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3

배수아의 글쓰기에 서식하는 삶과 ‘몽혼’의 순간들

저자소개

임옥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배수아 작가가 번역한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를 월독 회원들과 함께 읽었다. 배수아의 글쓰기를 오랫동안 읽어온 회원들은 ‘배수아스러운’ 번역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배수아가 번역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달걀과 닭』, 『G. H.에 따른 수난』을 읽으면 배수아의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처럼 다가온다. 번역과 창작, 에세이와 픽션의 경계 넘나들기가 배수아 글쓰기의 마법인지도 모르겠다. ‘배수아스럽다’는 이 특별한 느낌을 구체적으로 꼬집어 표현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작가-번역가-에세이스트로서 ‘배수아스러운’ 시적 문체가 잔혹한 꿈의 세계와 만나는 순간은 깊은 위로가 된다.             


배수아의 에세이 『작별들 순간들』이란 책 제목을 희한하게도 나는 ‘착각의 순간들’로 잘못 읽었다. 서점에서 책을 찾다가 그제야 알았다. 『착각의 순간들』은 어처구니없는 착시현상 탓이었다. 그런데 책 제목은 『작별의 순간들』도, 『작별들, 순간들』도 아니었다. 『작별들 순간들』이라는 사실을 한참 후에야 인지했다. ‘작별들’과 ‘순간들’ 사이에는 콤마도, ‘과’도 아무것도 없었다. 러시아 시인 마리나 츠베타예바가 그렇듯, 작가들은 문장부호 하나에도 수많은 의미를 싣는다. 제목을 이렇게 설정한 것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겠거니 막연히 생각하면서 책을 펼쳤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그런 궁금증에 관해 약간 언급한다. “처음에는 순간에 대해 쓰려고 했다”고. 그런데 글을 시작하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순간이 아닌 동시에 존재하는 많은 순간들이 되었다”고. 


『작별들 순간들』은 에세이라는 글쓰기 장르의 문법적 경계를 사뿐히 넘나들고 있으므로 단편들처럼 읽힌다. 단편 모음집인 『뱀과 물』에서의 인물들은 『작별들 순간들』에서의 ‘나’와 교묘하게 겹쳐진다. 화자로서 ‘나’는 현실적 인물임과 동시에 허구적 인물이다. 배수아 특유의 파편화된 서사, 가역적인 시공간은 ‘현실’ 속에서도 마법적인 꿈의 공간처럼 중첩된다.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자기만의 방』의 다양한 화자인 ‘나’처럼, 이 책에서 변화무쌍한 ‘나’는 글쓰기의 우주 속에서, 글쓰기에 의해서 존재하고 거주한다. 그런 ‘나’는 언어의 집에 안주하는 주인이라기보다 ‘벌레의 집’으로 자기 몸을 타자들에게 내어주는 이방인이자 유랑민이다. 

   

『뱀과 물』의 세계에는 무의식적인 꿈처럼 작별과 귀환, 삶과 죽음, 욕망과 고통의 순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산재한다. 그곳에서 시간은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가역적이다. ‘나’가 없는 곳에서도 ‘나’는 여기와 저기에 공존한다. 이런 세계에서 이것과 저것은 동시적이다. 일어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할 ‘나’는 오래된 과거에 존재했던 ‘나’이기도 하다. 그런 ‘나’는 화형당한 흉노족 어린 소녀이자, 스키타이족 여신이며, 시원적始原的인 뱀이자 물이다. ‘푸른 유리병 속’의 나비 떼이자, 오염된 개천에서 썩어가는 태아이며, 서커스단의 곡예사로 유랑하는 낯선 유목민이다. 그들은 불가역적인 일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유령처럼 귀환한다. 지극한 고통은 뱀의 아가리에 자기 머리를 처박으면서 느끼는 소름 끼치는 쾌락의 순간처럼 뒤집히기도 한다. 죽음의 쾌락이 곧 삶의 고통인 것처럼. 이분법적 사고에 사로잡힌 나에게 이런 세계는 깨고 싶은 악몽이자 몽혼夢魂이다. 


『작별들 순간들』에서 ‘나’는 ‘빌려온 애도’를 통해 애도와 애도 사이에, 작별과 작별들 사이에 공감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을 열어둔다. ‘나’는 첫 장면에서부터 ‘삼십 년이 지난 뒤 연인을 만난다.’ 독자로서 나에게 천박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삼십 년 전 연인은 ‘나’를 배신한 첫사랑이었을까? 혹은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처럼 불륜으로 헤어진 불같은 사랑의 앙금이었을까? 에세이라는 사실로 인해 이 책의 첫 문장은 이처럼 관습화된 호기심을 자극한다. 하지만 그 연인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이었다. 이처럼 ‘빌려온 애도’는 타인의 작별과 ‘나’의 작별 사이에 공감의 다리를 놓아준다. 그녀의 연인은 ‘나’의 연인이었고,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이었으며, 독자의 연인이었다. 그런 연인과 연인들 사이에 그녀들이 살해한 아이들이자 호모 사케르가 된 유년이 놓여있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뒤라스의 『고통』을 읽으면서 고통스럽다. 애도는 상실한 사랑에서 비롯된다. 작별한 연인은 고통의 기억을 남긴다. 삶은 상실의 과정이며 고통의 연속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이 암담한 고통은 ‘한 권의 책과 같다.’ ‘신은 책 읽기를 멈추지 않는다. 신은 햇살 환한 따뜻한 남쪽 바닷가에서 『고통』을 읽는 자’이므로. 신이 읽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책에 적힌 이름에 불과하다, 그 ‘책에 적힌 고통이 우리 자신이며, 마침내 자기 자신으로부터 아무것도 남지 않는 자, 작별하는 자’가 된다.(『작별들 순간들』 188쪽)   


배수아 글쓰기의 우주로 끌려들어 가면서 나는 원초적인 설화의 세계이자, 동시에 양자들의 우주 속에서 한 점으로 떠도는 새의 시점을 상상하기도 한다. 이상야릇한 양자 세계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현상은 얽힘entanglement의 효과다. 수억 킬로미터 떨어진 두 입자는 수수께끼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비록 인간 동물의 시각으로는 포착불가능하지만 상상할 수는 있는 세계다. 그런 세계의 놀라운 특성은 대상들이 여러 가지 상태로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양자중첩 상태라고들 한다. 양자중첩은 이것 혹은 저것either/or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both and이 동시적이다. 그것은 고전물리학으로서는 이해 불가능한 세계다. 우연과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양자들의 세계에서 고전적이고 기계적 시공간은 허물어진다. 우리는 분해되어 한 알갱이의 먼지 입자로 떠돌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뭉쳐져서 지금의 형상으로 재생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서 어떻게 만날지 누가 알겠는가. 이처럼 불확실성과 우연에 지배받는 세계라고 한다면? 그것은 『고통』을 읽고 있는 신마저도 모른다. 이런 우주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과연 존재할까? 모든 것들은 변신하고 변태한다. ‘나’는 빛 알갱이의 균이자 동시에 싹이다. ‘나’라는 형상은 흙 속의 지렁이로부터 자양분을 끌어올려 새싹으로 변신하고, 그런 새싹 주변을 날아다니는 나방 떼로 변태할 수도 있다. 그러니 죽음이란 없다, 에너지의 순환만이 있을 뿐. 


죽음 위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 배수아의 이야기는 위로가 된다. 자기를 아작아작 먹어치우는 엄마에게 태아는 눈을 반짝 뜨고 ‘엄마 이야기해줘’라고 말한다. 잔혹동화 속의 아이는 갈갈이 찢기는 고통 속에서도 엄마의 이야기가 그립다. 죽음의 공포 한가운데서 삶을 욕망하도록 해주는 엄마의 자장가가 이야기이므로. 


우리는 아픔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최초에 새를 가리킨 여자」에서처럼 우리는 최초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최초에 우리는 언어를 알지 못한다. 처음에 아이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도끼날이 미끄러지듯 아이의 발을 스치고 지나갔고 피가 흘러나오더라도, ‘그것이 나무가 흘린 피인지, 아니면 도끼가 흘린 피인지’ 혹은 자기가 흘린 피인지 아이는 알지 못한다.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는 순간 아이는 그게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 ‘아프다. 이게 바로 나야!’(같은 책 117쪽)라는 자기임의 인식은 통증의 감각과 더불어 시작된다.

  

이처럼 앎은 인식의 쾌락만이 아니라 고통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가역적으로 고통은 앎의 과정이기도 하다. 고통이 앎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앎은 앓음이고, 앓음은 곧 앎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배수아의 글쓰기가 주는 깊고 잔혹한 위로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