 보냈다. 신념을 포기하라는 강압에 몹시 시달렸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자신의 신념이 그르지 않음을 이해시키려 했다.


같은 지동설을 믿었지만 과학자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에서 신념을 철회했고, 신학자 브루노는 신념을 꺾지 않았다. 교황은 회개할 줄 모르는 고집 센 이단자에게 화형을 명령했다. 브루노는 죽음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았다.


“선고를 받은 나보다 선고를 내리는 당신들이 더 두려울 것이오”라는 말을 남기고 입에 재갈을 물린 채 불에 타 죽었다.


세월이 흘러 1899년에 작가 빅토르 위고, 입센, 무정부주의자 바쿠닌 등이 사상의 자유를 위해 순교한 브루노 동상을 건립했다. 브루노가 화형당한 로마의 캄포 데 피오리 광장에 세웠다. 브루노 동상에는 다음의 글귀를 새겼다.


“브루노에게

그대가 불탐으로써 그 시대가 성스러웠다.” 


서구인들이 꽝득 스님에게 감동한 것은 서구 역사에서 얀 후스나 브루노 같은 양심의 신학자를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통닭구이를 만든 경험은 있어도, 자신들의 역사에서 신념으로 스스로 몸을 불태우는 인물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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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가 불탐으로써 우리 시대가 성스러웠다


우리에게 분신의 가장 강렬한 기억은 1970년 11월 13일 무지렁이 노동자 전태일 분신이다. 열사의 마지막 유언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였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외침은 자본주의 노동 착취에서 벗어나려는 각성이었다. 인간을 생산도구인 기계로 취급하는 근로기준법의 무시는 치명적인 사회질서라고 전태일은 확신했다. 이로써 한국 노동운동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어린 여공이 겪고 있는 참혹한 현실을 예리한 관찰력과 심오한 통찰력으로 남한 자본주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밝혔기 때문이다.


전태일은 여공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단순히 동정하는 시선으로 바라본 게 아니었다. 사회적 약자들이 한갓 기계 취급당하며 빼앗긴 인간의 존엄을 되찾을 수 있게 우리 사회가 법을 지키라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전태일의 진정한 위엄은 노동해방을 넘어 인간해방을 간절히 바란 점이다. 이는 모든 인간을 향한 숭고한 연민이었다. 우리가 전태일을 "투쟁과 단결"이란 틀에만 가두면 전태일의 정신을 협소하게 하거나 그 정신에 내재하는 풍부한 자산들마저 도외시하게 된다.


전태일 분신의 큰 뜻은 7년 전 베트남 꽝 득 스님의 분신과 아주 비슷했다. 비슷한 시기에 한 사람은 제국주의 침략에 신음하는 민중, 다른 사람은 자본주의 착취에 신음하는 민중, 이런 민중의 처지를 바라보면서 두 사람은 같은 고민을 했다. 압제자와 착취자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 말이다.


전태일은 어떻게 베트남 스님과 사유의 과정이 비슷했을까? 왜 이 두 사람은 죽음의 방법에 대해 같은 결론에 이르렀을까? 이는 동시대 이웃의 아픔을 따뜻하게 보듬으면서 고통받는 민중과 더불어 구원을 얻는 삶을 원했기 때문이었을까?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몸을 던져 후세에 큰 뜻을 길이 남긴 살신성인, 그 원조는 썽자오僧肇, 384∼414라는 중국 진나라의 승려다. 썽자오는 공사상空思想을 크게 떨쳐 중국 선종禪宗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중국 불교계의 최대 천재라고 불린다. 썽자오는 자신의 총명을 탐낸 왕이 환속하여 재상을 맡아 달라 간곡히 요청했음에도 끝까지 거절했다. 영민한 썽자오가 혹시 다른 나라로 갈까 봐 두려워한 왕의 노여움으로 참수형을 당하는데, 멋진 시 한 수를 남기고 31세의 나이로 홀연히 사라졌다.


사대원무주四大元無主

오음본래공五陰本來空

장두임백인將頭臨白刃

유사참춘풍猶似斬春風


세상은 원래 주인이 없고

몸은 본래 빈 것이다.

머리를 흰 칼날에 갖다 대어도

이는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을 뿐이다.


*사대=地․水․火․風: 모든 물질을 조성하는 사대원소.

*오음=色;육체, 受;느낌, 想;생각, 行;의지, 識;의식, 즉 우리 몸.


몸은 본래 빈 것이므로 칼날이 내 목을 스쳐도 그것은 바람이 스치는 것과 같다, 생사를 달관한 이 멋진 시구의 의미를 교토대학京都大學 카지야마 유이찌梶山雄 교수는 이렇게 평했다.


“중관中觀 사상가들의 생애는 그들의 철학과 명상이 보여주고 있는 절대 정숙과는 매우 다른 광란에 넘친 생애였다. 중관 사상의 변증은 그것이 전해주고 있는 공의 세계가 청명한데도 불구하고 논리는 불꽃과 같이 치열했다. 이 세계를 꿈과 환상으로 본 중관 사상가들이 현실에서 본 것은 산림 속의 한적한 생활이 아니었으며, 추악한 인간세의 악몽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결코 중관 사상의 본질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다. 악몽의 아픔을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이 세계를 꿈과 환영으로 보는 것이 가능한가?”


민중의 추악한 악몽을 온몸으로 불사른,

베트남 꽝득 스님!


“스님이 불탐으로써 그 시대가 성스러웠다.”


고통에 시달리는 어린 여공을 위해 살신성인 정신을 계승한

우리 노동자 청년 전태일!


“열사가 불탐으로써 우리 시대가 성스러웠다.”


유사참춘풍猶似斬春風,

내 목에 칼이 스쳐도 그것은 봄바람이 스치는 것일 뿐!

 

★ 이 글은 〈건치신문〉에 연재된 글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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