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9

만나지 않아도 만날 수 있다

저자소개

박진서
독서동아리 ‘메아리 프로젝트’ 회원


만남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처음엔 문제가 없는 줄 알았다. 우리는 20대 구성원들로만 이뤄진 동아리였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다루는 것에 어려움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사회에서 기술적인 문제들도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우리의 줌 모임은 언제나 매끄러웠고, 공유 드라이브는 풍성한 활동 자료들로 차곡차곡 채워져 갔다.


하지만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기술을 익힌다고 사회적 변화에 완벽히 적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변화 속에는 기술을 능가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얼굴을 마주할 수조차 없는 활동이 계속되며 구성원들은 지쳐갔다. 동아리의 가장 큰 목적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기에, 만남이 사라진 동아리에 에너지가 사라져가는 것은 당연했다. 조금만 지나면 나아질 거라는 생각에 무조건 버텨보자 결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위기 속에서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이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독서동아리의 본질은 그 무엇도 아닌 ‘만남’ 그 자체라는 사실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만남이 가진 힘은 강력했고, 그 힘이 사라져 버렸기에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만남이라는 힘을 되찾을 방법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


연결의 감각을 깨우다


상황이 조금 나아져서 만남이 가능한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한두 번의 만남으로 그동안 잃었던 힘을 회복하기란 쉽지 않았다.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여러 번의 비대면 회의와 논의 끝에 다다른 결론은 새로운 만남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동아리라는 제한된 집단 안에서의 만남조차 쉽지 않은데 관계를 확장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활동들에 새로운 에너지가 들어온다면 ‘잃어버렸던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우리가 발견한 건 청소년들이었다. 물론 우리는 모두 성인이 되었지만,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청소년들과 함께하는 만남은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어 줄 것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동아리 구성원들은 모두 중고등학교 시절 같은 학교 도서부에서 친해진 사이니만큼, 청소년들의 에너지가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줄 거라 확신했다. 우리의 동아리 담당 교사였던 모교의 사서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고, 청소년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제안을 흔쾌히 수락해 주셨다.


청소년들과 함께 만나기 위한 준비는 회의의 연속이었다. 10살에 가까운 나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방향에서 고민을 이어갔다. 어떻게 해야 풍성하게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을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어떤 책을 선정할까.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너무도 힘들었지만, 그 힘듦이 오히려 반가웠다. 계속되는 고민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의욕을 조금씩 채워주고 있는 것 같았다. 새로운 만남이 우리를 재충전시켜줄 것이란 예상이 확신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주제를 고민하던 중, 코로나 이후 더욱 대두되고 있는 ‘돌봄’ 이슈, 그중에서 ‘장애’ 이야기를 다뤄보기로 했다. 방학 동안 여러 가지 책을 읽고 자료를 수집했고, 장애 가족 당사자가 쓴 두 권의 에세이 『반짝이는 박수 소리』이길보라, 2015와 『어른이 되면』장혜영, 2018을 대상 도서로 선정했다. 팀원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기획력과 노하우, 독서 경험을 십분 살려 독서 과정에서 길잡이가 되어줄 일정표와 함께 매일의 독서량에 맞는 질문들을 선정했다. 준비는 순조롭게 이어졌고, 마침내 개학과 함께 학교 홈페이지에 모집 공고가 올라갔다. “장애 읽는 십 대와 함께할 친구들을 찾습니다”



대화창을 꽃피우는 이야기의 향연


만반의 준비를 마쳤고, 우리는 최선을 다했기에 만족스러웠다. 우리 프로그램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는 자아도취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밑에는 불안감이 깔려 있기도 했다. 청소년 독서율이 떨어지고 있다는데, 장애처럼 민감한 이슈를 다루고 있는데 과연 함께해 줄 청소년들이 있을까 걱정이 됐다. 무엇보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선배들과 함께하고 싶은 생각을 하게 될지도 의문이었다. 혹시나 신청자가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라는 걱정과 함께 신청 마감일까지 마음을 졸였다.


그래도 다행히 8명의 친구가 만남을 함께해주었다. 책에 대해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중 얼굴을 맞댄 상태에서는 오히려 청소년들이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는 것이 부담스러울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나왔다. 우리는 카카오톡 채팅방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는 방법을 채택했다. 비록 만나지 않지만, 대면하는 것 이상의 시너지를 기대해 보기로 했다.


한 권의 책을 2주간 꼼꼼히 함께 읽으며 활동을 진행했다. 각 도서가 시작할 때마다 독서 습관을 유도할 수 있는 일정표로 시작을 알렸다. 매일의 할당량에 해당하는 부분을 읽고 나면, 그날의 분량에서 미리 준비된 질문을 단톡방에 공유했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손으로 직접 쓰거나 타이핑을 통해 공유했다. 다양한 의견이 나올 거라 예상했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청소년들의 생각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깊고 다채로웠다. 프로그램을 준비하기 위해 책을 읽고 또 읽으며 고민했던 우리조차 발견하지 못했던 지점들을 계속해서 끄집어냈다.


처음엔 카카오톡으로만 한다는 것의 불안감이 앞섰던 것도 사실이다. 말이 없이 문자로만 대화하는 것이 정말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십 대들의 성향을 존중한 선택을 믿어보기로 했다. 돌이켜보면 이 선택이 활동의 화룡점정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스스로 낯을 가린다고 말했던 친구들도, 카카오톡 안에서는 자유롭고 자신감 넘치게 자신의 의견을 표출했다. 서로의 의견에 영향을 받으며 더 좋은 시너지를 만들어냈고, 다양한 의견들이 대화창을 가득 꽃피웠다.



우리는 언제나 만날 수 있다


사실, 활동을 처음 시작할 때는 비대면 상황 속에서 주변과 단절되었을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물한다는 마음도 조금은 가지고 있었다. 선배 입장에서 후배들에게 ‘독서는 이렇게 재밌는 거야’라고 가르쳐주겠다는 거만함도 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한 달의 기간 동안 우리는 가르침을 주기보다 많은 것을 얻었다. ‘요즘 애들은 책을 안 읽어’ ‘요즘 애들은 이기적이라 사회문제를 몰라’ 같은 세간의 편견 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진짜 청소년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누구보다 진중하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가진 모습은 동아리 구성원들을 성찰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변화는 자신감을 회복한 것이었다. 에너지와 함께 사라졌던 자신감이 청소년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다시 한 번 불타올랐다. 새로운 집단과의 책을 통한 만남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같은 주제로 또 다른 책을 선정해 지역 학부모들과 만나면 어떨까, 다른 지역 사람들과의 만남도 재미있을지 몰라, 다음 주제는 이걸로 하자는 등의 논의가 이어졌다. 잃어버린 에너지를 회복한 것을 넘어 그 이상의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카톡으로 만났던 여덟 명의 ‘장애 읽는 십 대’들을 보며 우리는 언제나 만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아무리 강력한 어려움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어도, 책에 대한 진심과 열정이 있다면 책을 사랑하는 이들과 언제나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오히려 그런 어려움들이 책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열정을 재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는 것도 말이다.


내가 존경하는 한 교수님께서 코로나 시기에 수업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류의 수많은 명저가 단절과 은둔의 시간 속에 탄생했듯, 이 어둠을 통과하는 동안 여러분도 훌륭한 성취와 발견을 이뤄낼 거예요.” 만나지 못한다고 슬퍼할 필요 없다. 우리는 어떻게든 만날 수 있다.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나도 어쩌면 이미 만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책을 통해, 글을 통해, 그리고 독서동아리를 통해.


 

★2022 독서동아리 수기 공모전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사람과 책이 만나다」에 선정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