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04

입 안에 혓바늘이 돋게 만드는 군자‘들’ 이야기

저자소개

임옥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어느 날 내가 알고 있다고 착각했던 익숙한 ‘친’엄마는 사라지고 난감한 ‘새’엄마가 등장한다면? 새로운 엄마의 모습이 너무 낯설어서 예전의 엄마와는 전혀 딴판인 인물로 다가온다면? 엄마 안에 있는 다수의 엄마들이 다중인격처럼 나타난다면? 그처럼 곤혹스러운 상황과 ‘우리’는 어떻게 대면해야 할까? 


『전쟁 같은 맛』에서 그레이스 M. 조에게는 ‘적어도 세 명의 엄마가 있었다.’ 유년 시절 그레이스의 기억 속 엄마는 아름답고 야심만만한 ‘미시微示 정치가’였다. 무엇보다 첫 번째 엄마는 낯선 나라에 동화되려고 안간힘을 다했던 다재다능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백인 공동체 어디서나 눈에 띄는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카락의 라푼젤이었다. 1970년 무렵 셔헤일리스는 지금과는 달리 아시아인이라고는 엄마가 거의 유일했던 백인 농촌 공동체였다. 지금도 트럼프를 열성으로 지지하면서 이주민에게 적대적인 곳이라고 한다면, 반세기 전에는 오죽했으랴. 그들의 집단 무의식에 새겨져 있는 타자에 대한 두려움, 거부감, 차별과 마주하면서 엄마는 혐오를 매혹으로 바꾸고 싶어 했던 강인한 동양인 신부였다. 외항선원이었던 남편이 일 년의 절반을 바다에서 떠돌고 있을 때면, 낯설고 물선 곳에 홀로 남겨진 그녀는 끊임없이 환대의 식탁을 차리면서 이웃에게 음식의 미시 정치를 펼쳤다. 


어느 날 셔헤일리스까지 한국 입양아 자매가 들어왔다. 그들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지 익히 알고 있었던 엄마는 그들 남매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이자, 고향의 맛을 상기시키는 김치를 대접했다. 이주 초기 ‘김치 블루스’를 심하게 앓았던 기억이 엄마에게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 동네에서는 김치는커녕 배추마저 구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미셸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에서 보다시피 한아름마트에 가면 거의 모든 한국 식료재를 구할 수 있지만 말이다. 이주민 여성이 일자리를 갖는 것이 쉽지 않았던 시절 엄마는 이웃집 청소 도우미에서부터 야간 간수일까지 가리지 않았다. 사냥은 당연하지만 채집은 이상하게 여기는 공동체에서 엄마는 속에 불덩이를 품은 것처럼 틈만 나면 가시덩굴 숲을 헤매고 돌아다니면서 블루베리를 채집해서 수제 잼을 만들어 팔았다. 


그런 엄마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음에도 ‘나’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엄마는 ‘급성 정신병 삽화’를 앓다가 결국은 조현병 진단을 받게 된다. 온 동네를 먹여살렸다고 할 만큼 엄청난 양의 버섯을 채취하면서 산과 들을 헤매고 다녔던 ‘버섯 여사’는 십 년 동안 작은 방에 스스로를 가둔 채 거식증자가 되어 허깨비처럼 지낸다. 사회적 죽음을 맞이한 엄마는 나무의 정령이기도 한 오키/옥희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오키는 엄마한테 왜 “더럽다”고 할까? 엄마와 더불어 살고 있는 오키의 목소리는 엄마의 과거로부터 온 유령이었을까? 그토록 활발하고 솜씨 좋았던 ‘나’의 엄마 군자는 왜 그토록 위축되고 분열증에 시달리게 되었을까?  


영어식 표현에서 자신을 자기 곁에 둔다beside oneself는 그야말로 정신이 나간다는 뜻이다. 의식적인 자아가 통제하려고 하지만 견디다 못해 환청 같은 목소리들이 삐져나온다. 얼이 빠져 제정신이 들락날락하게 되면 현실지표가 흐려져서 “사실/허구”의 경계가 무너진 이야기를 공연하게 된다. 엄마의 분열된 언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그런 공연은 아니었을까?    


이처럼 첫 번째와 두 번째 엄마 사이의 균열을 분석하면서 만나는 엄마가 세 번째 엄마다. ‘나’는 첫 번째 엄마가 왜, 무슨 까닭으로 두 번째 엄마로 변신하게 되었는지 이해하려고 그처럼 음식 솜씨 좋았던 엄마가 왜 음식마저 거부하게 되었는지, 거식증자 엄마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음식을 대접하면서 엄마를 연구과제로 삼는다. ‘나는 엄마의 요리를 통해 정신적 탈식민화 과정을’(434쪽) 거치게 된다고 할 만큼.


엄마는 어린 시절의 ‘나’를 망시토리야, 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망시토리야는 영어의 몬스터monster의 일본식 변형몬스토리이 다시 한국어화된 엄마식 표현이었다. 엄마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고 한국어보다 일본어를 먼저 익힌 세대였다. 한국어, 영어, 일본어가 뒤섞인 하이브리드 언어가 망시토리야다. 망시토리야는 소위 튀기로 불리면서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멸시받고 차별받는 혼종에 대한 은유처럼 들린다. 2차 세계대전은 끝났고 한국은 해방되었지만, 엄마 세대는 다시 내전을 경험했다.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를 양분하면서 엄마의 가족은 냉전의 희생자가 되었다. 전쟁으로 아버지, 오빠 등 집안의 남자 가족을 거의 잃었던 엄마는 살아남기 위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야심을 제외하고는 무엇 하나 가진 것이 없었던 여자에게 그 시절 유혹적인 선택지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굶주렸던 그녀에게 기지촌에서 흘러나온 치즈버거는 아메리칸드림의 상징이었다. 그 시절 엄마가 겨우겨우 구해서 먹었던 치즈버거야말로 천상의 맛이자 ‘전쟁 같은 맛’이었을 것이다.


‘나’는 엄마의 과거라는 유령이 어떻게 귀환하는지 사실 ‘정확히’ 알지 못한다. 엄마는 기지촌의 양공주, 창녀라는 이름으로 한국 사회가 저버린 여성에 속했던 것처럼 보인다. 엄마는 살아남기 위해 ‘나’ 이전에 홀로 낳은 아이를 입양 보낸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상선의 선원으로 부산항에 들어온 나이 많은 미국 백인 남자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 처녀가 혼전에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도 한국사회에서는 버림받아 마땅한 ‘더러운’ 여자였다. 그것이 오키의 목소리는 아니었을까? 한국은 기지촌 여성들에게 기생하고 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워서 오히려 그녀들에게 수치심을 전가한 몰염치한 나라이기도 하다. 혼혈아들에게 가혹했고, 그들을 송출한 나라이면서도 한민족 운운했던 역사를 반성한 적이 없는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유부남이었던 백인 남자가 이혼하고 돌아와 주지 않는다면 엄마의 미래는 오페라 「나비부인」의 운명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자란 ‘나’는 부모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일찌감치 간파한다. 가난한 시골 농부가 되기 싫어서 최선을 다해 그곳을 탈출하고 상선을 타게 됨으로써 아버지는 안정적인 중산층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 행운은 제국의 백인 남성이었기에 가능했다. 엄마의 소원대로 ‘나’는 브라운대학, 하버드 대학원을 졸업한 교육 엘리트가 되고 학자가 된다. 아버지의 돈으로 최상의 교육을 받은 덕분에 ‘나’는 부모의 불평등한 권력관계, 미제국주의가 원주민들과 3세계에 저지른 폭력을 냉정하게 분석할 수 있는 학자가 된다. 셔헤일리스라는 지명 자체가 초기 식민주의자들이 몰아낸 인디언 원주민의 이름이기도 하다. 


엄마의 조현병은 다양한 발병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녀의 몸을 관통한 모멸, 수치, 차별을 견디어내면서 얻은 것일 수도 있었다. ‘굴욕과 학대,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들은 질병에 걸릴 확률이 더 높다. 가난하게 태어나거나,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질병에 걸릴 확률이 더 높다. 백인 동네에 사는 유색인들은 질병에 걸릴 확률이 더 높다. (…) 곤경과 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정신병에 걸릴 위험이 더 높’기 때문이다.(201쪽)


요즘은 자기 이야기를 고백하는 것이 대세다. 그럼에도 ‘미친’ 여자의 이야기herstory가 무심한 역사History 속으로 합류하면서도 어떻게 꼬이고 헝클어진 매듭이 되어 남자들의 이야기에 미세한 균열을 내고 있는지를 담담하게 분석하는 글쓰기와 마주하면서 독자로서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