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12

베토벤은 왜 기이한 음악가로 기록되었나

저자소개

정윤수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교수





쉰들러가 임의로 주물러댄 베토벤이 유일 정본처럼 남아버렸고 여기에 19세기 천재주의 신화가 덧붙여지면서 베토벤은 청각장애에 고집불통이거나 인류애의 화신이라는 기이한 음악가가 되고 만 것이다. 


수능도 끝났으니 편한 마음으로 다음의 문제를 풀어보자. 프랑스의 음악가 드뷔시의 대표작으로 교향시 「바다」가 있다. 이 작품은 어떻게 작곡된 것인지, 아래 보기에서 골라라.


보기 1. 

어느 날 드뷔시가 햇빛 찬란한 남프랑스 해변에서 산책을 하다가 지중해 바다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그 순간의 느낌을 자유롭게 표현한 곡이다.


보기 2. 

동시대의 ‘인상주의’ 미술가들이 서구 중심주의가 한계에 도달했음을 알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비서구 세계의 미술과 시각적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처럼, 드뷔시 역시 비서구 세계의 재현방식에 대한 수많은 자료를 분석하던 중 일본 목판화의 독특한 바다 묘사를 보고, 음악예술 또한 대상의 단순한 모사가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작가의 독자적인 미학이나 세계에 대한 인식을 표현…. 지문이 길수록 정답에 가까운 것이니 나머지는 생략한다. 2번이 정답이다. 이는 추측이 아니라 드뷔시가 남긴 기록들이 증빙해주는 사실이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는가. 일제시대를 시작으로 하여 지금 이 순간까지도 우리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지극히 ‘사적인 체험’의 결실로 여겨 왔다. 슈베르트의 쓸쓸한 가곡은 연애의 실패가 낳은 결실이고, 고흐의 격렬한 해바라기 그림도 자기 귀를 자를 정도로 정신착란 상태에 처한 우울한 화가의 고통스런 몸부림이라는 얘기다. 더러 사실과 부합하지만, 대개 그런 에피소드는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하며 결정적으로는 예술가 ‘개인’의 사적 세계에 그 많은 작품을 욱여넣다보니 개인 ‘예술가’의 미학과 세계관, 무엇보다 그것을 배태한 그 시대의 정치·사회적 맥락을 다 놓치고 만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베토벤이다. 폭군에 가까운 아버지, 가난했던 성장기, 때이른 청각장애, 거듭되는 연애의 실패에 의하여 그의 작품이 만들어졌다는 풍문이 근거 없이 한 세기 가까이 지속되는 바람에 우리는 베토벤의 강력한 음악에서 그의 생애를 추측하는 데 골몰한다. 그가 계몽주의에서 세계시민주의를 거쳐 혁명적 공화주의자로 스스로를 확장했음은 도외시하게 되며 ‘인류애’ 같은 펑퍼짐한 단어로 그의 교향곡을 설명하다 보니, 실은 그가 19세기 근대 국민국가 형성기의 프로이센 군주국의 영향력 아래에서 당대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고뇌한 지성임은 잊고 만다.


이 모든 책임을 안톤 쉰들러에게 물을 수는 없지만, 베토벤을 청각장애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 ‘아픈 만큼 성숙’해진 작곡가 정도로 축소시켜 버린 원인 제공자는 역시 쉰들러다.




여기 얀 카이에르스의 『베토벤』이 있다. 베토벤의 거의 모든 기록과 행적, 당대의 정치적 상황과 사상적 경향들, 당시 문화 환경과 음악가의 위치 등을 총망라한 이 책을 쓰면서 그 ‘서문-프롤로그’에 카이에르스 또한 쉰들러부터 질타한다. “혐오스러운 아첨꾼이자 기생충”인 쉰들러는 오로지 자신의 입지와 영광을 위하여 베토벤의 “여러 권의 대화집을 없앴으며 베토벤의 명예를 실추시킬 만한 내용을 삭제”하는 한편, 많은 부분을 나중에 새로 써넣기도 했다. 아쉽게도 쉰들러가 임의로 주물러댄 베토벤이 유일 정본처럼 남아버렸고 여기에 19세기 천재주의 신화가 덧붙여지면서 베토벤은 청각장애에 고집불통이거나 인류애의 화신이라는 기이한 음악가가 되고 만 것이다. 


카이에르스의 이 책은 비단 베토벤의 생애를 재구성했다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예술가를 거대한 시대의 벽화 속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의 한 전범으로 읽을 만하다. ‘서문-프롤로그’에서 카이에르스는 베토벤의 장례식 때 그릴파르처가 쓴 추도사를 인용하고 있다. “이 순간을 기억하고 간직하라. 그를 묻는 자리에 우리가 있었고,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는 눈물을 흘렸노라!” 이게 진짜 그 추도사에 값하는 베토벤의 평전이다.  



★ 이 글은 2018년 11월 26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