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12

유럽 사회를 뒤흔든 ‘68혁명’을 증언하다

저자소개

정윤수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교수


 



우리의 현대사, 그 분기점마다 핏자국이 서려 있어서, 남의 나라 현대사 특히 유럽이 겪은 ‘현대의 홍역’에 대해 조금은 인색했었다. 비틀즈나 우드스톡 페스티벌 같은 60년대 팝문화도 어렸을 때는 그저 잘사는 나라 젊은이들의 치기 어린 자유주의 정도로 여겼다. 그랬는데 꽤 많은 자료들과 기록들이 끝없이 나를 일깨워주었다.


여기 1935년에 태어난 유럽인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독일이든 프랑스든 벨기에든 상관없다. 1935년이면 파시즘이 발호하던 시기이고 열 살 때쯤에는 2차 대전으로 그 모든 나라가 화염에 휩싸였을 것이다.


문제는 전후 상황이다. 그가 스무 살이면 1955년쯤 되는데, 이때 유럽은 최악의 냉전구도로 재편된다. 전후 상황은 독일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프랑스의 경우 독일인과 관계를 가진 여성들을 거리로 끌고 다니며 희롱했다. 그 모습을 어릴 때 봤던 아이는 이제 어른이 되어서 그 잔인하고 황량한 전후 사회를 응시하게 된다. 


독일의 귄터 그라스는 『양철북』을 썼고,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데 시카는 『자전거 도둑』을 만들었으며, 프랑스의 프랑소와 트뤼포는 『400번의 구타』를 만들었는데, 이 모든 작품의 주인공이 전쟁 그 직후의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이 대학을 나와서 사회로 방출된 후 몇 년이 흐르면서 1968년이 되었다. 유럽 사회를 뒤흔든 ‘68혁명’ 세대는 이런 점에서 볼 때 파시즘과 전쟁을 겪으며 성장하고 전후 혼돈 속에서 멀미를 앓았던, 바로 그 상처 입은 세대다.


로널드 프레이저가 쓴 『1968년의 목소리』박종철출판사는 바로 이 혁명의 대열에 참여했던 사람들, 무려 230명이나 되는 ‘수많은 개인들’의 목소리를 담은 책이다. 전통 마르크스주의자, 상황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마오주의자,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자기 목소리를 갖게 된 자율주의자들. 그런가 하면 상류층에서 빈곤층까지, 정치인에서 예술가까지 수많은 개인들이 그 ‘사건’을 기억한다. 


그들은 전쟁과 그 이후의 반공주의로 인하여 형성된 유럽 전역의 위계질서, 관료, 억압기구 심지어 가족 내부에까지 주먹을 날렸다. “엿 먹어라 위계제, 권위, 차가운 엘리트주의적 논리를 가진 이 사회. 엿 먹어라. 꼭대기에 있는 비열한 우두머리들과 관료들. 엿 먹어라.” 당시 혁명에 참가했던 파리 낭테르 학생의 증언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선구자들의 기억을 통해서 우리는 그러한 사건들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거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그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재생하려고 하였다”고 말하면서 “기억은 언제나 기억되는 것에 뒤이어 일어난 사건에 의해 좌우된다”고 언급한다. 이럴 때는 일정하게 숫자가 중요하다. 서로 다른 경로에서 ‘68’이라는 수로로 모여든 230명의 직접 구술이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렇게 쓰는 중에 이탈리아 영화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암투병 끝에 로마에서 별세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향년 77세. 베르톨루치는 1941년 생으로 이탈리아의 모든 문제를 뇌 속에 집어넣고 있던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감독의 조감독을 시작으로 하여 1962년에 『냉혹한 학살자』로 데뷔하였고 그 이후 『혁명전야』1964년, 『거미의 계략』1970년, 『순응자』1970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등을 남겼다. 


각각이 문제작인데, 오늘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1900년』1976년과 『몽상가들』2003년이 직접적이다. 문학평론가 김현의 독백처럼 베르톨루치도 68혁명 세대이며 1968년 이후 한 살도 더 먹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68혁명을 자기 나름대로 되새김질하는 『몽상가들』에서 전통과 권위의 루브르 박물관을 기이한 인연의 세 사람이 달리기를 하는 장면이 그 증거다.




★ 이 글은 2018년 12월 10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