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26

우리들, 나의 상실, 그리고 지상에 구현된 낙원 ②

저자소개

문준일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우리들』은 이후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와 조지 오웰의 『1984』1949 같은 디스토피아 문학의 효시가 된다. 헉슬리는 『우리들』을 『멋진 신세계』를 쓰고 난 후에 알았지만 조지 오웰은 작품을 쓰기 전에 『우리들』을 접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들』을 단순히 디스토피아 문학, SF 문학의 효시로만 볼 수는 없다. 자먀찐은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관통했던 큰 논쟁, 도스토옙스키와 체르니솁스키의 논쟁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이어나갔다. 체르니솁스키가 『무엇을 할 것인가』1863에서 사회주의 사상에 기반을 둔 이상적 사회 건설의 꿈을 보여주자, 도스토옙스키는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에서 그 이상의 허구를 보여주었다.


『우리들』은 이러한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화두를 이은 하나의 철학 소설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들』이 쓰고 있는 유토피아와 SF의 장르 틀은 자신의 메시지를 포장하기 위한 하나의 마스크일 뿐이다.


러시아 혁명으로 인류사 최초의 사회주의 실험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혁명을 기다리고 완수한 사람들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순백의 도화지 같은 신생 소비에트 국가였다. 이제 이 빈 공백을 어떻게 채울까 하는 문제가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인류의 간절한 소원, ‘어린아이의 눈물’이 없는 평등과 행복의 세계가 이제 눈앞에 와 있는 것이다. 저마다 미래의 소비에트 국가는 이렇게 건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선언문들을 쏟아내었다. 그래서 사회주의혁명을 성공시킨 소비에트에서 유토피아는 문학 장르가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었다. ‘새로운 세계’ 건설에 대한 낭만적 혁명의 기운이 가득했던 당시 자먀찐은 미래 유토피아의 모습을 그리면서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기술 문명이 집단주의와 결합할 때 나아갈 수밖에 없는 방향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이상 사회를 인간의 손으로 건설하겠다는 거대한 이념들과의 도발적 논쟁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디스토피아와 SF의 장르 틀은 그가 제기하는 문제를 가장 잘 부각시켜주는 문학적 장치가 되었다.


1920년에 쓰인 이 작품은 이후 소련이 보여준 전체주의의 많은 모습들을 놀랍도록 예시하고 있다. 공개투표, 강력한 일인 독재 체제, 비밀경찰의 감시망, 주민들의 상호 감시, 문학의 사회 종속 등. 그래서 얼핏 보면 공산주의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신랄한 풍자라는 평가를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공포가 스며있다. 그것은 인류와 인류의 문명 그리고 인류의 살아 있는 영혼에 대한 염려에서 비롯된 공포다. 비대해진 국가의 통제 권력과 기술 문명이 전 인류에게 가하는 위험에 대한 경고였다. 이성 만능의 기술 문명과 그 문명의 이념적 조건인 집단주의, 그리고 집단주의에 수반되는 개인의 소멸 등은 인간존재의 근본적인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러시아 사상가 니콜라이 베르자예프의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유토피아는 지금까지 인간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들은 전혀 별개의 의미에서 우리들을 불안하게 하는 문제 앞에 서 있다. 즉 유토피아의 궁극적인 실현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시대와의 이단적 논쟁이었던 『우리들』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결국 출판되지 못했다. 소비에트 문단에서 자먀찐은 영원한 이단자였다. 1960년대 해빙기 시절에 많은 작가들이 복권되고 금지되었던 작품들이 재출간되었지만 그는 그 대열에 들어갈 수 없었다. ‘페레스트로이카’로 대변되는 개혁의 시기가 오고서야, 1988년 「깃발」Znamya 지에 러시아에서 최초로 소설 전문이 게재되었다. 하지만 긴 시간 끝에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알지 못했다.


『우리들』은 자먀찐의 대표작이자 그의 지난한 인생의 항로를 결정지은 작품이다. ‘흐름을 거슬러가는 것’에 익숙한 그의 성격에서 이 작품의 시원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젊은 자먀찐은 격동의 러시아 역사와 함께한다.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 페테르부르크 ‘피의 일요일 사건’의 아프고 힘든 기억들, 오데사 반란 진압의 목격 등. 그리고 그것은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요인이 된다. 1916년 미래의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쓴다. “갑자기 혁명이 송두리째 나를 흔들어 놓았소. 무언가 강력하고 거대한 어떤 것,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하늘을 향해 머리를 쳐든 어떤 것을 느꼈소. 그것을 위해서 나는 살 것이오.” 영원한 이단자이자 탐구자로서의 그의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예브게니 자먀찐은 1884년 1월 20일 러시아 중부 탐보프 현의 레베쟌에서 러시아 정교 사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말하듯이 레베쟌은 노름꾼, 집시, 말 시장과 가장 억센 러시아어를 쓰는 지역으로 유명했고,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 부닌 등 많은 유명한 러시아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들에서 이 지방을 다루곤 했다. 이러한 환경은 그의 작품들인 『어느 시골 이야기』Uezdnoe, 1912나 『알라트리』Alatyr, 1914에 투영된다. 자연적 환경 이외에도 가정에서의 교육이 그의 어린 시절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피아노 아래서 자라났다. 엄마는 훌륭한 음악가였고, 4권짜리 고골 전집은 이미 다 읽었다. 유년 시절 친구는 거의 없었다. 유일한 친구는 책이었다.”라고 그는 자서전에서 쓰고 있다.


인근 도시인 보로네쉬에서 금메달을 받으며 김나지움을 졸업하였고 1902년 페테르부르크 종합공과대학 조선학부에 입학한다. 김나지움 수석 졸업의 상징인 금메달은 곧 페테르부르크의 전당포에 맡겨졌고 다시는 찾지 못했다고 자먀찐은 말한다. 그는 조선학부의 여름 실습에 참가하여 러시아 전역을 여행하였고 콘스탄티노플, 베이루트, 예루살렘 등 근동에도 다녀온다. 1905년 오데사에서는 포템킨 호의 반란을 목격하기도 한다. 그 경험은 단편 『3일간』Tri dnya, 1913에 반영된다. 그의 학창 시절에 러시아는 격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그는 볼셰비키가 되어 혁명운동에 가담한다. “당시에 볼셰비키가 된다는 것은 가장 험난한 저항의 길을 가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볼셰비키였다.”라고 그는 자서전에 쓴다. 1905년 체포되어 독방에서 몇 개월을 지낸 뒤 고향 레베쟌으로 보내진다. 하지만 법을 어기고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그는 1908년 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부터는 학교에서 조선공학을 강의하게 된다. 그의 책상엔 배 설계도와 첫 단편의 초고가 뒤섞여 있었고, 그 원고가 1908년 「교육」Obrazovanie 지에 실리면서 문학계에 데뷔한다. 하지만 작가로서 이름을 얻은 것은 『어느 시골 이야기』가 「교훈」Zavety 지에 게재되고 나서다. 이 작품에서 그는 러시아 시골 마을의 낙후되고 구습에 사로잡힌 생활을 그려내었다. 『어느 시골 이야기』는 동시대인에게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그가 잡지 「교훈」을 중심으로 한 네오리얼리즘 작가 그룹에 합류하는 계기가 된다. 그 후 중부 시베리아의 황폐한 도시에 주둔한 군 수비대에서의 무시무시한 사건을 다룬 『변방에서』Na kulichkakh, 1913는 상세한 묘사가 너무 사실적이어서 자먀찐이 군 복무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을 정도였다. 결국 이 작품이 실렸던 「교훈」 지는 몰수되고 그는 법정에 서게 된다.


1916년 영국으로 보내진 자먀찐은 뉴캐슬과 글래스고의 조선소에서 러시아 쇄빙선을 건조하게 된다. 그가 수석 조선 기사로 참가해 제작한 ‘성 알렉산드르 넵스키’ 호는 러시아의 첫 쇄빙선이었다. 이 시절 영국에서의 인상은 『섬사람들』Ostrovityane, 1917과 『인간 사냥꾼』Lovets chelovekov, 1921에서 표현된다. 이 작품들에서는 인습적인 규칙들과 위선에 대한 풍자가 상징적 이미지와 제유적 기법에 의해 극적 표현을 얻는다. ‘영국의 테마들’은 이후 『우리들』의 주요한 모티프들과 주제로 다시 태어난다.


영국에서 자먀찐은 러시아 혁명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 시기를 러시아에서 보내지 않으면 더 이상 ‘러시아 작가’가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에 1917년 9월 낡은 배 한 척에 몸을 싣고 러시아로 돌아온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1917년과 1918년의 즐겁고도 끔찍한 겨울”이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미지의 어딘가로 유영하는 듯한 시기였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는 즐거웠지만 삶의 조건들은 끔찍했다. 추위와 굶주림에 작가들은 죽어갔다. 1919년 고리키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예술의 집’Dom iskusstv을 만들었고 이곳에서 예술인들은 자신의 활동을 이어나간다. ‘예술의 집’을 중심으로 한 문화적 활동과 10월 혁명 이후의 문화적 복구에서 자먀찐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세계문학’ 출판사에서 주도한 세계문학 번역에도 참가하고, ‘예술의 집’ 스튜디오에서 젊은 작가들에게 문학 강의도 하였으며, 그와 창작 기법이 유사한 ‘세라피온 형제들’ 그룹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혁명 직후 전시공산주의 시기의 혹독한 경험은 당시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한 세 단편 『마마이』Mamaj, 1920, 『동굴』Pechshera, 1921, 『용』Drakon, 1918에서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자먀찐은 전시공산주의 시기를 동굴에서 인류가 거주하던 선사시대로의 후퇴로 그리고 있다.


이전에 볼셰비키였던 자먀찐은 혁명을 환영하였다. 하지만 혁명이 도그마화되는 과정에서 전체주의 사회로의 이행이 일어나자 플라토노프라는 필명으로 좌파 사회주의 신문들과 논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제정 러시아 시기엔 볼셰비키였고, 혁명이 이루어진 소비에트 러시아에선 혁명의 도그마와 싸웠던 것이다. 자신의 말대로 그는 영원한 ‘이단자’였다.


당시 좌파 이데올로기에 대한 풍자와 시대적 분위기에 대한 답변이 『우리들』이었다. 자먀찐이 베를린으로 보낸 『우리들』의 원고는 1924년 영어로 번역되어 뉴욕에서 출판된다. 1927년에는 유명한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의 노력으로 프라하에서 간행되던 잡지 「러시아의 의지」Volya Rossii에 체코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아직 소비에트에서는 출간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우리들』은 초고를 읽어본 소비에트 비평가들에게 엄청난 공격을 당한다. ‘공산주의에 대한 풍자,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비방’, ‘사회주의의 미래에 대한 저속한 비방’, ‘용인할 수 없는 현상’ 등 여러 비판이 쏟아졌다. 자먀찐은 더 이상 어느 곳에도 글을 게재할 수 없게 되었다. 1929년에는 그가 쓴 희곡 『벼룩』Blokha, 1925이 모스크바 예술극장 상연목록에서 제외되었고, 비극 『아틸라』Atilla, 1928는 연출 자체가 금지되었다. 1931년 그는 소비에트에서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스탈린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에서 그는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는 것은 작가에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해외로 나가게 해줄 것을 요청한다. 허가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당시 문화 권력이었던 고리키의 주선으로 1932년 자먀찐은 프랑스로 떠난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자먀찐은 다른 망명 작가들과 별반 교류를 하지 않았다. 정신적 지향점이 그들과 달랐던 것이다. 그는 러시아 여권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길 기대했던 것이다. 1937년 3월 10일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러시아 작가’ 자먀찐은 숨을 거두었고 파리 교외의 묘지에 묻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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