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08

‘지금처럼 웃음이 절실한 시대는 없었다’

저자소개

정윤수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교수



“유머는 인간이 발휘하는 독특한 정신적 능력이다. 경험이나 상황을 새로운 각도에서 포착하는 직관, 그 의미를 더 높은 차원으로 변화시키는 창조성이 거기에 깃들어 있다.”


톱스타 김태희는 오래전 토크쇼에 출연해 처음 만나서 4~5초 만에 생기는 감정, 즉 첫인상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으로는 유머가 중요하다고 했다. 이상형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배우 천우희는 어려운 일이 있어도 위트 있게 넘어갈 수 있는 유머 있는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했고, 『한끼줍쇼』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잃을 것’이 있는 사람이 좋다고 ‘독특한’ 말을 한 정려원도 덧붙이기를 유머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원도 2015년 6월 『두시탈출 컬투쇼』에 출연해서 “유머가 1번, 요리가 2번, 자상함이 3번”이라고 말했다.


여기까지만 읽고서 ‘웃기는 얘기는 내가 제일인데’ 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판이다. ‘유머’는 ‘웃긴 얘기’를 포함하지만 ‘웃긴 얘기’가 유머는 결코 아니다. 하정우와 차태현을 보라. 그들이 무슨 『유머집』 같은 책을 달달 외워서 그들만의 캐릭터를 형성했겠는가. 유머는 다양한 요소들, 이를테면 지적인 요소 한 스푼, 말의 유희 반 스푼, 타이밍 감각 반 스푼, 상대방에 대한 호감과 존중 두 스푼이 적절히 배합된 인격이다.


며칠 전 일이다. 연말의 어느 저녁, 늘 그렇듯이 혼자서 학교 앞 식당에 신장개업한 곳을 갔다. 뜨끈한 대구탕 한 그릇 먹으러 갔는데, 송년회 모임인지 50대 남성 예닐곱 명이 테이블 세 개를 이어붙이고 한편 국을 떠먹고 한편 술잔을 넘기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재미있는 얘기’라며 ‘스님과 과부’ 시리즈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스님과 과부라면 제목부터 ‘성 농담’이 아니겠는가.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시리즈가 네 개 정도 이어지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 중 한두 개는 ‘웃기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본질은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좌중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이 ‘웃긴 얘기’를 하겠다고 하니 그런 ‘웃긴 얘기’는 평생 처음 듣는다는 식으로 과장된 ‘리액션’을 하고 있었다. ‘웃긴 얘기’는 허공에 흩뿌려지고 술기운에 취한 50대들의 고달픈 ‘사회생활’만 보였다. 


“진정한 유머는 경솔함이 아닌 진솔함에서 우러나온다. 자기에게 솔직할 때, 그리고 심각한 허세를 내려놓고 진지한 눈빛으로 타인을 바라볼 때 가슴에서 가슴으로 진동하는 익살이 솟아오른다. 그 웃음은 세상을 다르게 만날 수 있는 삶의 자리를 빚어낸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최근 『유머니즘』을 낸 사회학자 김찬호다. 뒤표지에는 ‘지금처럼 세상에 웃음이 절실한 시대는 없었다’고 써 있다. 이 문장이 이 책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언젠가 늦은 밤의 버스 옆자리에서 진지하게 『최신 유머집』을 읽고 있는 사람을 본 적 있다. 슬픈 풍경이었다. 유머가 사회생활에 필요한 또 하나의 스펙이라는 기사도 있다.




물론 김찬호의 『유머니즘』은 이러한 실용과는 무관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팽팽한 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아야만 하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유머’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알게 된다. 김찬호는 서문 ‘들어가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유머는 인간이 발휘하는 독특한 정신적 능력이다. 경험이나 상황을 새로운 각도에서 포착하는 직관, 그 의미를 더 높은 차원으로 변화시키는 창조성이 거기에 깃들어 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공감대를 확장하면서 소통에 활력을 불어넣고 유대감을 높여준다.”


아, 이러니 김태희나 하지원 같은 분들이 ‘유머’ 있는 사람을 이상형으로 꼽는구나. 김찬호의 특강을 한 번 들은 적 있는데, 모두가 둘러앉아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하면서 두 시간 내내 잔잔하게 웃는 시간이었다. 탄착점을 향해 질주하는 내 강의 스타일과는 완전히 달랐지만, 한편 그것은 내가 전혀 시도할 수도 없는 시간이었다. 

 

★ 이 글은 2019년 1월 14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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