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6

가난한 부모는 왜 패륜아를 원할까?

저자소개

임옥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22년 노벨문학상은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에게 돌아갔다. 몇 년 전 월요일독서클럽 회원들과 함께 아니 에르노를 읽었던 기억조차 이제 가물거린다. 노벨문학상의 권위가 예전만 같지 않다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모양이다. 갑자기 아니 에르노의 작품이 베스트셀러 대열에 가세했다. 도서관에서도 대출 예약 대기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예전에 읽었을 때, 아니 에르노는 엘프리데 옐리네크처럼 강렬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일인칭 자전적인 허구가 형식실험에서 독특하다기보다는 익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그러니까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 속물근성이 발동했다. 


그녀의 소설은 일인칭 자전적 문체를 활용함으로써 ‘나’의 경험에 독자를 끌어들여 ‘나’의 수치스러운 고통이나 얼얼한 쾌락에 동참하도록 강요한다. 『빈 옷장』을 읽으면서 나는 전염된 수치심으로 고통스러웠다. 이 작품에서 에르노는 여성으로서 살아가면서 경험할 수 있는 원치 않는 임신과 불법 임신중단 시술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의 시선으로 전개한다. 그런 수법은 ‘나’가 직접 경험한 이야기라고 작가가 고백한다 하더라도 독자가 자신의 이야기로 읽을 수밖에 없는 서술적 장치라는 점에서 허구적이다. 바로 그런 허구성 때문에 반복적으로 변주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우려내고 고아내고 있음에도 ‘나’의 자전적 경험은 허구로 다가오게 된다.   


『빈 옷장』에서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가졌던 ‘나’ 드니즈 르쉬르는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문학 공부로 도피하고 시골 동네에서 거의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한다. 하지만 졸업을 앞두고 뒷골목에서 불법 낙태를 해야 할 위기 상황에 처한 ‘나’에게 시몬느 드 보부아르를 읽는 것은 ‘나’가 자궁을 가졌다는 이유로 경험하는 고통, 죄책감, 비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궁을 비워내고 텅 빈 옷장으로 만들려면 쾌락과 고통, 실패한 사랑의 산물을 삭제해야만 한다.  


자궁에 착상한 ‘것’을 난도질하면서 후벼 파는 ‘칼 같은 글쓰기’에서 나 또한 그런 경험이 주는 죄책감과 절망감을 공유했다. ‘나’와 함께 즐거움을 나눴던 남자는 도망쳐버렸다.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치기보다 ‘나’는 목숨을 걸고 불법 시술대에 오른다. 미혼모가 되는 순간 추락은 불 보듯 뻔하다. 중등교원 자격시험에 합격하는 것 말고는 ‘나’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수치와 고통을 무릅쓰면서 살아남는다. 이 지점에서 ‘나’의 개인적 경험은 여성 일반의 아주 특별한 사회적 문제와 합류한다.    


『남자의 자리』신유진 옮김, 1984Books, 2021의 첫 장면은 바로 그 중등교원 자격시험을 치르고 나오는 ‘나’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이제 ‘나’는 결혼을 통해 그토록 선망했던 부유하고 교양 있는 부르주아 계급의 일원이 되었고 문학 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과 마주하면서 ‘나’가 배신하고 떠났던 아버지의 계급을 다시금 기록하고자 한다!  


‘나’는 연민과 향수에 젖어서 ‘나’의 가족에 대한 기억을 시적으로 꾸미지 않는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부모한테 편지를 쓸 때와 마찬가지로 사실만을 건조한 문장으로 전달한다. 사회학 에세이처럼 아버지의 자리를 분석하는 건조한 글이어서 더욱 통렬하게 다가온다. 

     

‘나’의 아버지는 가난한 소작농인 할아버지 탓에 초등교육마저 제대로 받지 못했다. ‘나’와 달리 아버지는 책상머리에 앉아서 허송세월하는 대신 새벽 5시면 일어나 소젖을 짜고 마구간을 청소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는 군대에 감으로써 그런 지긋지긋한 농촌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나가게 되었다. 새로운 세상에서 아버지는 질 나쁜 사과주로 온통 삭아버린 치아들을 틀니로 바꿀 수 있었다.(33쪽) 그에게 도시는 새로운 문명 세계였으며, 그곳에서 노동자가 될 기회를 얻게 된다.  


한국에서 전후의 베이비붐 세대로 살았던 나는 똥구멍 찢어지는 가난을 경험했다. 시골 아이들에게 가난은 당연한 자연환경이었으므로, 가난하다는 의식조차 없었다. 모두가 가난했으므로 비교할 대상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의 극빈은 식민과 전쟁을 경험한 한국만의 특수한 현상이라고 짐작했다. 가난했던 그 시절 동네잔치나 장례가 있는 날이면 부모들은 이틀쯤은 아이들을 굶겼다. 굶주린 아이들은 잔칫상 아래서 아귀처럼 퍼먹었다. 그런 식탐의 대가는 배탈이었다. 그런데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를 읽으면서 기시감을 느꼈다. 소위 선진국이자 문화적으로 선망의 대상이었던 프랑스에서 그것도 근대 이후에도 이처럼 찢어지게 가난한 계층이 있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이 작품에서 ‘나’의 아버지는 1899년생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청년 시절을 보냈을 무렵은 20세기 초반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도 어딘가에 결혼이나 영성체 식이 있으면 그날 하루 배터지게 먹이려고 부모들은 아이들을 사나흘씩 굶겼다! 굶주린 위장에 갑자기 들어간 기름진 음식은 설사로 되돌아왔다고 전한다.  


‘나’의 아버지는 성실한 노동자가 되었다. 공장에 다니는 여성을 헤프다고 깔보던 시절에 ‘나’의 어머니는 도시로 진출하여 공장에 다녔다. 돈을 벌게 됨으로써 ‘나’의 어머니는 가족으로부터 독립과 자유를 얻게 된다. 그들은 공손하고 근면한 노동자들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약간의 저축으로 도시 변두리에서 가게를 차리게 된다. 두 사람은 공부 잘하는 딸 하나를 키워내기 위해 평생을 바친다. 물론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에게는 딸이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돈도 벌지 않으면서 손에 물 묻히지 않고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변명해주면서까지. 우리 딸은 장차 선생이 되려고 준비 중이라네 하면서.  


부르디외가 『구별짓기』에서 말하듯, 고등교육은 구별짓기의 장치 중 하나다. 교육받은 딸은 교양 있는 말투와 문법에 맞는 동사 변화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부모가 부끄럽다. 아버지의 교양 없는 말투는 무시로 튀어나온다. 아버지의 사투리는 계급적 열등함의 표시였다. 토지를 경작하는 대신 마음을 경작하려고 애썼지만, 아버지는 결코 교양 있는 계급의 태도와 취향과 말투를 습득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언어습관과 무식한 말투를 고쳐주고 싶은 ‘나’의 욕망은 아버지의 계급적 자취를 지우고 싶은 욕망과 다르지 않다. 아버지의 과거를 조잡하고 천박한 것으로 무시하는 부르주아 계급적 태도를 ‘나’는 잘 배운 교육의 대가로 내재화하게 된다. 학교 교육을 통해 ‘나’는 아버지의 언어를 부끄럽게 여기는 법을 배웠다. 학교 교육이 구별짓기를 더욱 정교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불평등한 세계가 조금이나마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자식이 자신을 멸시하는 계급의 머슴이 되는 데서 자식 농사 잘 지었다고 흐뭇해하는 우리네 부모들처럼, 자신의 자취를 죽이려는 패륜적인 딸이 ‘나’의 아버지는 자랑스럽다.  


그럼에도 ‘적의 언어’로 글을 쓰는, 지배자들에게서 글쓰기 기술을 훔쳐 와 사용하는 서민 출신 화자로서의 내 상황에 관해 기술하는 것이 『남자의 자리』에서 수행한 작업이었다고 『칼 같은 글쓰기』에서 에르노는 밝히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를 멸시하는 계급에 ‘나’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아버지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다면? 그렇다면 적들의 언어를 훔쳐 와서 쓴 ‘나’의 아버지 이야기는 적들의 무엇을 교란시켰을까? 자식이 자신을 경멸하면서 떠나는 패륜아가 되고 ‘개새끼’가 되는 것에서 자기 삶의 자부심과 자신의 성공을 찾는다고 한다면….


오로지 ‘탐심, 변심, 의심’과 같은 과거의 악덕이 신자유주의 시대 최대의 미덕이 되고, 돈만이 유일한 가치가 되어버린 시대에, 적의 언어로 폭로할 수 있는 아버지의 자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래도 ‘나’의 아버지는 패륜적인 딸의 살부殺父 충동으로 인해 죽어서 부활이라도 할 수 있었으니 엄청 성공한 인생으로 여겨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