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26

우리들, 나의 상실, 그리고 지상에 구현된 낙원 ①

저자소개

문준일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비극은 행진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느 다큐멘터리의 첫 장면에서 내레이션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 화면에는 2차 대전 동맹국 측 병사들의 일사불란한 행진과 깃발들이 가득했다. 행진에 숨겨져 있는 상징 작용과 본질을 이렇게 꿰뚫은 말이 있을까 싶었다. 집단 속에서 나를 잊고 집단과 동일시하는 최면 작용을 행진은 만들어낸다. 그래서일까, 전체주의 국가일수록 행진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하다.


러시아 작가 예브게니 자먀찐Yevgeny Zamyatin의 소설 『우리들』My, 1920의 첫머리에서 주인공 D-503은 산책 시간에 다른 번호들과 함께 대열을 이루어 행진한다. “번호들은 네 명씩, 일사불란하게 대오를 지어 열광적으로 박자를 맞춰가며 걸어갔다. 수백, 수천의 번호들. 푸르스름한 제복을 입고, 가슴에는 남성과 여성의 국민번호가 새겨진 황금빛 번호판을 달고. 그리고 나는 이 위대한 흐름의 무수한 물결 중의 하나.” (예브게니 자먀찐, 『우리들』, 석영중 옮김, 중앙일보사, 18쪽)


미래의 유토피아인 ‘단일제국’에서 주민들은 알파벳과 숫자로 호칭된다. 그래서 ‘번호들’이다. 자음은 남성, 모음은 여성이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단일제국은 ‘너’와 ‘나’가 사라진 ‘우리들’의 세계다. “그 누구도 ‘개인’이 아닌 ‘~ 중의 한 개인’이다.”(20쪽) 옷도 ‘유니파’라고 불리는 제복으로 통일되어 있다. 그리고 대열 속에서 주인공은 행복하다. 집단 속의 한 구성원으로 주인공은 ‘몰아’沒我가 주는 도취감에 빠진다. 이것은 종교적 도취감과 흡사해 보인다.


종교적 도취감과 비슷하다면 이들에겐 무엇에 대한 믿음이 있을까? 단일제국은 혁명에 의해 세워졌다. 오랜 ‘200년 전쟁’ 이후 단일제국의 건설자들은 혁명을 이루어내었다. 이 혁명은 ‘마지막 혁명’이다. 이후의 혁명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류 역사의 정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말한다. “우리는 끝까지 다 날아왔거든요. 우리는 원하는 걸 찾았어요.”(84쪽)


그렇다. 인간은 그들이 원하는 걸 드디어 찾았다. 인간의 오랜 꿈이었던 잃어버린 낙원, 에덴동산이 지상에 실현된 것이다. 역사시대 이후 인간을 괴롭히던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사라지고 이제 오직 ‘수학적으로 오류가 없는 행복’만이 있을 뿐이다. 마지막 혁명으로 세워진 이상사회, 유토피아가 이 소설의 배경인 단일제국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그것을 만들었다. 단일제국의 충실한 번호인 D-503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낸 이 진보를 신앙처럼 믿는다. 단일제국의 선은 그래서 직선이다. “위대한, 훌륭한, 정확한, 현명한 직선 ─ 선 중에서 가장 현명한 선…”.(16쪽) 직선은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할 수도 없는 선이다. 사회는 인간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인 이성과 그 이성이 만들어내는 과학 및 기술에 의해 점차 진보하고 완전해진다는 낙관적 믿음을 단일제국의 선인 직선이 상징하고 있다. 단일제국은 이러한 믿음의 산물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영원한 진보를 담보하고, 결국 인류가 잃어버린 낙원 에덴을 인간의 힘으로 건설할 수 있다는 그러한 믿음. 그리고 그 믿음대로 낙원은 건설되었다. 주인공 D-503은 “마치 내가, 과거의 수 세대가 아닌 바로 내가 구시대의 신과 구시대의 삶을 정복한 듯이 느꼈다. 바로 나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창조한 것처럼 느꼈다. 그리고 스스로 탑처럼”(18~19쪽) 느낀다. 여기서 ‘탑’은 바벨탑이다. 하늘에 닿으려는 인간의 꿈은 실현되었다. D-503은 완성의 정점에서 그들이 이룬 성과에 도취되어 있다.


무궁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인간만이 가진 최고의 무기 ‘이성’이 이룬다. 이 대목에서 단일제국의 공간적 유한성이 큰 상징을 가지게 된다. 단일제국은 ‘녹색의 벽’에 의해 자연과 분리된 한정된 공간이다. 200년 전쟁 이후 단일제국의 주민들은 아무도 녹색의 벽 너머에 가보지 못했다. 그곳은 인공적이고 조직적인 단일제국과 달리 거친 자연의 세계다. 이 ‘벽’을 사이에 두고 극단적 대립 구도가 형성된다. 인공과 자연, 이성과 감성, 행복과 자유, 유한과 무한이 대립한다. 그리고 에덴동산의 신화는 이 녹색의 벽과 만나 새로운 해석을 얻는다. 아담과 이브는 금기를 어기고 선악과를 먹어 눈이 밝아진다. 이로 인해 자신들이 나신임을 알게 된 후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당하게 된다. 에리히 프롬이 말하듯 에덴, 즉 낙원에서의 인간은 ‘자연과의 원시적 합일 상태’에 있었다.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은 그 원시적 합일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제 인간에게 남은 길은 하나뿐이다. 다시 에덴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불길이 훨훨 타오르는 칼을 가진 케루빔 천사가 에덴으로 가는 길을 막고 서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겐 잃어버린 전인간적인 조화 대신에 인간적인 새로운 조화, 즉 자신의 ‘이성’으로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앞으로 나아가는 길만 남아 있다.


그래서 아담의 아들 카인은 첫 번째 ‘도시’ 하녹을 건설하고 인류의 첫 문화영웅이 된다. 인간에게 부여된 주거지의 모습은 정원과 도시로 대별大別된다. 신이 부여한 낙원은 동산과 정원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만든 주거지는 ‘도시’다. 인간 문명의 역사는 도시의 역사다. 도시는 인간이 만들어나가는 스스로의 역사다. 신의 지배에서 벗어나 스스로 헤쳐 나가야 되는 인간은 자신만이 지니고 있는 이성으로 모든 것을 일구어나가야만 한다. 그 이성의 위력은 실로 대단하였다. 인간은 자연과 우주, 철학과 과학에서 엄청난 진보를 이루어낸다. 그리고 자연의 종속에서 벗어난다. 자연은 이제 합일의 대상이 아니라 정복하고 이용하는 대상이 된다. 이성에 의한 진보는 인간에게 신을 대체하는 새로운 믿음이 된다. 역사의 각 단계는 이전의 단계보다 진보하여 완성의 방향으로 향한다는 믿음이 정착되었고, 역사는 결코 신의 뜻이나 절대정신의 전개 과정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에 의해 창조된다. 그래서 이성이 인간을 완전하게 해방시켜주리라는 기대는 인간을 매혹한다. 앞서 보았듯이 『우리들』의 주인공 D-503 역시 산책을 하면서 단일제국의 모습을 황홀한 눈으로 바라본다.  


도시는 벽을 쌓아야만 건설된다. 벽은 물리적 공간을 한정시킨다. 그렇게 생겨난 유한은 인간 문명의 생성 조건이다. 이성은 유한의 공간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연과의 합일이 깨어진 인간에게 무한은 참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유한성은 단일제국의 이념적 기초이자 존재의 근거가 된다. 그래서 단일제국의 벽은 ‘모든 인간적인 것의 기초’다. 수학자인 주인공 D-503에게 친구인 시인 R-13은 시인이 되어보라고 권한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태껏도 그래왔지만 앞으로도 지식을 위해 봉사할 걸세.”(45쪽) 그렇지만 R-13은 그 말을 비웃는다. “지식이라! 자네의 그 지식이란 것이야말로 비겁함일세. 정말이라고. 자네는 단지 무한에 벽을 둘러치려 하고 있을 뿐이야. 그러나 벽 너머로 시선을 던지기를 두려워하고 있어. 바로 그거라고! 시선을 던져보게. 눈이 부셔 실눈을 뜰 걸세. 아무렴!”(46쪽)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진 인공의 낙원, 인간이 지상에 구현한 낙원은 모든 것이 통제되어 있는 사회다. ‘시간 율법표’에 의해 24시간이 통제를 받으며, ‘번호들’은 모두 정해진 시간에 기상하고 식사하고 노동한다.


“시간 율법표는 우리 모두를 현실에서 위대한 서사시에 등장하는 육륜의 강철 영웅으로 변신시켜준다. 매일 아침, 육륜의 정확성으로, 동일한 시간, 동일한 분에, 우리, 수백만의 우리는 마치 한 사람처럼 기상한다. 동일한 시간에 우리는 수백만이 한 사람처럼 일을 시작하고, 수백만이 한 사람처럼 일을 끝낸다.”(23~24쪽)


‘모든 번호에게는 다른 어떤 번호라도 성적 산물로 이용할 권리가 있다’는 성법전Lex Sexualis으로 사랑과 감정의 영역도 통제된다. 그리고 ‘나’라는 개인이 사라진 곳에 ‘번호’가 있을 뿐이고 ‘집단’의 논리가 있을 뿐이다. 번호들은 단일제국이라는 거대한 하나의 기계를 이루는 부속이며, 혹시 못 쓰게 된 ‘나사’는 당연히 폐기되어야 한다. 번호들은 유리로 만들어진 똑같은 집에 살며 똑같은 제복을 입고, 같은 시간에 화학 음식을 먹고 같은 시간에 일을 한다. 또한 만장일치로 영원히 선출되는 ‘은혜로운 분’의 통치를 받는다.


인간은 ‘자유라고 하는 미개한 상태’에서 벗어나 ‘수학적으로 오류가 없는 행복’의 상태로 접어든다. 충동도 사건도 에너지도 없는 완벽한 행복의 사회다. 하지만 D-503은 반란 그룹의 리더인 여주인공 I-330을 만나 개인의 ‘나’가 형성되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다. D-503이 새로운 시각을 획득하는 과정은 아담이 이브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고 타락하는 과정과 맥을 같이한다. ‘눈을 뜬 아담’은 자신이 살고 있는 단일제국이 완벽한 유토피아가 아니라 의혹과 공포의 디스토피아임을 알게 된다. 이렇게 디스토피아 문학의 시초는 탄생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