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31

과학의 유토피아, 욕망의 디스토피아 ②

저자소개

오정숙
경희대학교 프랑스어학과 교수





‘Nemo’는 ‘nobody’, 즉 ‘아무도 아니다’라는 뜻의 라틴어다. 네모 선장은 그 이름만큼이나 정확한 국적도 출신도 직업도 알 수 없는 기묘하고 알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그는 한때 런던, 파리, 뉴욕에서 공부한 지식인 엘리트이자,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라틴어를 똑같이 잘하는 다국어 구사자이고, 뛰어난 예술품들을 수집하는 예술애호가이기도 하다. 또한 네모 선장은 밤 깊은 시간 홀로 오르간을 연주하는 낭만적인 음악가이기도 하고, 지구상의 바다를 속속들이 탐험한 모험가이기도 하다. '노틸러스'호를 직접 조종할 수 있는 제1급 기관사이기도 하고, 500만 프랑을 들여 잠수함을 직접 제작하고 “프랑스 정부가 지고 있는 100억 프랑의 부채도 별로 어렵지 않게 갚을 수 있는”(1권 116쪽) 억만장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이는 그는 “불운한 사정 때문에 인간 사회와 인연을 끊은 사람”(1권 118쪽)으로 제시된다. 그가 인정받지 못한 과학자였는지, 상처받은 천재였는지, 정치혁명으로 인생을 망친 정치가였는지 궁금해하는 아로낙스 박사의 궁금증은 그대로 독자의 몫이 된다. 분명한 것은 네모 선장이 인간세계에 극심한 환멸을 느끼고,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소수의 동지들과 함께 자신만의 유토피아, 즉 네모 랜드를 '노틸러스'호에 구축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선장의 방에는 아일랜드의 독립운동가 오코넬, 미국을 세운 워싱턴, 노예제 옹호자의 총탄에 쓰러진 링컨, 흑인 해방의 순교자인 존 브라운 등 인류의 역사를 견인했던 위인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이들은 모두 기존 사회의 폭력과 억압에 대항하여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데 일조했던 영웅들이다.


실제 네모 선장은 난파선에서 거두어들인 금은보화를 지구상의 억압받는 민족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할 줄 아는 정의로움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네모 선장이 바닷속에서 고립된 생활을 추구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그는 여전히 인간이었다! 그는 아직도 인류의 고통을 느꼈고, 그의 위대한 관대함은 개인만이 아니라 억압받는 민족한테까지 미치고 있었다 !”(2권 147~148쪽). 또한 심해에서 진주를 캐는 인도인 잠수부가 상어에게 잡아먹히려는 순간, 선장은 상어와 싸워 그의 목숨을 구해준 후 그 불쌍한 잠수부에게 진주 목걸이까지 쥐여준다. 이 모습을 지켜본 아로박스 박사가 한 인간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 선장의 모습에 감동하자, 선장은 “그 인도인은 억압당한 나라의 주민입니다. 나는 그 사람의 동포이고, 내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그 사람의 동포일 겁니다”(2권 60쪽)라고 말한다.




네모 선장이 구현하고자 하는 유토피아는 폭력과 억압이 없는 세상이다. 선장이 비록 '노틸러스'호의 승무원들을 자주 ‘내 부하들’이라고 칭하긴 하지만 선장과 승무원들은 계급 관계로 맺어진 사이라기보다는 영혼으로 맺어진 운명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정체불명의 전투에서 부하 한 명을 잃고 거대 오징어와의 전투에서 부하 한 명을 또 잃자, 선장은 바닷속 산호 묘지에 이들을 정성스럽게 묻어주며 매우 비통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네모 선장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고통을 동료들과 함께 나누며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해 위기를 극복해 나간다. 배가 빙산에 갇혀 48시간을 버틸 수 있는 공기만이 남아 있을 때 선장은 부하들과 똑같이 빙산을 깨는 작업에 참여하고 부족한 공기를 똑같이 나눠 마시며 평등과 공감의 리더십을 보여 준다. 네모 선장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아로낙스 박사에게 선장은 인간의 법과 사회에서 벗어난 가장 독립적인 자유인이자, 동료와 인류의 고통에도 경제적 정신적으로 공감하는 진정한 유토피아의 리더다. 


실제 네모 선장은 아로낙스 박사에게 해저 도시라는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싶은 꿈을 토로하기도 한다. “나는 바다에 도시를 세우는 것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노틸러스'호처럼 아침마다 숨을 쉬기 위해 수면으로 올라오는 해저 주택들이 모여 있는 곳, 자유로운 도시, 독립된 도시들!”(1권 227쪽). 자유롭고 독립적인 이상향, 해저 도시를 건설하기 전 선장이 먼저 시도한 것은 '노틸러스'호를 타고 아직 인류의 발길이 닿지 않은 미개척지에 들어설 때마다 ‘공간의 명명하기’를 통해 그 땅의 점유권을 천명하는 것이다. 난파한 스페인 선박에는 ‘노틸러스의 은행’, 바닷속 사화산에는 ‘노틸러스의 집’, 해저의 해초밭에는 ‘선장의 숲’이라는 명명하기를 통해 네모 선장은 자신만의 네모 랜드를 구축하고자 한다. 1600년부터 네덜란드의 게리츠, 러시아의 벨링스하우젠, 영국의 브랜스필드, 미국의 모렐, 프랑스의 뒤몽 뒤르빌 등은 남극의 개척자였다. 네모 선장은 본인이 처음 발을 들인 남위 90도의 남극점에 도달하자 자기 이니셜이 새겨진 깃발을 흔들며, “나는 이제까지 발견된 모든 대륙의 6분의 1을 차지하는 이 땅을 나 자신의 이름으로 점유하겠습니다”라고 외친다. 네모 랜드에 대한 열망은 배 안에서 사용하는 모든 식기에조차 ‘움직임 속의 움직임Mobilis in mobili’이라는 구절로 둘러싸인 ‘N’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는 점에서도 엿보인다.


네모 선장의 유토피아는 완벽한 것일까? 또한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노틸러스'호에서 유일하게 탈출을 꿈꾸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아로낙스 박사의 일행인 고래잡이 네드 랜드다. 이 캐나다인은 이름에 포함된 랜드land가 암시하듯이 육지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네모 선장의 유토피아에서 네드 랜드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자유를 박탈당했다는 점이다. 선장은 아로낙스 박사 일행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지만, 이들이 '노틸러스'호의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에 육지로 돌아가는 것만은 철저히 금지한다. 유토피아적 공간은 네드 랜드에게 있어 기필코 탈출해야 하는 감옥이나 다를 바 없다. 그는 지독한 향수병에 시달리며 급기야는 “차라리 바다에 몸을 던질 겁니다! 여기서는 살 수가 없어요!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습니다!”(2권 331쪽)라고 외치고 만다.


반면 아로낙스 박사는 네모 선장과 함께 하는 해저 탐험을 통해 해양학자로서의 기쁨을 만끽하고, '노틸러스'호에 담긴 과학의 성취에 탄복하며, 억압받는 인류의 고통에 같이 아파하는 선장의 모습에 감동한다. 하지만 이 학자의 눈에 비친 유토피아적 공간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디스토피아적 공간으로 변모한다. 아로낙스 박사가 거의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이는 네모 선장에게서 원인 모를 증오와 분노를 발견할 때마다 박사 역시 점차로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게 되고 급기야는 일행과 탈출계획을 짜게 된다. 선장의 증오가 무엇 때문인지,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지 작가는 마지막까지 박사 일행에게도 독자에게도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다.  


선장이 점점 더 “우울하고 과묵하고 딱딱한 사람”(2권 306쪽)으로 변모할수록 아로낙스 박사 역시 자유에 대한 갈망을 점점 더 크게 느끼며 일행과 함께 탈출 계획을 짜게 된다. 




마치 이들의 탈출 계획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자신만의 유토피아가 곧 사라질 것임을 예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네모 선장은 아로낙스 박사에게 바다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담은 보고서의 존재를 밝힌다. “이건 여러 언어로 쓴 것입니다. (…) 내 이름이 서명되어 있고 내 평생의 연구 성과가 담겨 있는 이 원고는 물에 뜨는 작은 용기 속에 밀봉될 겁니다. '노틸러스'호에 타고 있는 우리들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가 그 용기를 바다에 던질 것이고, 그러면 그 용기는 물결을 타고 어디로든 흘러가겠지요”(2권 333쪽). 같은 과학자로서 전대미문의 연구 보고서를 후세에게 남기고 싶어 하는 선장의 모습에 박사는 존경과 연민을 동시에 느낀다. 하지만 박사는 네모 선장이 꿈꾸었던 유토피아가 궁극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우리 처지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당신과 관련된 어떤 일에도 관여할 수 없다는 소외감입니다. (…) 모든 인간은 바로 인간이기 때문에 존중받을 가치가 있습니다”(2권 335쪽)


첨단 과학 기술의 토대 위에 세상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을 자양분 삼아 건설된 네모 선장의 유토피아는 이 세계 밖의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그 자유를 억압함으로써 급격히 디스토피아의 세계로 변모한다. '노틸러스'호를 추격하는 전함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선장은 ‘N’자가 새겨진 검은 깃발을 펼치면서, “내가 법이고, 내가 정의요! 나는 핍박당한 사람이고, 저들은 압제자요! 내가 사랑하고 아끼고 존경한 모든 것, 나의 조국, 아내와 자식들, 부모가 저들 때문에 내 눈앞에서 죽었소!”(2권 363쪽)라고 외치며, 순식간에 전함과 무고한 승무원들을 침몰시킨다. 







복수를 마치고 '노틸러스'호는 노르웨이 해안 앞에서 멜스트롬Maelstrom, 즉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바닷속 깊이 사라져버리지만, 아로낙스 박사 일행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육지로 돌아오게 된다.


네모 선장은 '노틸러스'호를 본의 아니게, 또는 고의적으로 이 소용돌이로 끌어들였을까? 우리는 알 수 없다. 네모 선장은 살아 있는지, '노틸러스'호는 무사한지, 선장의 모든 것이 담긴 원고가 후세에 전해졌는지,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모든 것을 지켜본 아로낙스 박사의 다음과 같은 소망을 현대의 독자들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네모 선장의 놀라운 배가 가장 무서운 바다를 이겨내고, 그렇게 많은 배들이 목숨을 잃은 그곳에서 살아남았기를 바란다. '노틸러스'호가 살아남았다면, 네모 선장이 스스로 조국으로 택한 바다에 아직 살고 있다면, 그 거친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증오심이 가라앉기를 바란다! 입법자 노릇을 그만두고, 과학자로서 평화로운 해저탐험을 계속하기 바란다! 그의 운명은 야릇하지만 숭고하기도 하다.(2권 385쪽)


우리가 이 소설을 유토피아 문학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마지막 생존자들이 원래 소속돼있던 사회로 귀환해서 그들이 살았던 유폐된 유토피아적 공간을 기억한다는 점이다. 아로낙스 박사가 사회로 되돌아와서 한 첫 번째 행위는 약 10개월에 걸친 '노틸러스'호에서의 생활과 해저탐험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었다. 네모 선장과 '노틸러스'호는 사라졌어도, 기록하고 책을 출간하는 행위를 통해 그는 선장이 가졌던 유토피아적 꿈을 사회에 알리고 후대에 전수하고자 했다.


쥘 베른은 『해저 2만리』 이외에도 『지구 속 여행』 『달나라 탐험』 『80일간의 세계일주』 『지구에서 달까지』 등의 소설 시리즈를 통해 사이언스 픽션의 세계를 개척하며 인류의 과학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미래의 과학자들에게 실현가능한 상상의 과학기술을 제시한 작가였다. 하지만 그의 소설들이 탐험과 모험이라는 미명 아래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개척을 옹호하고 정당화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인간 희극』 의 발자크나 드레퓌스 사건으로 유명한 동시대의 에밀 졸라처럼 사회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낸 참여 작가의 계열에 속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하지만 그는 인류의 문학사상 가장 신비로운 인물 중의 하나인 네모 선장과 과학기술의 총아인 '노틸러스'호를 통해, 억압과 폭력이 없고 평등사상과 공동체의식이 만개한 풍요로운 이상 사회의 모습을 과학적 지식과 상상력에 기반해 매력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네모 선장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완벽한 고립의 유토피아를 구현하면서 동시에 복수와 증오라는 인간 욕망의 디스토피아를 상징하기도 하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경계에 선 인물이다. 또한 그는 그 시대에 싹을 틔워 현대에 만개하고 있는 과학의 유토피아를 실현하고자 했던 선구자이기도 하다. 네모 선장을 통해 쥘 베른이 보여주고자 했던 유토피아에 대한 꿈, 즉 기억의 유토피아는, 아로낙스 박사와 다른 생존자들의 기억 속에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을 읽은 전 세계 모든 독자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각인되어 또 다른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