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6

나무와 숲

저자소개

박기영
독서동아리 ‘나무와 숲’ 회원


높고 파란 하늘 아래 불어오는 가을바람과 함께 ‘나무와 숲’ 독서동아리 멤버들의 시 낭송이 나무와 숲으로 둘러싸인 농막에 울려 퍼진다. 어느 멋진 가을날 농막에 동아리 회원들을 초대했다. 각자 준비해온 그림책을 읽고 시 낭송을 하며 포트럭 파티potluck party를 했다. 우리는 모두 꽃차를 마시며 입안에 퍼지는 향긋한 향내와 함께 아름다운 구절구절을 가슴으로 음미했다. 낭독회를 끝내고 돌아가는 회원들에게 밭에서 갓 수확한 열무 한 단씩 들여보냈다. 책과 열무 한 단을 가슴에 품고 돌아가는 동아리 회원들의 얼굴에 행복함이 묻어나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책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먹거리를 나누고, 그야말로 삶을 나누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지난 가을 독서 모임의 길잡이인 내가 준비한 이벤트였다.


“‘나무’처럼 작은 것일지라도 자세히 볼 줄 알며, ‘숲’처럼 전체를 볼 줄 아는 균형을 가진 사람이 되자”는 의미를 가진 ‘나무와 숲’ 독서동아리를 만난 건 2018년 어느 여름날이었다. 이 동아리는 이천시립도서관에서 진행한 ‘길 위의 인문학’ 수업을 통해 시작된 독서 모임이다. 강의가 끝난 후에 각자 다른 세계에 속해 다른 삶을 살아오던 사람들이 책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인연이 되었다. 5명 남짓한 회원으로 시작했던 모임이 2022년 7월 현재는 14명으로 매달 2회씩 모임을 진행하며 ‘함께 읽기’를 지속하고 있다. 현재 70회의 모임을 마쳤다. 독서토론을 통해 우리의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넓어지고 있다.


지난 4년간 ‘나무와 숲’ 독서동아리에서 다양한 책을 함께 읽어왔다. 우리 동아리의 많은 활동 중 으뜸은 바로 길잡이의 역할인 것 같다. 매해 초에 한 해 동안 매달 독서 모임을 이끌 12명의 길잡이를 제비뽑기로 뽑는다. 길잡이는 한국십진분류법KDC의 책 분류 방식의 순서에 따라 그달에 읽을 책을 직접 선정한다. 첫 번째, 세 번째 화요일 두 시간 남짓한 책 모임의 리더가 된다. 길잡이는 책을 선정하고 토론을 주도하는 역할 이외에도 회원들에게 미션을 주고 한 달 동안 독서 활동이 유익한 경험이 되도록 이끌어준다. 길잡이의 지도에 따라 회원들은 매달 다양하고 독창적인 미션을 수행하며 함께 읽기의 매력에 풍덩 빠진다. 훌륭한 리더Leader는 훌륭한 리더Reader를 만든다. 



올해 6월, 내게도 길잡이 차례가 왔다. 문학 분야를 담당하게 된 나는 함께 나눌 책 선정을 위해 토론이 있기 전 몇 달 동안 정성을 쏟았다. 도서관과 서점에 자주 들러 문학책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책을 선정하는 과정은 때론 책임감과 부담감이 따르기도 한다. 하지만 맡은 분야의 다양한 책에 대한 서평을 읽게 하는 등 길잡이에게도 분명 유익한 시간이다. 노력하는 리더는 좋은 리더가 될 수 있다. 동아리 회원들은 길잡이가 어떤 책을 선정할지에 대한 기대감으로 기다린다. 길잡이의 책 취향은 물론이고 책을 통해 그때의 관심이나 고민거리를 함께 나눌 좋은 기회도 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한 권의 책을 통해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책 토론 방식도 길잡이에 따라 달라진다. 길잡이였던 나는 미리 자료를 준비하여 토론의 순서를 소개하고 회원들로부터 수집한 마음을 울린 다섯 문장을 각자의 목소리로 낭독하게 했다. 회원들이 토론 전에 보내준 논제들을 취합해 본격적으로 토론을 이어갔다. 책 속에 다양한 주제만큼이나 회원들의 생각도 다양하다. 책을 읽으며 놓쳤던 부분들을 다시 곱씹게 된다. 같은 생각에 공감하며 마음이 따뜻해진다. 나와 다른 생각들은 다른 세계를 열어주며 생각의 깊이를 더해준다. 독서토론 후 간단히 다섯 줄의 짧은 서평 쓰는 시간을 가지며 독서 모임은 마무리 지어졌다. 읽기, 말하기, 듣기, 쓰기 모든 영역을 온전히 나누며 자신의 마음과 서로의 마음을 그득 채운다. 


길잡이 역할이 가장 빛나는 순간은 그때마다 책 동지들에게 주어지는 미션 수행 이벤트이다. 미션은 독서 모임이 있기 전 2주 동안 서로 동기를 유발하고 격려하는 순기능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이번 6월에 내가 낸 미션은 독서 모임 전에 책 속에서 수집하고 싶은 아름다운 문장 다섯 개를 공유하고 독서 모임 후에 독서토론 감상평을 적는 것이었다. 다소 평범한 미션이라 생각되어 좀 더 즐거운 독서 과정을 위해 임무를 완수한 회원들께 깜짝 선물을 준비하겠다고 발표했다. 의미 있는 선물이 무엇이 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작년 가을에 수여했던 열무처럼 직접 키운 유기농 파한 단을 수여하기로 했다. 미션 성공 선물을 발표하자 회원들의 탄성과 박수가 쏟아져 나왔고 참여율과 완독률이 올랐다. 독서 모임 다음날 직접 아파트 단지를 돌며 상품을 배달해 아파트 정문에서 파 다발 수여식을 했다. 회원들은 파를 들고 자랑스럽게 포즈를 취했다. 



책 토론이 끝났다고 끝난 게 아니다. 이후에도 카톡방에 후기를 남기며 책 이야기를 이어간다. 긴 책 내용이 시로 표현되기도 하고 그림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각자 다른 공간, 다른 자리에서 함께 읽었던 책 속의 한 장면, 글귀, 그림, 노래나 관련된 뉴스들을 각자의 일상 속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면 카톡방에 공유해 여운을 이어간다. 함께 나누었던 글귀들이 일상의 곳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불쑥 나타난다. 그야말로 책이 삶이 되어 다가온다. 열린 마음으로 토론에 임할수록 보이지 않았던 물성들이, 마음들이 토론 후에는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각자의 다른 시선들이 모아 눈과 귀와 마음에 담았으니 주변이 점점 투명해진다. 이런 나눔들은 바쁜 일상에서 우리 모두를 잠시 멈추어 사유하도록 허락하는 예기치 못한 선물이다.


‘나무와 숲’ 동아리는 매달 길잡이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함께 독서토론 활동의 기대감, 풍성함, 개성으로 넘쳐나게 된다. 모든 회원들의 개성 있는 길잡이의 미션을 글로 옮기지 못해 아쉽다. 책 한 권으로 토론을 했을 뿐인데 때론 ‘개그콘서트’를, 때론 슬픈 영화를 본 것 같다. 때론 이웃을 사랑하는 봉사단체가, 때론 오은영의 ‘금쪽상담소’가, 때론 미술 감상회가, 때론 생동감 넘치는 콘서트장이, 박진감 넘치는 퀴즈쇼가 된다. 이렇듯 길잡이의 재치와 노력과 더불어 동아리 멤버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독서 모임은 책과 함께 색다른 경험을 가능케 한다. 


책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통해 삶을 만난다. 서로의 세계는 확장되고 결국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들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관대해진다. 이런 독서토론 과정을 통한 읽기는 한 권의 책을 읽었지만 여러 번 읽은 것처럼 마음이 가득 차오른다. 70회의 토론을 거쳐 왔지만, 여전히 매 토론 새롭고 가슴이 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독서 모임 속에서 우리는 진솔하게 각자의 삶을 나누며 서로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친다. 때론 함께 웃고, 때론 함께 울기도 하며 서로에게 그득 위로를 받는다. 이 모든 것이 함께 책을 읽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아니고 무엇일까? 독서동아리를 만나 책을 함께 읽기 ‘전’의 나와 ‘후’의 나는 분명 같을 수가 없다. 


“빨리 가고 싶다면 혼자 가도 됩니다. 그러나 멀리 가고 싶다면 함께 가야 합니다.” 독일 총리 메르켈이 한 말이다. 이처럼 함께 읽기의 힘은 강하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모여 울창한 ‘숲’을 만들 듯 앞으로 함께 읽는 ‘책’ 한 권 한 권을 함께 읽으며 아름답고 선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랑이 가득한 ‘세상’이 되길 바란다. 




★2022 독서동아리 수기 공모전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사람과 책이 만나다」에 선정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