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9

내가 책 모임에 가는 이유

저자소개

최상용
독서동아리 ‘독.한모임’ 회원


2012년 겨울, 죽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 어느 작가는 “죽을 수도 살 수도 없을 때 서른은 온다”라고 했는데 ‘허송세월만 하다 아무 데도 갈 수 없게 된 마흔’이 되어 있었다. 사업 실패와 무절제한 생활로 하루하루를 맹물처럼 살았다. 사실 실패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있을 만큼 열심히 하지도 않았었다. 감당하기 힘든 빚과 이자에 짓눌려 올가미에 갇힌 기분으로 지옥같이 피폐한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밤, 술김에 세차게 달리는 택시에 뛰어들었고 내 몸을 낚아챈 친구 덕에 멀쩡하게 살았다. 내 불행의 원인은 자기 삶의 ‘주도권’을 갖지 못하고, 나를 성장하게 하는 고통과 불편을 회피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여러 책을 읽고, 한참 지나서 알았다.


그해 겨울, 어쩌다 장년 백수가 되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시립도서관에 갔다. 연어의 귀환은 아름답고 성스럽기라도 하지. 한창 돈을 벌어야 할 나이에 도서관으로 다시 돌아와 책이나 읽는 40대 가장이라니.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이 되었을까? 에잇, 책이나 실컷 읽자!” 부끄럽지만 내가 책과 도서관을 대하는 처음의 마음이었다. 운 좋게 글을 읽다 가슴을 후벼 파는 좋은 문장을 만나면 글에서 눈을 떼고 창밖을 바라보며 다시 읊조려 보고, 잠시 숨을 고르며 감탄했다. 종이를 여러 장 묶어 놓은 사물을 보며 울고 웃다니. 싫지 않은 낯선 경험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외롭지 않고 좋았다. 글에 빠져 있는 동안에는 집 생각, 돈 걱정, 직장 그리고 과거에 대한 후회까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행복했고, 그 행복함을 놓치기 싫어 매일 밤늦게까지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며칠 해 보니까 ‘책 읽는 백수’가 적성과 흥미에 맞았다. 심지어 재능도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재능이 흘러넘쳤다.


책을 읽으며 아까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현실 도피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삶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불행했던 이유를 알게 된 값진 시간이었다. 세상이 정한 방향이나 기대가 아닌 스스로가 부여한 ‘자기 철학’이 부재한 삶. 이게 나였다. 혼자 읽다 보니 책 속의 많은 작가가 함께 읽기를 권했고, 책을 읽으며 바뀐 생각과 행동들이 옳은가를 확인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고, 지인 소개를 받아 독서동아리에 들어갔다.



독서동아리의 첫날을 기억한다. 신입 회원인 나는 자기소개 시간부터 마무리 순서인 각자의 소감발표 시간까지 긴장돼 새색시처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누구? 당신은 어떤? 이곳은 어디?’의 연속이었다. 회원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애써 여유로운 척 찻잔을 든 오른손을 바르르 떨었다. 제발 누구도 지금 이 순간 내게 관심 두지 않기를, 사회자가 내게 질문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부였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말하기보다는 조용히 앉아 그저 듣고만 싶었다. 함께 읽은 책은 또 어찌나 두꺼운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홀로 둥둥 떠다니는 섬처럼 두어 시간을 꿋꿋이 버텼다.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제발 살려만 주세요!’의 시간이라고나 할까. 딱 어찌할 바 몰라 허둥지둥 눈치만 살피는 갓 입대한 훈련병의 심정이었다. 군대는 남에게 끌려가기라도 해서 덜 억울하지. 이곳은 책이 좋아서 내가 제 발로 찾아온 곳이 아닌가.


읽은 책이 읽지 않은 책을 소개하고 이어주듯이, 독서동아리는 좋은 사람과 낯선 경험을 연결해 주었다. 어느 해 가을, 독서동아리에서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로 유명한 강진으로 독서 여행을 갔다. 우리는 출발하는 순간부터 도착할 때까지 가을 노래를 함께 부르고, 강진만 갈대숲 생태공원에서는 덩실덩실 어깨춤까지 추었다. 억울하게 여름 감옥에 갇혀 있다 풀려난 사람처럼 모두가 두 팔을 벌려 오롯이 가을을 만끽했다.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라고 했던가. 여행을 통해 가을을 읽고, 다산을 읽고, 함께 하는 즐거움을 동시에 읽었다. 한꺼번에 여러 권을 읽었으나 신기하게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점심 식사 자리에서 동아리의 리더가 내게 말을 건넸다. “왜 말이 없어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표현이 서툰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일은 무슨 일? 재밌어 죽겠구먼. 아직 아무도 쓰려고 하지 않는 여행 후기를 동아리방에 올려 내 심정을 표현해 보리라!’ 선한 오기가 발동했다. 졸업 이후 처음 글쓰기를 시도했다. 회원들은 내 글을 읽고, 고마워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행을 함께 했던 회원들은 다시 여행지를 다녀온 기분이라며 좋아했고, 참여하지 못했던 회원들은 같이 여행을 다녀온 것 같다며 함께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했다. ‘내게 이런 재능이?’ 서툰 글이지만 솔직하게 마음을 담아 쓴 글이 읽는 사람의 마음을 동하게 한다는 사실이 놀랍고 흥미로웠다. 쓰기의 즐거움을 맛본 첫 순간이었다.



7년이 흘러 이제 내가 독서동아리의 2기 리더가 되었다. ― 나는 출세했다! 진심이다. 겸손하지 못해서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다. ― 꿈이 없는 리더는 꿈이 없는 모임을 만든다. 책만 읽는 모임에서 ‘읽고, 쓰고, 실천하는 독서동아리!’로의 성장, 이것이 내 바람이다. 작년부터 독서동아리 안에서 뜻이 맞는 회원들과 함께 글쓰기 모임을 만들어 매주 한편 글쓰기를 실천하고 있다. 사랑스러운 두 딸에게도 아빠와 같은 책을 함께 읽고 한 달에 한 번 독서 토론을 하자고 권했고, 다음 달부터 실천하기로 했다. 딸에게조차 표현이 서툰, 많이 부족해서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사는 아빠의 사랑법이다. 


아직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길을 몰라 나침반의 바늘처럼 매번 흔들리며 살고 있다. 하지만 책과 독서동아리를 통해서 얻은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내 앞에는 내가 선택할 수 있지만, 끝을 알 수 없는 여러 갈래의 길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 길을 함께 가고 싶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2022 독서동아리 수기 공모전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사람과 책이 만나다」에 선정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