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12

일본 패전일에 섬광처럼 떠오른 아이디어

저자소개

정윤수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교수




1945년 3월 10일, 무려 10만여명의 사망자를 낸 미군의 도쿄 대공습에 이어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의하여 일본의 패전이 확실시된 상황. 1945년 8월 14일 저녁 9시와 다음날 아침 7시21분에는 천황의 ‘옥음’이 정오에 방송될 것이라는 예고가 나갔다. 전시상황이라 제한송전을 하였으나 각 지방의 임시방송소 14곳까지 특별송전이 이뤄졌다. 천황의 ‘옥음’은 일본 열도의 모든 곳에서 반드시 들려야만 했다.


아나운서가 먼저 말을 한다. “전국의 청취자 여러분께서는 기립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 그냥 앉아서 들을 수는 없는 목소리다. ‘옥음’, 곧 천황의 육성 아닌가. 천황은 직접 그 얼굴을 본 자는 눈이 멀게 된다는 언필칭 ‘현인신現人神’, 즉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온 신 아니던가. 천황은 “만대를 위하여 태평시대를 열고자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고 했다. 


모든 일본인들이 사실상 항복 선언이라고 받아들였듯이 출판 편집자 오가와 기쿠마쓰도 ‘옥음’을 그렇게 이해하였고, 그래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지방 출장 중이었는데 눈물은 그것으로 충분하였고, 도쿄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골몰하였다. 그러는 중 섬광처럼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그는 동료 출판사에 새 사업을 제안했다. 영어 회화책이었다. 천황이 패전의 방송을 하던 그날 떠올린 회화책 『미일회화수첩』은 불과 32쪽짜리였지만 그해 말까지 무려 350만부가 팔렸다. 




850쪽에 달하는 벽돌 책 『패배를 껴안고』를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일본 현대사 연구의 거장인 존 다우어의 이 책은 그가 직접 수집하고 정리한 방대한 사실들 자체가 압도적이다. 가히 일본이라는 기이한 나라의 패전과 그 직후를 마치 나날의 일기장을 샅샅이 훑듯이 재구성한 이 책은 패전과 전후의 혼란 속에서 현인신이라고 하는 천황이나 또 하나의 현인신으로 도쿄를 점령한 맥아더 같은 인물뿐만 아니라 오가와 기쿠마쓰 같은 평범한 일본인들이 살아남기 위하여 어떻게 몸부림쳤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책을 일본 ‘내부의 감수성’으로 읽어보면, 그들이 패전 당일에 『미일회화수첩』을 고안하고 무려 350만부나 구매한 것은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 쉬운 ‘약삭빠른’ 일본 기질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기민하게 그리고 철저히 행동했는지를 알 수 있다. 도쿄 사람들은 ‘맥아더 원수에게 편지 쓰기’ 운동을 벌였고, ‘1억 총참회’ 운동을 벌였으며, 천황도 평복을 입고 황거를 나와 맥아더의 집무실로 가서 굴욕적인 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으려고 했고, 맥아더는 그리고 미국은 ‘상징천황제’를 핵심으로 하여 1946년의 신헌법 제정과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및 1960년의 미·일안보조약을 정점으로 하여 확실하게 일본을 통제하였다. 그 10여년 동안 전후 일본 사회는 심각한 ‘교다쓰혼란과 굶주림’와 ‘데카당스패배적 허무주의’에 빠졌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사양』과 『인간 실격』이 이를 대표한다. 


이는 비단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다. 존 다우어는 ‘서론’에서 베트남전에서 돌아오는 미군의 감정은 “일본 제국의 군인들이 오랜 전쟁 끝에 패배를 떠안고 귀국해 조국에서 경멸에 찬 대접을 받았을 때” 느꼈던 감정과 다를 바 없다고 쓰면서, 전후 일본 사회를 샅샅이 해부한 이 책은 따라서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패전과 재건의 잡탕 속에서 천차만별의 맥락에 따라 거듭 나타나는 ‘책임’의 문제는 단지 일개 섬나라의 관심사는 아닌 것”이라고 쓰고 있다. 그러니 전후 일본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또한 동시에 “전쟁범죄에 대한 역사적 건망증, 그 기억과 망각의 패턴”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읽어볼 만하다. 아, 앞서 소개한 오가와 기구마쓰의 『미일회화수첩』은 이렇게 시작한다. “Thank you.”  



★ 이 글은 2018년 12월 17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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