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9

길 없는 길을 만드는 사람들

저자소개

이희영
독서동아리 ‘길 위의 독서’ 회원


한 권의 책이 맺어준 인연


‘길 위의 독서’ 동아리를 시작하게 된 건 2018년 4월 벚꽃이 활짝 피어나던 봄날이었다. 계절은 환한 봄꽃과 함께 더없이 따뜻했지만 내 마음은 사람에게 입은 상처로 단단히 얼어붙은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신랑이 폐암 진단을 받고 수술까지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는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바로 그 무렵, 동네 도서관에서 오랫동안 함께 인연을 맺었던 언니 두 분이 나를 찾아왔다. 십 년을 넘게 함께해온 인연이 너무 아쉽다면서 책모임을 함께하자고 제안을 해왔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나에게 책 읽기는 ‘숨구멍’이자 ‘탈출구’였고, 나에 대해 힘들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해줄 수 있는 소중한 사람들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다양한 인연들이 만나 모인 사람들이 열두 명, 대부분이 40~60대 여성으로 여섯 명은 전업주부이고 나머지 여섯 명은 일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첫 모임에서 읽은 책은 황해문화 전성원 편집장님의 『길 위의 독서』라는 책이었다. 『길 위의 독서』는 책을 소개하는 책이었는데 작가는 책 속에 자신의 쓸쓸하고 고단했던 삶을 진하게 녹여냈다. 책은 분명 사물인데 책장을 넘길 때마다 책이 나에게 말을 거는 듯한 착각이 들곤 했다. 1990년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노태우 정권 때 나는 사학비리에 반대해 농성을 하다 무기정학을 받았고, 학교를 그만두고 대입 검정고시를 쳤다. 인문계 여고에 백골단이 투입되고, 존경하는 선생님들이 전투 경찰차에 실려 가던 상황, 고등학생 신분으로 교과서와 너무 달랐던 세상에 대한 괴리감으로 세상 끝에 버려진 듯한 마음으로 방황했던 그때의 일들이 생생히 살아났다.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하게 되면서 스스로가 공룡 같다고 생각했던 외로운 마음을 치유 받았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고아처럼 살아야 했던 작가가 믿음직한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 겪어야 했을 고통의 무게가 느껴져 먹먹했고, 한편으론 경이로웠다.


책을 읽고 마음이 움직인 것은 나 하나뿐이 아니었는지 책모임 이름을 정하는 데 ‘길 위의 독서’로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우리 모두 인생이란 길 위에서 책을 매개로 만났으니 ‘길 위의 독서’가 딱 맞는 이름이라는 의견이 압도적이었고, 과반의 표를 받아 통과되었다. 책을 읽은 후 감상을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우연한 기회에 작가님이 보시게 되었고,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주제’를 가진 책 읽기, 독서에 줄기를 잡다


전성원 편집장님과의 만남은 길 위의 독서모임에 새로운 국면을 열어주었다. 오랜 기간 도서관 독서모임을 하고 다양한 강의를 들어 봤지만 항상 드는 고민은 당시엔 너무 좋았는데 나중에 뒤돌아서면 책 내용이 생각나지 않고 그저 읽었다는 사실만 남는다는 거였다. 다시 말해 힐링은 되는데 남는 게 없었다. 


길 위의 독서 동아리도 처음 1년은 각자의 취향에 맞는 책을 읽었다. 그러다 전성원 편집장님을 만나고 신화라는 주제로 ‘고전으로 읽는 서구 문명사’ 강의를 들으며 『신화의 역사』 『길가메시서사시』 『오디세이아』 『일리아드』 『아이스퀼로스 전집』 『소포클레스 전집』 『에우리피데스 전집』 『그리스 로마신화』 『소크라테스의 변명』 같은 고전을 읽었다.


그 후 여성사를 주제로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를 읽으며, 발제자를 정하고 책 내용 중에 깊이 조사하고 싶은 인물의 자료를 수집 정리해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의 지원금을 받아 『길 위에서 발견한 여성사』라는 제목의 자료집을 발간했다.


이듬해에는 지자체 지원으로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도서, 벨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을들의 당나귀 귀』 『백래시』 같은 책들을 읽었다.


지난해에는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현재는 미술사를 주제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고 있다.


주제를 가진 책 읽기는 막연한 책 읽기보다 내용을 체계화하고 줄기를 세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렇게 읽다 보면 생각의 가지를 치게 되고, 서서히 전체 그림을 그리게 된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반드시 기록을 남겨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부족하지만 공부가 마무리될 때쯤 우리 목소리를 담은 통사 형태의 책을 만들어보고 싶은 소망이 있다.



책을 넘어서는 성장, 나와 사회를 연결 짓는 실천


책을 왜 읽는가? 매우 원초적 질문이지만 시시때때로 자신에게 자주 묻는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결혼 후 주부로 살아오면서 잊고 살았던 나를 생각한다.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던 열아홉 살의 나, 낯선 세계를 향해 호기심을 불태웠던 스물다섯 살의 나, 첫아이를 임신하고 새로운 생명을 품고 전율했던 서른 살의 나…. 나는 어떤 사람이고 나는 무엇이 하고 싶은가? 나는 어떻게 성장하고 싶은가? 이제는 독서를 ‘숨구멍’이나 ‘탈출구’가 아니라 내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직면하고 현실을 뛰어넘어 미래를 향해 도약하는 도구로 쓰고 싶다. 


동아리에 참여하면서 디지털대 문화예술경영학과 3학년으로 편입을 했고, 며칠 후에는 학위를 받게 된다. 동아리 회원 중에는 사이버대학교에 진학한 사람도 있고, 캘리그라피, 성악, 우쿨렐레, 자수, 기타, 오카리나 등 다양한 문화 활동을 기획하고 공연 무대에 서는 사람도 있다. 사업을 하면서 강의를 하기도 하고, 직장을 찾아 취업한 사람도 여럿이다. 코로나 여파로 3년의 시간 동안 비대면 모임을 해야 했지만 줌을 통해 직장 다니는 사람들을 편히 볼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화면을 활용해야 해서 피피티PPT 만드는 실력도 늘었다.


꼭 눈에 보이는 성과가 있어야 성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길 위의 독서 동아리가 긴 시간 함께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나누려 했던 끈끈한 정서적 교감이 있고, 무엇보다 훌륭한 독서 길잡이 선생님이 중심에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책을 통해 배운 것을 이웃들과 어떤 방식으로 나누고 실천할 것인가? ‘길 위의 독서’ 동아리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 낭독회와 다양한 주제의 강연을 기획하고 대면과 비대면 토론 모임을 병행해왔다. 비록 작은 실천이지만 책을 구매할 때는 동네 책방을 이용하고, 미얀마 사태 때는 성금을 보내기도 했고, 정기적으로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급식 봉사도 진행하고 있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지만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된다”는 루쉰의 말처럼 길 없는 길을 만드는 그 첫걸음을 힘차게 내딛고 있다. 




★2022 독서동아리 수기 공모전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사람과 책이 만나다」에 선정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