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08

에펠탑을 왜 ‘비어 있는 박물관’이라 했을까

저자소개

정윤수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교수



노트르담 사원, 루브르 박물관, 퐁피두센터 같은 장소들과 달리 이 탑은 “그 안에 보여줄 것이 거의 없으면서도, 다른 어떤 장소보다도 많은 것을 보여주는 비어 있는 박물관”이다.

대학원의 ‘현대 도시 문화’ 수업을 마치면서, 기말 과제로 ‘나의 도시 이야기’를 쓰라고 했다. 현대 도시에 관한 복잡한 이론을 출제하려 했으나 이미 수업 내내 피드백이 된 사안이라, 기말 리포트는 자기기술적인 이야기였으면 했다. 다음은 리포트의 일부다.

“김포로 가는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 길이 마치 배를 타고 바닷가를 건너는 길처럼 느껴졌다. 시로 승격하기 위해 급하게 인구를 늘리던 김포에는 아파트만 한가득 만들어졌고 주변에는 도시의 생활이라고 할 만한 시설을 찾아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마치 서울에서 아주 먼 곳으로 떠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타벅스가 들어왔다. ‘드넓은 황금벌판 김포’에 드디어 스타벅스가 들어온 것이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명동에서 남대문, 시청, 광화문까지의 거리는 그야말로 ‘길’이 매우 많은 대도시였다. 어느 곳을 택하여 가도 방향만 놓치지 않으면 길이 나왔다. 반듯하게 세워진 거대한 건물들이 가득했고 조명들로 번쩍였다. 대도시의 거리는 수많은 인파와 차량과 소음 속에서도 나에게 나만의 시간을 갖게 해주는 곳이었다.” 

도시는 그런 곳이다. 도시공학의 관점에서, 행정의 관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부동산의 관점에서 도시는 진격의 거인처럼 웅대하고 날카로운 곳이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서로 다른 기억이 저장된 곳이며, 그 ‘서로 다름’ 때문에 형성된 저마다의 시선에 의해 달리 해석되는 공간이다. 물론 큰 차원에서 도시는 한 시대의 집합적 감수성을 배태하는 거대한 용광로이지만 그 끓어 넘치는 용광로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마다 각자의 기억과 정서가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도시를 일률적으로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도시의 기억을 획일적으로 박제화하는 것은 더 위험하다. 



‘기억과 풍경의 도시미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정수복의 『파리의 장소들』은 도시 공학과 행정의 차원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특히나 부동산의 관점에서는 전혀 눈에 띄지 않는 도시의 내면 풍경을 어떻게 응시해야 하는가를 차분하게 보여준다. 파리를 대표하는 350여개의 장소와 꼭 그만한 숫자의 예술가와 혁명가와 사상가들이 등장하는 이 책에서 정수복은 ‘도시, 역사, 기억, 예술’이라는 키워드로 조망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풍경을 그려낸다. 이를테면 그 유명한 에펠탑을 바라보면서 정수복은 일단 이 거대한 철골 구조물이 들어서던 때의 논쟁과 그 여파를 소개한 후 “에펠탑은 바라보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바라보는 주체 또는 바라보는 장소가 된다. 에펠탑은 주체와 객체, 능동태와 수동태 양쪽 모두가 될 수 있는 기이한 물체”라고 설명한다. 노트르담 사원, 루브르 박물관, 퐁피두센터 같은 장소들과 달리 이 탑은 “그 안에 보여줄 것이 거의 없으면서도, 다른 어떤 장소보다도 많은 것을 보여주는 비어 있는 박물관”이다. 사람들은 “동심으로 돌아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수직 상승의 꿈”을 꾼다. 

이렇게 도시는, 도시 안의 장소와 구조물과 상징 요소들은 역사적 시간을 견뎌내고, 문화적 논쟁을 버텨내고, 세속적 가치들과 부대끼며 우리 앞에 현존한다. 이 책은 파리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정수복이 서문 ‘책을 열며’에서 쓴 다음의 말은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를 서성거리는 사람들의 발걸음과 동일하다. 

“기억과 상상력, 과거와 미래도 서로 분리되지 않고 서로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개인적 차원에서나 집합적 차원에서나 다 마찬가지다. 그래야 정신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망각의 늪과 현실의 덫을 피하는 방법은 기억과 상상력을 결합시키는 일이다.”

★ 이 글은 2019년 1월 7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