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9

낯선 지역에 정착하는 방법 ─ 요책(樂冊) 어때요?

저자소개

황인경
독서동아리 ‘요책’ 회원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9월이었다. 고향을 떠나 남편과 아이 말곤 친구도 친척도 없는 새로운 곳으로 이사했다. 휴직한 탓에 이야기 나눌 동료도 없었다. 새로운 정착지에 어떻게 정을 붙일까 고민하다 이사하기 한 달 전 인터넷 카페에 함께 책 읽을 사람을 찾는다며 글을 올렸다.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다 보면 낯선 곳도 익숙해질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응답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막연했던 바람은 현실이 되었다. 연고도 없는 남서단의 작은 도시 목포는, 독서모임 덕에 8년이 지난 지금은 나의 정서적 고향이 되었다. 

  

시작은 소소했다. 이사한 지 보름이 지난 화요일, 첫 모임을 했고 네 명의 여성이 바닷가 앞 카페에 둘러앉았다. 공통된 관심사를 이야기하며 첫 만남의 긴장을 풀고, 격주에 한 권씩 책을 읽기로 약속했다. 세 번째 모이던 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뜻과 우리가 읽은 책을 지시하는 동음이의어 ‘요책樂冊’을 독서동아리 이름으로 결정했다. 방대한 독서량을 가진, 어휘 감각이 좋은 친구의 아이디어였는데 책을 대하는 우리의 진지한 마음과 독서에 대한 열정을 담백하게 표현한 명칭이었다.


독서동아리를 운영한 지 다섯 달쯤 지나, 나는 전라남도립도서관에 문을 두드렸다. 독서동아리를 알리고 더 많은 사람과 함께하고 싶었다. 회원들의 입소문과 도서관을 통해 찾아온 사람들로 ‘요책’은 북적이기 시작했다. 업무 중에도 책에 둘러싸여 있는 도서관 사서, 아이들에게 독서의 중요성을 전해주고 싶은 선생님, 중국어선 단속 기사를 쓰다 관련 서적을 뒤적이는 해양경찰, 원목의 KS인증 여부를 가리곤 토론 도서를 주문하는 품질관리담당자, 기록물을 관리하며 틈나는 대로 책장을 넘기는 기록관리사까지. 네 명으로 시작한 ‘요책’은 어느덧 열 명, 열다섯 명으로 점차 늘어났고, 함께 읽고 소통하며 시나브로 가까워졌다. 낯설기만 하던 도시는 그들을 통해 친숙한 공간이 되어갔다. 



‘요책’은 회원들이 함께한 시간만큼 견고하게 다져진 독서회다. 모임 주기는 이 주에 한 번으로, 문학과 비문학을 번갈아 가며 읽고 토론 도서는 회원들의 투표를 통해 정하고 있다. 일 년에 두 번, 상·하반기 결산 모임을 하는데 이날은 선정 도서 없이 만나 식사를 함께하며 6개월 동안 읽은 책 중 최고의 책을 고르고, 독서회 회칙 변경이나 기타 활동에 대해 의논한다. 어느덧 모임 8년 차, ‘요책’을 특별하게 만드는 몇 가지 약속을 소개해 본다.


첫 번째는 기록이다. 2015년 9월 15일 첫 번째 모임부터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을 글로 남기고 있다. 선정 도서와 모임 일자 및 장소, 참석자뿐만 아니라 개인별 평점과 완독 여부, 감상평을 덧붙인다. 작성한 글은 네이버 카페를 통해 회원들과 공유한다. 2019년에는 그간의 기록을 모아 문집을 제작했다. 기록은 ‘요책’의 든든한 허리이다. 함께한 시간을 차곡차곡 글로 남기며, 우리의 책 읽기는 더욱 깊어지고 있다.


두 번째는 적절한 강제성이다. ‘요책’에는 ‘6-3-1’ 규칙이 있다. 상·하반기 모임을 하는 반년 동안, 6번을 출석하고, 3권의 책을 완독하며, 1편의 서평을 작성해야 한다. 대부분 직장인이기에 일이 바쁜 시기엔 출석을 놓치기 마련인데, 이 약속 덕분에 상·하반기 모임 직전엔 참석률과 완독률이 현격히 오르는 웃지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6-3-1’을 채웠냐는 안부를 수시로 묻고, 서로를 북돋우며 꾸준히 미션을 수행 중이다.


세 번째는 함께하는 마음이다. 어쩌다 보니 회장이란 타이틀을 달고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독서동아리 운영의 작은 부분일 뿐이다. ‘요책’은 ‘1인 1역’이라는 규칙을 통해 모든 회원이 하나의 역할을 맡고 있다. 도서관 홈페이지 관리, 모임 서기, 선정 도서 투표 진행, 모임 장소 예약 등 회원 수에 맞게 역할을 나누고, 각자의 역할을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



네 번째는 다양한 소모임 운영이다. 좋은 책이라고 알려졌지만, 정규 모임에서 읽기 힘든, 일명 벽돌책을 대상으로 다양한 소모임을 운영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사회평론에서 펴낸 『교양으로 읽는 용선생 세계사』를 읽었고, 현재 박경리 작가의 『토지』 완독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악기 연주 소모임인 ‘두드림’을 운영하며 작은 콘서트를 갖기도 하고, ‘글쓰기 소모임’이나 ‘좋은 습관 갖기 소모임’ 등을 운영하며 독서동아리의 저변을 넓히고 있다.


마지막 약속은 책 중심의 독서동아리 운영이다. 독서동아리의 핵심은 당연히 책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랜 기간 모임을 하다 보면 사적인 친분이 앞서 책을 뒤로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한 부분을 피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책을 꾸준히 읽고 깊게 볼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한다. 코로나의 확산으로 온라인 모임이 불가피하게 됐을 때, 보다 편리한 SNS 매체를 찾기 위해 애쓰고 독서 의지가 사라지지 않도록 서로를 응원했다. 문화 기행도 관련 책을 선정해 독서 토론 후 여행을 떠났다. 2018년 서울 궁궐 투어와 2020년 경주 역사 기행에 이어 얼마 전 서울 문화 기행을 다녀왔다. 이번 주제도서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었다. 여행 전 『햄릿』을 읽고 이야기를 나눈 후 후, 서울로 올라가 민음사 해외문학 팀 박혜진 편집자의 강연을 듣고, 저녁엔 연극 「햄릿」을 관람했다. 『햄릿』 한 권을 읽고, 보고, 느끼는 완벽한 경험이었다. ‘요책’은 이렇게 모든 활동의 중심에 책을 두고 있다.


고향을 떠나며 새로운 곳에 대한 두려움, 낯섦을 없애고자 인터넷에 글을 올렸던 순간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그때의 용기 덕에 나는 연고도 없는 이곳에 온전히 자리 잡게 되었다. 독서모임은 단순히 책을 함께 읽는 모임이 아니었다. 같은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며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서로를 북돋는 선의의 공동체였다. ‘요책’과 함께하며, 나는 이 도시가 익숙한 것을 넘어, 이곳에 없는 자신을 상상하지 못하게 되었다.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지 못해 시간이 더디 가거나 어제와 오늘이 같은 날이라 느껴지는 이가 있다면, 서로의 발전을 응원하고 책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오늘부터 책을 읽겠다 다짐하지만, 실천이 쉽지 않아 고민이거나 어떤 이유에서든 타인과 함께 책 읽기를 경험하고 싶은 이들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을 건넬 것이다. “우리와 함께 읽어볼래요? 요책 어때요?” 하고. 




★2022 독서동아리 수기 공모전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사람과 책이 만나다」에 선정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