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08

도시를 살리려면 정녕 무엇이 필요할까

저자소개

정윤수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교수



1950년대에 『건축포럼』의 편집장을 맡으면서, 랜드마크와 간선도로 건설로 인하여 파괴되어 가는 뉴욕의 ‘작은 삶’을 지켜낸 제이콥스. 그는 랜드마크 개발토건 영향력에 맞서 참다운 도시를 제대로 가꾸기를 희망했다. 


빌바오가 ‘문제’다. 어디서나 빌바오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페인 북부 도시 빌바오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 얘기다. 얼마 전, 전찬기 인천시 도시재생지원센터장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스페인의 빌바오가 “구겐하임 미술관 분점을 유치한 후, 그 건물을 티타늄으로 배 모양과 꽃봉오리 모양으로 만들어 스페인의 대표 관광도시로 거듭났다”고 하면서 “그 결과 건물 하나로 도시 전체가 살아난다는 ‘빌바오 효과’라는 말까지 나왔다”고 말했다. 


전혀 틀린 얘기는 아니다. 지속 가능한 도시 재생이 필요하다는 전제 아래 예를 든 것이므로 크게 논박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른바 ‘빌바오 효과’, 즉 구겐하임 미술관 하나 때문에 쇠락한 도시가 활기를 되찾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같은 의견, 주장, 현장보고서 등이 온 천하에 횡행한다. 예컨대 충남도의회 여운영 의원은 지난 10월 11일, 충청권이 외국인 관광객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건축물 하나가 도시 경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잘나가는 도시들의 공통점은 바로 랜드마크다. 충남에도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처럼 창의적인 건축물 유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광주·전남지역의 일부 언론과 지식인들도 빌바오 구겐하임을 예로 들면서 ‘518m’에 달하는 5·18기념탑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짐작컨대 빌바오를 그야말로 ‘관광객’의 관점에서 다녀온 듯싶다. 빌바오가 활력 넘치는 도시로 거듭난 것은 구겐하임 미술관 때문이 아니다. 1980년대 이후 산업이 침체되고 실업률이 무려 30%에 이를 정도로 쇠락했지만, 바로 이 시점부터 한 세대를 뛰어넘는 장기적인 도시 재생 계획이 준비되었다. 1989년 바스크 정부는 ‘Ria 2000 종합계획’을 수립하였다. 빌바오의 생명과 다를 바 없는 강의 수질 개선 및 수변 공간의 환경친화적 개선을 도모하였고, 보행과 대중교통 중심으로 도심 가로를 정비하였으며, 구도심과 강변의 신개발지를 트램으로 연결하여 도시 일상의 리듬이 단절되지 않도록 하였다. 그밖에도 쇠락한 도시 곳곳의 가로를 어린이, 여성, 노인 등이 맘놓고 다닐 수 있도록 고쳐 썼다.




구겐하임 미술관 때문에 한 해 1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모여든다는 것은 부분의 사실이다. 빌바오는 오염된 강을 되살리기 위해 미술관 건설비의 6배에 달하는 8억 유로를 십수 년 동안 투자하였으며, 단순히 ‘마음 놓고 걸어다닐 수 있는 도시’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서 도시 속으로 걸어다니고 싶은’ 빌바오를 만들었다. 이렇게 단기간에 효과가 나지 않지만 진실로 그 도시를 되살리는 방법을 모색하는 대신 ‘도시 재생=랜드마크 건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의심해봐야 한다. 


이런 점에서 제인 제이콥스의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은 뜨거운 고전이다. 1950년대에 『건축포럼』의 편집장을 맡으면서 랜드마크와 간선도로 건설로 인하여 파괴되어 가는 뉴욕의 ‘작은 삶’을 지켜낸 제이콥스는 1961년에 초판 발행된 이 책의 1993년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21세기의 복잡하게 변화한 도시 재생의 어떤 관점에 따라 부분적으로 비판적인 독서를 필요로 하는 책이지만, 랜드마크 개발토건 영향력에 맞서 참다운 도시를 제대로 가꾸고자 한다면 제이콥스의 말을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자연세계의 만물은 항상 변화한다. 우리가 정적인 상태로 본다고 생각할 때도 사실은 시작의 과정과 종말의 과정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보는 셈이다. 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도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자연의 생태계나 도시의 생태계를 조사하려면 동일한 종류의 사고가 필요하다. ‘사물들’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들이 스스로 많은 것을 설명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본질적인 것은 언제나 과정들이다.”  



★ 이 글은 2018년 12월 24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