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31

과학의 유토피아, 욕망의 디스토피아 ①

저자소개

오정숙
경희대학교 프랑스어학과 교수



“너는 바닷속 깊은 곳을 거닐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권리가 있는 것은 모든 인류 가운데 두 사람,

네모 선장과 나뿐이다.


― 쥘 베른, 『해저 2만리』


쥘 베른Jules Verne의 『해저 2만리』김석희 옮김, 열림원는 1869년 발간된 이래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전세계 어린이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며 어린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작품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의 수많은 동심은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진 '노틸러스'호의 행방을 궁금해하며 네모 선장과 함께 신비한 바닷속 모험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이 책은 기기묘묘한 해저 생물들의 삽화로 가득한 어린이용 판본으로 대부분 출판되고 있다. 하지만 원작은 총 2권으로 구성되어 전체 700쪽이 넘는 방대한 양을 자랑하며,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의 선구자적 작품으로서 해양학자에 버금가는 전문가적 지식과 과학기술의 역사와 현재를 응축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어린이가 아닌 어른을 대상으로 쓰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른을 위한 동화로 세계인의 극진한 사랑을 받아온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만큼이나 『해저 2만리』는 작가의 통찰이 가득 배어 있는 작품이다. 단순한 액션 어드벤처의 세계를 넘어 인간과 사회, 과학기술과 진보, 유럽의 신항로 개척과 식민지 건설, 인종차별과 노예제, 평등과 자유 등의 폭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평범한 인간들이 발 딛고 사는 지상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이자 무한의 세계인 바다를 배경으로, 자급자족이 완벽하게 가능한 풍요로운 독립 공간인 '노틸러스'호와 이 잠수함에서 인간 세상과는 철저히 유리된 자율 공동체를 꿈꾸는 네모Nemo 선장의 모습은 이 작품을 단번에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문학의 계보에 위치시킨다. 아로낙스Aronnax 박사는 해양생물학자이자 자연사박물관 교수라는 점에서 ‘바다’와 ‘육지’를 연결시켜준다. 다시 말해 네모 선장과 '노틸러스'호가 구현하는 바닷속  유토피아와 지금 여기로서의 속세적 육지를 연결시켜주는 매개적 인물이다.


『사피엔스』김영사, 2015의 저자 유발 하라리를 비롯한 많은 역사학자와 미래학자들이 제4차 산업혁명의 도래와 함께 2050년을 문명의 대전환기로 예견하고 있다. 쥘 베른은 18세기 중엽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함으로써 영국에서 시작된 제1차 산업혁명이 꽃필 무렵인 1828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나, 화학, 전기, 철강 분야를 주축으로 제2차 산업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인 1869년에 『해저 2만리』를 발표했다. 이 작품에 담겨 있는 유토피아에 대한 꿈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삶에 가져올 진보에 대한 열망 또는 신뢰와 연결되어 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지배하게 될 세상은 지금 여기에는 없는 유토피아를 열어줄 것인가?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 앞에서 우리는 잠시 145년 전 네모 선장이 꿈꿨던 과학의 유토피아를 엿볼 필요가 있다. 아직도 산업혁명은 진행 중이고 네모 선장의 모험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기에.





『해저 2만리』는 1866년과 1867년에 걸쳐 전 세계를 들썩이게 한 바다의 괴물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물렛가락처럼 길쭉하게 생기고 인광燐光을 발하며 고래보다 훨씬 크고 빠른 이 거대한 물체”(1권 11쪽)에 부딪쳐 대형 선박들이 조난당하는 사고가 거듭되자, 미국이 먼저 쾌속 순양함 ‘에이브러햄 링컨’호를 출항시켜 괴물을 추격하기로 한다. 파리 자연사박물관 교수이자 『심해의 신비』라는 책의 저자인 아로낙스 박사는 프랑스 대표로 이 원정대에 참여하게 된다.


아로낙스 박사는 이 소설의 화자이며 앞으로 일어나게 될 모든 사건의 관찰자이자 기록자다. 또한 '노틸러스'호와 네모 선장의 비밀을 육지로 알리는 매개자로 등장한다. 작가가 이 박사에 대해 알려주는 것은 과학자라는 직업, 마흔 살이라는 나이, 그리고 ‘콩세유’Conseil, 프랑스어로 충고라는 뜻라는 충직한 하인을 데리고 다닌다는 점뿐이다. 과학자로서 아로낙스 박사는 “이 만족할 줄 모르는 지식욕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된다 해도, 아직껏 아무도 보지 못한 것들을 마저 다 보고 싶다”(2권 13쪽)는 지적 호기심과 갈망에 충만한 인물이다. 따라서 바다 괴물을 추격하는 이런 초자연적이고 흥미로운 원정에 참여할 기회를 놓칠 인물이 아니다. 이 원정대에서 박사는 작살잡이의 명수인 퀘벡 출신 캐나다인 네드 랜드Ned Land를 만난다. ‘삼총사’ 아로낙스 박사, 콩세유, 네드 랜드는 네모 선장의 유토피아에 발을 들인 유일한 사람들이 된다.


에이브러햄 링컨 호는 당시 과학기술을 총체적으로 구현한 쾌속 순양함이다. 증기압력을 7기압까지 올릴 수 있는 과열 장치를 갖추고 있고 18.3노트약 34㎞/h까지 속력을 낼 수 있으며, 1867년 파리 세계박람회에 전시될 대포와 같은 모델인 최신형 대포가 장착되어 있다. 하지만 이 순양함은 괴물과의 충돌 후 허무하게 부서져 버리고 조난당한 박사 일행은 바다 괴물, 곧 노틸러스 잠수함의 선원들에 의해 구조된다.





아로낙스 박사의 시선에 따라 포착되는 노틸러스 잠수함의 내부는 무엇보다도 풍요로움이 넘치는 곳이다. 아름다운 도자기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값진 유리그릇들로 장식돼 있는 식당에는 거북이 고기, 고래 젖, 북해의 해초, 말미잘 잼 등의 온갖 푸짐한 식사가 늘 차려져 있다. 재료는 모두 해산물이고 네모 선장이 혼자 경작하는 바닷속 농장에서 대부분 수확된다. 조개류에서 채취한 옷감을 고둥에서 뽑아낸 염료로 물들이고 해초를 증류해 향수를 제조한다. 바다에서 제일 부드러운 해초로 침대를, 고래 뼈로 펜을, 오징어 먹물로 잉크를 만든다. 이 잠수함 속 세상은 풍요로움이 넘치는 완벽한 자급자족의 세계다. 수도꼭지만 틀면 더운물과 찬물이 나오는 쾌적한 욕실도 갖추고 있다.


네모 선장이 식당에 이어 두 번째로 소개한 곳은 바로 서재다. “어느 대륙의 어떤 궁전에 갖다 놓아도 될 만큼 훌륭한”(1권 133쪽) 서재는 1만 2,000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동서고금의 걸작들, 호메로스에서 빅토르 위고까지 주옥같은 문학 작품들 외에도 기계학, 탄도학, 지리학, 천문학, 해양학 등의 과학 서적들이 가득하다. '노틸러스'호가 처음 물속으로 잠수한 날 마지막으로 책과 신문과 잡지를 산 네모 선장은 그날이 자기에게는 세상의 종말이었다고 말한다. 아로낙스 박사는 장서들 중에서 1865년에 출간된 프랑스 수학자 조제프 베르트랑의 『천문학의 기초』를 알아보고, 이 잠수함이 완성된 것은 그 후이며 네모 선장이 바다 생활을 시작한 지 고작 3년 정도 되었음을 유추하게 된다.


아로낙스 박사가 세 번째로 둘러본 곳은 휘황찬란하게 불이 켜진 넓은 객실로 박물관이 자리 잡은 공간이었다. 그곳엔 라파엘로, 다빈치, 티치아노, 루벤스, 홀바인, 벨라스케스 등 유럽의 대가들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들라크루아, 앵그르, 메소니에, 도비니 등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들이 즐비했다. 또한 다른 쪽 벽면에는 유명한 악기 제작자의 오르간이 있고 베버, 모차르트, 베토벤, 하이든 같은 작곡가들의 악보들이 오르간 위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 객실 박물관에서 해양학자 아로낙스 박사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바로 네모 선장이 바닷속에서 직접 채집한 희귀한 식물과 조개 등의 해산물이었다. 





마지막으로 아로낙스 박사가 방문한 곳은 수도사의 오두막처럼 검소한 선장의 방이었다. 그곳에서 박사는 노틸러스 잠수함의 놀라운 과학적 비밀, 즉 잠수함의 동력이 바로 전기임을 알게 된다. 네모 선장은 해저 탄광에서 채굴한 석탄을 태울 때 나오는 열을 이용해 바닷물에서 나트륨을 추출, 수은과 섞어 나트륨 전지를 만들어낸다. 게다가 선장은 전기 시계를 사용하고 있었고, 배의 속도계 역시 전기회로를 이용한 것이었으며 모든 요리 또한 전기를 이용해서 만들고 있었다. “정말 놀라울 뿐입니다, 선장. 당신은 전기의 진정한 동력을 발견하셨군요. 언젠가는 사람들도 그것을 발견하겠지만…”(1권 149쪽)이라는 아로낙스 박사의 예견대로 현재 인류는 전기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미 1831년에 패러데이가 전류를 만들어내는 발전기인 다이너모dynamo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바 있지만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발명한 때가 1879년임을 고려하면, 전기를 동력으로 활용한 잠수함이라는 콘셉트는 쥘 베른을 최소한 50년은 앞서간 과학소설의 선구자로 위치시킨다.


'노틸러스'호는 외부 선체가 두께 5㎝의 강철로 제작되었고, 내부가 수밀격벽水密隔壁으로 둘러싸여 선체에 물이 새더라도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안전하며, 특수 탱크에 공기를 저장해 오랫동안 바닷속에 머무를 수 있고, 당시 쾌속 순양함 속도의 두 배인 30노트약 56㎞/h의 속도가 가능하다. 네모 선장은 이 잠수함의 모든 부품을 세계 각지에서 각기 다른 명의로 주문 제작해 바다 한복판에 있는 무인도에서 소수의 동료들과 함께 '노틸러스'호를 완성한 후 섬에 불을 질러 모든 흔적을 없앤다. 이 “현대 산업의 걸작”(1권 174쪽)은 자본과 기술을 소유한 극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극비리에 제작된 것이다.


이 잠수함에는 20명쯤 되는 건장하고 힘센 선원들이 탑승해 있는데, 유럽인들로 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언어로 소통하고 외부인인 아로낙스 박사 일행과는 어떤 관계도 맺지 않는다.




『해저 2만리』에 묘사된 '노틸러스'호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 보들레르가 「여행에의 초대」L’invitation au voyage라는 유명한 시에서 노래한 것처럼, 거기서는 모든 것이 질서 있고 아름답고 사치스럽고 고요하다. 네모 선장에게 '노틸러스'호는 자기가 꿈꾸는 세상을 구현하게 해 주는 유토피아적 공간이다. 이 잠수함이 떠다니는 바다, 식량과 동력과 재물까지 안겨다 주는 바다, 평화와 자유가 보장된 이 광활한 바다 역시 확장된 유토피아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바다는 자연의 광대한 저장고입니다. 지구는 바다에서 시작되었고, 결국 바다로 끝날지도 몰라요. 바다에는 완벽한 평화가 있습니다. 바다는 폭군의 것이 아닙니다. 해수면에서는 아직도 부도덕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고, 인간들이 서로 싸우고 서로를 파멸시키고 온갖 잔학 행위를 저지를 수 있지만, 수면에서 10m만 내려가면 그들의 힘은 사라지고, 그들의 영향력은 시들고, 그들의 권위는 자취를 감춥니다. 바다의 품에 안겨서 살아보세요. 오직 바다에서만 인간은 독립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어떤 지배자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누구나 자유롭습니다!”(1권 129~130쪽).


'노틸러스'호는, 육지의 사람들에게는 그 존재조차 상상할 수 없는 ‘오우토피아’Outopia,없는 곳이자, 네모 선장을 포함한 동지들에게는 풍요로움과 평화, 자유가 공존하는 완벽한 ‘에우토피아’Eutopia, 좋은 곳가 된다. 즉 ‘어디에도 없는 좋은 곳’, 유토피아Utopia가 되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