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9

달달한 시절이 온다

저자소개

유종순
독서동아리 ‘달달한 언니들의 구름수다’ 회원


우리는 2021년 2월 28일 첫 모임을 했다. 막 봄이 오려던 때였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에 따뜻한 차와 함께 시작된 모임이었다.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는 연령대가 달랐던 우리 모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중이었다. 쓰여 있는 내용은 세월호 참사에 관한 것이었고, 우리는 각자의 옳음을 인정받고 싶다는 말로 읽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데 옆에서 아버지께서 열심히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계신 게 보였다. “혹시 같이 앉아서 얘기 나누시겠어요?” 했는데, 아버지께서 선뜻 우리의 옆자리에 앉으셨다. 그렇게 다섯 명이 되었다. 뒤에 소개하겠지만 여섯 번째 회원은 그때도 지금도 같이 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47년 전에 시작된 팀이다. 그때는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우리를 불러주셨다. 20년 동안 재밌는 책과 따뜻한 차보다, 재미없는 교과서와 성적표를 사이에 두고 심한 훈계와 때로는 밥을 못 먹는 벌을 받으며,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모임은 잘 운영이 안 되면 회원들끼리 의견을 나누고 회칙을 다시 세우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인데 아버지의 독재로 20년간 같은 회칙으로 나아갔다. 나이가 어린 회원들은 스무 살이 되면서 각자의 길을 갔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다시 모였다. 그때의 어린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그리고 이름도 ‘동해연립 유씨네 가족’이 아닌 ‘달달한 언니들의 구름수다’로 다시 간판을 달아서 모임을 시작했다. 우리 모임은 여자 다섯, 남자 하나이다.


어머니께서는 평생 책 한 권 읽을 시간을 내지 못하고 사셨는데 신기하게도 가장 모임에 적합한 분이시다. 발제자의 발췌 내용을 쉽게 이해하시고 평소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얘기를 잘 풀어가신다. 듣고 있으면 참 재미있다. 너무 자기 얘기에 심취하지도 않고, 적당한 길이로 말씀하셔서 나무랄 데 없는 회원이시다. 단, 책을 전혀 읽어오시지 않는다. 낭독할 때 글자도 자주 틀리게 읽으신다. 그런데 지금은 많이 나아지셨다. 평생의 짝꿍이신 아버지께서 틀린 글자를 고쳐 주신다. 책만 보면 머리가 아파지신다더니 모임을 하는 날 낭독과 의견 내기는 참으로 잘하신다. 언젠가 어머니가 진짜 재밌어서 찾아 읽으시는 책을 만나면 정말 좋겠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충분히 이 꿈은 이루어질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47년 전과 참 많이 달라지셨다.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셔서 꽉 막혔던 체증이 사라진 적도 있다. “공부는 한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더라.” 우리 넷을 개별적 인간으로 인정하게 된 계기가 된 문장이다. 그리고 차근차근 우리가 오랫동안 생각했던 단점들을 고쳐 나가셨다. 사람은 바뀔 수 있으며, 나이가 들어서도 충분히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다. 가방끈이 짧으시다며 항상 한탄하셨는데 이 책 모임이 아버지의 꿈을 다소 이루어지게 해주었다. 공책과 필기도구를 준비해서 드렸는데 정말 잘 활용하신다. 인상적인 부분을 적으시기도 하신다. 미리 책을 목동 집에 발송해 드리지만, 어머니처럼 읽어오시지는 못하신다. 아버지께서도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지 모르시는 듯하다. 젊은 시절 참 똑똑하셨는데 아마도 책보다는 귀동냥으로 많은 것을 깨치셨던 것 같다. 그래도 낭독할 때 글자는 거의 틀리지 않게 읽으시는 것이 아마도 수십 년간 거르지 않는 신문읽기의 힘일 것이다. 


작년, 모임 첫해가 아버지의 팔순이었다. 모임이 잘 진행되어 독서동아리 하는 날을 아버지 팔순에 헌정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런데 생신 즈음에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려 그만 모임을 하지 못하고 회원들이 따로따로 가서 아버지를 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쉬운 일이다. 또한 아버지께서는 이웃분들에게 자랑하셨다고 한다. 우리 가족이 독서동아리를 하는 것에 대한 자랑이 아니라, 당신께서 독서동아리라는 것을 하신다는 자랑이셨다니, 정말이지 아버지의 생각 포인트는 나랑은 다른 것 같다.



큰언니는 예나 지금이나 책 소녀이다. 모든 책을 거의 끝까지 읽고 온다. 매우 열정적으로 자신이 밑줄 그어온 것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한다. 모임이 끝날 즈음에는 혼자 얼굴이 붉어져 있다. 어머니께서 내온 다과나 내가 준비한 빵은 거의 먹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다만, 잘 읽어오지 않은 회원들에 대해 뭐라 말하지 않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많은 모임을 하는 나로서는 한 달에 여러 권의 책을 끼고 읽어야 해서, 책을 다 읽어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큰언니의 밑줄이 우리 모임에서 매우 중요한 자원임은 분명하다. 예전에는 애정 소설을 좋아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자기계발서나 역사책에 심취하여, 모임을 할 때마다 큰언니를 신기하게 쳐다보곤 한다. 지금 조카가 고3이라서 큰언니가 올해는 쉬고 있는데 빨리 다시 완전체가 되고 싶다. 현재는 우리를 계몽하는 사람이 없어서 다소 단조로운 모임이 돼버렸다.


작은언니는 학창 시절에도 책상에 앉으면 몇 분 이내로 잠이 들어버리거나 연습장에 만화책에서 본 듯한 발레의 연습 동작 같은 그림을 그리곤 했었다. 결혼하여 살면서 성인용 책 한 권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 큰언니의 밑줄에 대해 엄마보다 공감력이 더 떨어지는 것 같다. 우리 모임에서 유일하게 어엿한 월급쟁이인데 모임에 돈이 필요할 때 아낌없이 내주어서 우리 독서동아리에는 정말 소중한 회원이다. 작은언니는 자기 차례의 추천도서를 늘 힘겹게 찾아낸다. 그럼에도 교보문고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몇 개월에 한 번은 훑어보니 언젠가는 책 제목 전문가가 될 것 같다. 이번 달도 작은언니 차례여서 읽고 싶은 책을 물어보니 “모르겠는데…”라고 한다. 나는 이번 달은 정말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싶은데 아마도 자기계발서쯤을 골라낼 것 같다. 희한하게 다른 독서동아리에서도 책을 잘 안 읽은 사람은 소설 분야를 고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제껏 책을 안 읽었으니 오히려 우리네 이야기인 소설을 쉽게 생각할 것 같은데 추천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나는 5년 넘게 독서동아리의 행정적인 부분을 주체적으로 맡고, 토론 방법 연수까지 받은 독서동아리 베테랑이다. 내가 지금의 독서동아리를 만들자고 다섯 명의 가족들에게 권유했던 것은 코로나19 덕분이다. 


2020년, 코로나19로 가족 이외의 사람을 만나는 게 어려워지면서 언니들과 동생, 부모님과 그전보다 빈번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 얘기도 잘 통하고, 정말 편하다는 것을 느꼈다. 가족들과 다시 가까워지면서 우리 여섯 명은 ‘코로나 블루’코로나19와 우울감을 합친 합성어에 걸리지 않았다. 더욱 다정한 시간을 보내며 2021년, 독서동아리를 하면 어떻겠냐는 말을 꺼내게 되었다. 책 속의 대화나 내용에 대해 서로 얘기하다 보면 그 사람의 가치체계를 알 수 있고, 평상시에 조금 서운하게 돌아오는 말도 그 사람의 그 말뜻을 헤아릴 수 있게 된다. 나는 이러한 독서동아리의 장점으로 우리 가족이 서로 하고 싶었던 말을 부드럽게 하고 과거를 해소할 수 있는 방편으로 삼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이루어진 것 같다. 첫 독서동아리 모임을 끝내고 큰언니가 우리 집에 나를 데려다주면서 했던 ‘행복하다’라는 말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또 한 명의 회원, 우리 집 막내에 관한 이야기는 언젠가 할 날이 있기를 바란다. 여전히 과거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지만, 이 독서동아리와 함께 시작한 사회복지학 공부로 조금씩 사회 속으로 걸어 나오고 있다. 매달 우리 모임의 책은 막내에게도 같이 배달된다. 그 작은 집 책꽂이에 하나씩 꽂히고 있다. 공부하기도 벅찬 터라 읽지는 못하지만, 동생은 그 책에 찍힌 우리 ‘달달한 언니들의 구름수다’ 도장으로 그 무게감을 느낀다고 했다. 


언젠가 다 같이 따뜻한 차 한 잔과 먹음직스러운 빵을 먹고 싶다. 책은 우리 여섯 가족을 다시 뭉치게 했다. 지나간 시절은 그대로 두고 앞으로 남은 시절은 달달하기를 고대한다.  




★2022 독서동아리 수기 공모전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사람과 책이 만나다」에 선정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