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27

우리 시대의 미노타우로스 이야기

저자소개

임옥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인생에서의 성공이 결혼 여부에 달려 있던 시절, 소설가들이 애용했던 글감은 결혼 플롯이었다. 민담에서부터 18세기 소설에 이르기까지 결혼 플롯은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결혼에 이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20세기 동안 대부분의 결혼 이야기는 플롯의 종결이 아니라 갈등의 출발점이 되었다. 결혼이 곧 해피엔딩이자 인생의 성공이라는 등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플롯이 지배적이었다. 21세기 초반인 지금 헤아릴 수도 없이 우려먹은 결혼 플롯은 어쨌거나 낡고 진부하게 다가온다. 문학적 상상력은 상투성을 견딜 수 없어 한다. 문학이 세계를 ‘낯설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면, 21세기 소설가들에게 결혼 플롯은 더 이상 낯설지도 새롭지도 않을 수도 있다.     


낯설게 만들기의 차원에서 보자면, 21세기 초반은 ‘퀴어의 전성시대’처럼 보인다.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미들섹스』는 퀴어의 시대에 핫한 주제인 인터섹스를 다루고 있다. 흔히 ‘LGBITTQ’라고 일컬어지는 퀴어 스펙트럼 중 하나가 인터섹스Intersex다. 하지만 『미들섹스』에서 인터섹스인 ‘나’ 칼리오페/칼의 이야기는 방대한 서사의 흐름 사이사이에 책갈피처럼 끼워져 있어서,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놓은 잔칫상에 곁가지 음식처럼 놓여있다. 그런 의도적인 배치를 통해 이 작품은 화자인 ‘나’의 ‘퀴어적’ 실존적 삶과 소설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미들섹스』는 1920년대 미국에 정착하게 된 그리스계 이민 3대의 이야기이지만 스토리 바깥의 시간적 외연은 엄청나다. 인터섹스에 관한 그리스신화적 상상력과 20세기 의학 담론이 현재의 문화 속에 두텁게 겹쳐져 있다. 서사는 지금의 인상, 과거의 기억, 미래의 예측들을 무시로 넘나든다. 시점 또한 수시로 변한다. ‘나’의 이야기는 1인칭 시점으로, 가족사는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자주 전환되고, ‘나’의 신화적 이야기는 현실 속에서 객관적으로 실현되기도 한다. 이처럼 이야기로 넘쳐나는 서사를 정신없이 따라가노라면 방대한 분량임에도 지루할 겨를이 없다. 


이야기의 자취를 따라 시공간의 이동도 광범하다. 서사는 1922년 터키의 산골마을 비티니오스에서부터 미국 포디즘의 상징이었지만 쇠락해가는 자동차 산업도시 디트로이트의 흥망성쇠와 인종폭동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급진적인 신사회운동이 휩쓸었던 1960, 1970년대 샌프란시스코의 대학문화에서부터 대중문화운동에 이르기까지, 식스티나이너스 클럽의 ‘프릭쇼’와 퀴어문화에 이르기까지, 20세기 미국에서 전개된 문화인류학적인 여행담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이야기꾼의 해학적 입담은 청산유수에다 종횡무진이다. 작가가 ‘나’의 이름을 왜 칼리오페라고 했는지 이해가 된다. 칼리오페는 그리스신화에서는 서사시를 관장하는 뮤즈다.  

 

『미들섹스』에서 ‘나’는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자기 조상들이 모여서 하는 이야기를 듣고 전해준다. 과거 한때는 그리스 영토였지만 지금은 터키현재의 튀르키예의 통치 아래 괄시받는 그리스인들이 모여 사는 산골 마을 비티니오스에는 전쟁고아가 된 남매가 전설처럼 살고 있었다. 장차 ‘나’의 할머니가 될 데스디모나는 누에를 치면서 똑똑한 남동생을 알뜰히 보살폈다. 누에를 쳐서 먹고 사는 산골사람들에게 누에는 모르는 것이 없다. ‘대학살이 일어날 때면 누에가 뽑아내는 섬유질이 핏빛으로 변한다’는 민담은 현실이 된다. 그들이 사는 산골마을 또한 전쟁을 피하지 못하고 잠실蠶室은 쑥대밭이 된다. 그리스군이 영토수복 전쟁을 일으키고 이곳은 잠시 그리스인들에게 해방구가 되지만, 이번에는 케말 파샤가 이끄는 터키군이 쳐들어온다. 아르메니아, 터키, 그리스인 등 다민족이 이웃으로 살았던 그곳은 대학살이라는 역사적 비극이 벌어진다. 데스데모나/레프티 남매는 가까스로 그곳을 탈출하여 육촌 언니 수멜리아가 살고 있는 디트로이트에 정착하게 된다.  


이민 1세대 하층이주노동자 ‘나’의 할아버지 레프티는 살아남기 위해 금주법 시대 아마추어 밀주 밀매업자인 수멜리아의 남편 지즈모와 공범이 된다. 한국전쟁에도 파병되었던 ‘나’의 아버지는 해군장교로 제대 후, 디트로이트 인종폭동의 비극 속에서도 할아버지의 혜안화재보험을 들어둔 탓에으로 행운을 잡게 된다. ‘나’의 아버지 밀턴은 망해가던 할아버지의 술집을 접고 헤라클레스 핫도그 체인점을 성공시킨다. 그로 인해 이민 2세대만에 스테퍼니데스 가족은 보수적인 중산층 미국시민계급으로 부상하게 된다. 3대에 이르러 ‘나’의 오빠 챕터 일레븐은 당시 급진적 사상에 물든 대학생들이 으레 그랬던 것처럼 LSD를 하고 반자본주의적 히피 문화에 젖어 든다. 마치 ‘백년의 고독’처럼 흐르는 가족사에서 ‘나’ 칼리오페 스테퍼니데스의 정체성 찾기 여정이 얽히고설킨다.  

 

‘나는 두 번 태어났다. 처음엔 여자아이로, 유난히도 맑았던 1960년 1월의 어느 날 디트로이트에서. 그리고 사춘기로 접어든 1974년 8월 미시간 주 피터스키 근교의 한 응급실에서 다시 한 번 남자아이로 태어났다.’ ‘나’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눈먼 예언자 테레시아스처럼 여자와 남자로서의 삶을 모두 경험한다. ‘나’가 사는 곳의 지명 또한 미들섹스다. ‘우리’ 시대의 미노타우로스인 ‘나’는 15세까지 소녀로 양육되었다. 하지만 여자 칼리오페는 염색체가 XY인 ‘5알파 환원효소결핍증’이라는 희귀한 유전적 사례로서 남자 칼리이기도 하다. 


‘나’의 성정체성 탐색은 20세기 북미 인터섹스 운동을 관통한다. 유전적으로 성별이 결정된다고 보는 본질론도, 인간은 빈 서판blank slate이어서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환경론도 자신을 설명해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소녀로 양육되면서 섬세한 여성의 감정을 지녔지만, 남자의 몸으로 스며들어가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이면서 동시에 남성의 뇌를 가진 남자로 자신을 자각한다. 그럼에도 ‘나’는 양성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성의학자인 피터 루스 박사의 진단과 상담과 분석을 통해 ‘나’는 여자로 성정체성이 결정되고 꽃술처럼 가늘고 긴 페니스 절제 수술과 호르몬 치료를 받을 예정이다. 


웹스터 백과사전에서 ‘나’는 인터섹스 항목을 찾아본다. 1) 남성과 여성의 성기와 이차 성징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 2) 여러 종류의 혹은 모순되는 요소들이 조합으로 이루어진 존재. ‘나’는 유사어로서 몬스터를 보라는 참조사항에 충격을 받는다. 한때는 자웅동체가 완전체로서 신성한 사제이자 치유사가 되기도 했지만 이제 하나의 성으로 정체화되지 않으면 괴물이 되는 시대다. ‘나’는 루스 박사의 진단과 치료에 반항하면서 무작정 가출하게 된다.  


자신의 죄가 아니라 조상의 죄로 인해 괴물로 태어난 미노타우로스처럼, ‘나’는 근친결혼의 대가로 유전적인 결함을 물려받게 되었다. 평생 죄의식에 시달렸던 할머니가 임종 직전에 그 사실을 ‘나’에게 고백한다. 외부세계와 단절되었던 산골마을에서 살았던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친남매였다. 전쟁고아가 된 그들은 세상천지에 두 사람만 남게 된다. 그들은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남매임을 숨기고 결혼한다. 할머니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전설, 즉 근친결혼을 하면 기형이 태어난다는 예언은 ‘나’에게 이르러 발현된다.


디트로이트라는 도시의 영광과 몰락처럼, 나의 가족사도 운을 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2000년 베를린에서 파견근무를 하고 있는 ‘나’는 잘 살아남아서 여자사람 친구 줄리 키쿠치와 데이트할 생각에 모처럼 가슴이 설렌다.    

  

한 작가의 작품과 작품은 섬과 섬처럼 고립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섬과 섬을 건너가도록 해주는 징검다리가 없지는 않다.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경우 그 섬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그의 단편들이다. 지난 번 서평에서 언급했던 『불평꾼들』에 실린 단편 「신탁의 음부The Oracular Vulva」는 방대한 『미들섹스』를 단편으로 단출하게 재구성한 것처럼 읽힌다. 장편과 장편 사이에 띄엄띄엄 다채로운 주제로 씌어진 그의 단편에는 장편에 등장했던 인물들, 지명들, 주제들이 되풀이되면서 변주된다. 그런 맥락에서 유제니디스의 단편들은 장편과 장편을 상호텍스트적으로 이어주는 경제적인 징검다리처럼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