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30

분신, 그 숭고한 불길 1

저자소개

송필경
치과의사. 대구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베트남평화의료연대 대표이사.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공동대표. 펴낸 책으로 《제국주의 야만에 저항한 베트남 전쟁》 《지난밤 나는 평화를 꿈꾸었네》가 있다.

AP통신 사진기자 말콤 브라운Malcom Browne이 찍은 분신 장면 사진. 격렬한 불꽃 속에서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이 가부좌 자세를 취한 스님의 모습을 촬영해 1963년 퓰리처상을 받았다.(사진제공= 송필경)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 청계천 평화시장,

사람의 몸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노동자 전태일이 스스로 몸을 태우면서

세상에 외친 불꽃이었다.

이 분신의 불꽃은 우리 사회에서

가난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이

존엄을 빼앗긴 단순한 기계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떤 외침이 있었던가를 보여준 숭고한 예였다.

1977년 가을, 시국 사건 수배자 조영래는

청계천 평화시장 일대에서 숨어 떠돌 때

자신의 장편시 『노동자의 불꽃; 아아, 전태일』을

이렇게 시작했다.


 저

 처절한 불길을 보라

 저기서 노동자의

 아픔이 탄다

 저기서 노동자의 오랜

 억압과 죽음이 탄다

 아하, 노예의 호적은 불살라지고

 끝없는 망설임도 마침내 끊겨버린

 저기서

 노동자의 의지가

 노동자의 저항이

 노동자의 자유가

 불타오른다.


1970년에 무지렁이 노동자가 몸을 불살랐고,

1977년에 당대 최고 지성인이 불멸의 불꽃이 된 영혼에 시를 바쳤다.


1

불의 바다에 핀 연꽃


전태일 열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분신’이다. 분신焚身은 ‘자기 몸을 스스로 불태움’을 말한다.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은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한 수단으로 자기 몸을 불살랐다.


전태일 열사는 왜 분신을 택했을까?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말이다. 여러 자료를 찾아보아도 전태일 열사가 수단으로써 분신을 선택한 ‘왜’를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1963년, 베트남에서 ‘꽝득’이란 스님이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하려 하는데 항의하는 분신을 감행했다. 이 뉴스는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1955년생인 나도 이 분신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1948년생인 전태일 열사도 이 뉴스를 보았을까?


2001년부터 내가 베트남 전쟁사를 들여다보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충격을 받은 사건이 베트남 스님의 분신이었다.


나는 전태일 열사가 베트남 스님 꽝득의 ‘분신’을 알고 있었으리라 짐작만 했을 뿐 전태일 열사가 이 분신을 언급한 기록을 찾지 못했다.


요즘 여러 자료를 찾아보니, 전태일 열사는 죽음을 결단한 후 맹렬하게 기도에 매달렸다. 분신은 기독교에서 환영받는 선택은 아니라고 나는 알고 있다. 기독교 사회에서 사람 몸을 태우는 것은 중세 시대 마귀들에게 행하는 형벌로 기능했다. 현대 서구인들은 미국의 극우 인종차별 단체인 KKK단이 흑인을 나무에 매달아 불태우는 잔인한 범죄인 린치사형, 私刑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자신의 몸을 태워 부처님에게 바치는 일을 성스러운 행위로 여긴다.


기독교와 불교의 종교 차이를 넘어 꽝득 스님 분신과 전태일 열사 분신은 거룩한 ‘무엇’을 공유하고 있지 않았을까.


꽝득 스님이 분신할 무렵 베트남의 사회 분위기와 스님의 분신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의미에 더 명확히 다가가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베트남과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외세가 강제한 남북분단과 동족상잔이란 너무나 닮은 시대 아픔을 모질게 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세에 의지한 독재체제에서 신음한 민중의 고통이 서로 다를 바가 없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동병상련同病相憐!


네거리 한가운데 스님이

홀로 불길 속에 반듯이 앉아 있다.

불길은 스님 몸을 에워싸고

공중으로 활활 타오른다.


스님 몸에 붓다가 흐른 휘발유로

스님 주변도 불바다를 이루었다.

뒤에는 휘발유를 담았던 빈 통이 있다.

스님은 그런 불길 속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스님을 중심으로 한 네거리에는

많은 스님들이 빙 둘러 있다.


불길이 스스로 서서히 꺼지자

스님의 숯덩이 몸이 드러났다.

스님의 가부좌 자세는 그대로였다.


1963년 6월 11일 오전 10시,

사이공 시내 한 네거리에 있은 분신,

뒤에 역사는 스님의 분신을 이렇게 일렀다.


“불의 바다에 핀 연꽃Lotus in a Sea of Fire.”


뉴욕타임스 베트남 특파원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의 목격담이다.


“나는 그 광경을 다시 볼 수도 있었지만 한 번으로 족했다. 불꽃이 솟구치더니 몸이 서서히 오그라들면서 머리는 새까맣게 타들어 갔고, 사람 살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놀라울 정도로 몸은 빠르게 불탔다. 내 뒤에 모여든 베트남 사람들은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너무나 충격을 받은 나는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극도로 혼란스러워 메모를 작성하거나 질문을 던질 수도 없었다.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 가면서도 ‘틱꽝득’은 미동은커녕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이 울부짖는 주위 사람들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었다.”


한 여승은 그날, 자신의 오토바이를 타고 그 십자로를 지나던 참에 정말 우연하게 스님의 분신자살을 목격했다.


“꽝득 스님은 화염에 휩싸여서도 용감하고 온화한 얼굴로 평화롭게 앉아 계셨습니다. 인도에 엎드려 울부짖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스님은 완전한 부동자세였습니다.”


베트남 마지막 왕조의 수도였던 중부지방의 도시 훼Hue에 ‘티엔 무 사Thien Mu Pagoda, 天母寺’가 있다. 이 사원 중간에 있는 한 건물에 꽝득 스님이 이 절에서 사이공까지 타고 간 영국제 녹슨 하늘색 오스틴 승용차와 스님의 여러 사진이 전시돼 있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가장 존귀한 꽝득 스님은 1963년 6월 11일, 이 차를 타고 엉 꽝 사에서 판 딘 퐁 거리와 레 반 주엣 거리의 교차로로 갔다. 가장 존귀한 스님은 차에서 내려 곧바로 연화좌로 앉아, 불교도를 차별하고 종교적 자유를 모독하는 응오 딘 지엠 정권의 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자신을 불살랐다.


2

누구나 시를 짓는 정감이 넘치는 민족


푸른 벼가 바다처럼 펼쳐 있는,

풍요롭고 비옥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인구 8할 이상이 오랜 대승불교를 믿는 나라,

외세에 저항할 땐 치열하지만,

평소는 유순하기 그지없는 민족.

예술에 재능 있고 예술을 사랑하며 특히,

누구나 시를 짓는 정감이 넘치는 민족.


그 땅, 그 민족의 몸에서 화염을 내뿜는

과격한 사상이 어떻게 나왔을까? 


1954년, 베트남은 자신들을 백 년간 식민 지배한 프랑스를 물리쳤다. 아시아의 작은 나라가 유럽 식민 본국을 무력으로 무찌른 것은 인류 역사에서 처음이었다.


승리한 베트남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열린 제네바 협상에서 인민의 투표를 통해 스스로 정부를 택할 당연한 권리를 찾았다.


호찌민 정부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을 것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미국은 사회주의 정권의 탄생을 용납할 수 없어, 제네바 협정을 어기고 1955년 베트남을 강제로 남북으로 갈랐다. 베트남은 얼토당토않았지만, 힘이 없었기에 오만하고 편협한 미국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베트남은 그 뒤 무력으로 침략한 미국을 수렁에 빠뜨려, 1975년에 민족통일을 이루면서 미국의 힘의 논리에 커다란 상처를 입혔다.


1955년, 미국은 베트남을 분단한 후 북쪽 호찌민 정권에 대항할 남쪽 괴뢰 정권을 급조했다. 미국이 선택한 인물은 칭찬할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응오 딘 지엠Ngo Dinh Diem, 1901~1963이었다.


한반도에 골수 친미 반공주의자 이승만을 세워 재미본 것처럼, 1955년에 미국은 남베트남에 이승만과 여러모로 닮은 지엠을 대통령으로 앉혔다. 민족주의자로 자처한 지엠 또한 철저한 친미 반공주의자이며 겉은 반프랑스 탈을 썼지만 프랑스 식민에 협력했던 인사들로 정부를 꾸렸다.


지엠의 통치는 이승만,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 이 셋의 악행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잔혹하였고 또한 그 부패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엠의 동생 응오 딘 뉴는 직함이 단지 대통령 고문이었지만 실제로는 배후권력을 장악했다. 당시 CIA 자금으로 편성된 특수부대가 남베트남에 파견되어 있었다. 뉴는 그 특수부대를 자신의 사병으로 부렸다.


뉴의 아내 ‘마담 뉴’는 사실상 퍼스트레이드 노릇을 했다. 시아주버니인 지엠이 독신이었기에 마담 뉴가 베트남의 여왕으로 군림했다.


정부 요직은 지엠 친척 차지였다. 지엠 일족은 가톨릭 신자였다. 형은 가톨릭 대주교 응오 딘 툭이었다.


베트남은 인민 8할 이상이 불교 신자다. 지엠과 정부 고위층들은 식민지 시절 프랑스 교육을 받은 탓에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다. 권력과 부를 극소수 가톨릭이 독점했다.


3

민족 독립과 자유를 위한 투쟁


지난 이천 년 동안 외세에 저항한 베트남 역사에는 거대한 강이 있으니, 수많은 항쟁의 격언과 믿음이 흘러들어 왔다. 선조들의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거대한 강은 언제나 신선한 피로 붉게 물들었다.


베트남은 백 년 동안 프랑스 식민 지배를 받았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이 점령했다. 베트남은 일본이 항복하기 전부터 군사 공격해 연합군이 베트남에 들어오기 전에 일본군 무장을 해제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미국의 도움으로 다시 침략한 프랑스와 약 10년 동안 처절하게 싸웠다. 프랑스가 물러난 자리에 미국이 들어오자 소중한 ‘민족의 독립과 자유’가 짓밟히고 땅은 두 조각으로 찢겼다.


20세기 후손들은 선조의 숭고한 저항 역사를 결코 잊지 않았다. 미국의 지배를 받는 남베트남 민중의 저항은 거셌다. 때문에 남베트남의 수많은 감옥에는 정치범이 10만 명에서 15만 명을 헤아렸다. 한 감옥에서는 정치범 약 5천 명에게 독약을 탄 음식을 먹였고, 그래도 살아남은 자들에게 총탄 세례를 퍼부었다.


남베트남 민중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르자 무장 게릴라를 조직했다. 1960년 12월 20일, 북베트남과 아무 관계없는 자발적인 전사들이 모여 '민족해방전선'을 만들었다. 미국이 ‘베트콩’이라고 비하한 이 무장 단체가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괴뢰정권을 곧 무너뜨릴 듯 위협했다.


갓 취임한 미국 대통령 케네디는 미국 재산을 몰수한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1961년 쿠바를 침공했다가 처절하게 굴욕을 당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어떻게 해서든 남베트남을 사수해야 했다. 혹시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젊은 케네디는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케네디는 남베트남에 무력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고 괴뢰정권에 무기 공급을 확대했다. 미국이 압도적인 무력으로 침략하자 남베트남 민중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세계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흘려보내는 정보의 장막에 가려져 베트남 민중의 고통의 실상을 전혀 알 수 없었다.


4

베트남의 영원한 심장


몸을 불사른 스님은 틱꽝득釋廣德, Thich Quang Duc.

은 스님이라는 뜻이고 꽝득廣德은 법명이다.

우리말로 하면 광덕 스님이다.

원 이름俗名은 람 반 팟林文發, Lâm Văn Phát이다.


1897년 베트남 중부 아름다운 해변마을 나짱에서 농민의 아들로 출생했다. 일곱 살에 출가해서 남베트남 각 지방에 포교하며 평생 30여 개의 절을 건립한 인물이었다.


부와 권력을 손아귀에 쥔 베트남 가톨릭 세력은 불교를 탄압했다. 많은 사찰을 닫게 하고 승려를 해산했다. 이는 정권 부패를 비판하던 불교계에 대한 보복이었다. 


지엠 일족은 베트남을 가톨릭 나라로 만드는 것을 사명이라 믿고, 저항하는 불교도를 모조리 체포해서는 갖은 고문을 했다. 절을 봉쇄하고 수돗물과 전기 공급, 심지어 음식까지 차단했다. 남베트남 각지에서는 불교도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부 젊은 승려들은 게릴라전을 펼치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과 물밑에서 조용히 연대하고 있었다.


아, 불교도들의 무장 투쟁에 찌푸린 눈길을 보낼 필요는 없다. 임진왜란 때 우리 땅의 불교 승려들이 조직한 승군僧軍을 기억해 보라!


1963년 5월 1일부터 9일까지 부처님 오신 날 기념행사가 열렸다. 베트남에서는 가장 신성한 날이다. 그런데 성모 라벤 교회의 낙성식과 시기가 겹쳤다. 그 행사에는 응오 딘 지엠 대통령과 동생 뉴 고문 부부, 형인 툭 대주교가 참석키로 했다. 그 교회에 가려면 베트남 중부 도시 훼를 통과해야 했다. 훼는 마지막 왕조의 수도였으며 베트남 불교 중심지다.


훼 거리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저게 뭔가?”하고 대통령이 물었다. “불교의 상징입니다”고 수행원이 대답하자, 곧바로 전국의 불교 깃발을 내리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깃발을 내릴 수 없었다. 항의 데모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훼 시민들의 불만과 저항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훼 시장은 깃발을 올려도 된다고 라디오 방송에서 약속했지만, 결국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을 바꾸었다.


5월 8일 불교 깃발을 걸고 가는 긴 행렬을 향해 군의 장갑차가 돌진하며 발포했다. 우리 5.18과 비슷했다. 14명이 중상을 입고 8명이 죽었다. 아이들도 장갑차에 깔려 죽었다. 여덟 명의 영정은 사이공으로 옮겨져 싸러이사에 공양되었다. 사이공 거리는 마치 들끓는 기름 가마 같았다.


불교 데모는 점점 격렬했다. 군은 물대포를 쏘고 최루탄을 던졌지만 진압하지 못했다. 데모의 선두에 선 것은 젊은 승려들이었다. 그들은 비폭력으로 일관하겠다는 맹세를 했다.


그런 상황에서 꽝득 스님은 자신의 몸을 스스로 불태우는 소신공양燒身供養, Burning Service를 결심했다.


아침 10시 꽝득 스님은 십자로에 앉아 불길에 휩싸이면서 15분 동안 미동도 없었다. 그리고 천천히 하늘을 향해 쓰러졌다. 양손 손가락으로 감로인甘露印 표시를 한 채였다.


스님의 유해를 불교 깃발에 싸서 ‘싸러이’사로 옮겼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군대가 출동해 싸러이사를 가시철이 박힌 철조망으로 봉쇄했다. 비가 내리고 천둥 번개가 쳤다. 사람들은 흠뻑 젖은 채 언제까지고 돌아가지 않았다. 싸러이사 본당엔 관을 준비했고, 검게 탄 유해를 천에 싸고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찻잎을 넣어 두었다.


다음날 싸러이사에는 10만 명의 군중이 모였다. 일터며 가게며, 학교를 일제히 쉬고 물처럼 몰려들었다. 6월 20일 이른 아침, 광득 스님의 유해를 화장터로 옮겼다. 부패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은 들끓었다. 관에 다이너마이트가 장치돼 있다는 소문까지 퍼졌지만, 화장터까지 이어지는 7km의 길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화장터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9시였다. 아침이 이른 베트남에서는 이미 점심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꽝득 스님의 유해를 소각로에 옮겨 디젤 연료를 사용한 4,000도의 불로 6시간 태웠다. 그런데 심장만은 타지 않았다. 다시 연료를 보충하여 오후 3시에서 오후 5시까지 태웠으나 심장은 타지 않았다. BBC나 보이스 오브 아메리카는 ‘영원의 심장Eternal Heart’이라고 보도했다. 스님의 심장을 싸러이사에 안치하기로 했다. 또 사람들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모두가 울면서 ‘영원의 심장’을 우러렀다. 


아, 이게 현대 신화인가?

★ 이 글은 〈건치신문〉에 연재된 글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