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12

무직자 벤야민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저자소개

정윤수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교수




평전은 단순한 전기가 아니라 그 생애와 사상 혹은 작품세계를 평하면서 쓰는 일대기다. 김윤식이 일제강점기의 문제적 인간 이광수에 관한 평전을 시작하면서, 우선 그 가족관계와 학창시절의 학적부 같은 기록부터 제시한 것은 모름지기 ‘평전’이라고 한다면 해당 인물의 객관적 사실 자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실증적 자세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쳐서는 평전이라고 할 수 없다. 논평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자주 세평細評을 요구한다. 바늘 끝만한 작은 사실이 그 인물의 유년기를 지배한 정서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논평해야 한다. 그 시대의 집합적 정서와 그 시대를 압도했던 사상을 바늘 끝만한 증거를 확보하여 논증해야 한다.


그래서 달리 말하면, 그 수준에 이른 평전을 보면 저자의 왕성한 자료 취합과 그 분석에 놀라는 동시에 결국 그 평전의 주인공을, 한 인간의 깊은 내면세계를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평론가 권성우는 “평전은 인문 저술의 꽃”이라고 하면서 “그 인간의 결핍과 상처, 어두운 마음, 내면의 균열, 콤플렉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고, 그리하여 두 갈래의 위험성, 즉 “한 사람을 마녀사냥하거나 한 사람을 지나치게 숭상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고 말한다. 




하워드 아일런드와 마이클 제닝스가 쓴 『발터 벤야민 평전』은 이런 수준에 부합하는 본보기다. 가령 다음과 같은 부분, 벤야민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친 아내 도라 폴라크에 관한 기록을 보자. 두 저자는 벤야민의 청년기를 증언해 줄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람, 즉 프란츠 작스와 게르숌 숄렘을 인용하여 도라는 “늘 우리 그룹에서 남자를 잡길 원했다. 그녀가 원한 남자는 그때그때 지도자가 될 것 같거나 아니면 학문적으로 전도유망한 친구”작스였다는 증언과 “매우 아름답고 우아한 여성이었으며 벤야민과 내 대화에 낄 때는 대체로 상당한 열의와 공감을 보였다”숄렘는 증언을 제시한다. 미묘하게 상반되는 이 두 개의 증언에 의하여 이른바 ‘유명인사’의 여자친구나 아내에 대한 기묘한 이미지를 상쇄한다. 


사실 벤야민이 ‘고학력 무직자’로 집필과 강연만으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활동력과 통찰력 및 유능한 경영자 역할을 감당”해낸 아내 도라 덕분이었다. 도라는 20세기 초 영국의 대표적인 추리소설가인 체스터턴의 신작을 번역하거나 아동교육에 관한 라디오 방송을 하는 등 ‘유능한 활동력’으로 생계를 담당하였으나 벤야민은 친구 숄렘에게 ‘우리 부부의 처지는 막막하기만 하다’는 편지를 쓰는 정도였다. 실제로 곤궁했는가를 따져보기 위해 두 저자는 벤야민에 관한 다른 기록들을 살핀 후 단치히에 있는 카지노에 다녀왔던 것으로 보아 “자금이 전혀 없지 않았다”고 쓴다.


이런 바늘 끝만한 세부적 사실들을 제시하면서 두 저자는 점점 벤야민이라는 기이한 존재, 스스로 ‘가장 느리게 공전하는 별, 우회와 지연의 행성’, 즉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벤야민이라는 거대한 세계를 축조한다. 『반지의 제왕』 같은 영화가 아주 작은 디테일의 적층으로 빚어진 거대한 스펙터클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무려 900쪽이 넘는 벤야민이라는 ‘스펙터클 영화’, 그 ‘서론’의 마지막 대목을, 주요 지점을 간추려 읽어보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에 걸쳐 그의 미발표 원고 다수가 발견되었다. 모스크바의 소비에트 아카이브, 프랑스 국립도서관 등 의외의 장소에서 나온 원고도 있다. 벤야민 저작 전집과 편지 전집이 출간되면서, 이제 그가 쓴 거의 모든 글을 책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숄렘, 아도르노, 아렌트, 블로흐 등의 회고록도 많다. 본 평전은 지난 60년 동안 벤야민의 생애와 사유로부터 영감을 얻었던 수천 명 연구자의 어깨에 딛고 서 있다.”  



★ 이 글은 2018년 12월 17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