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24

노동과 예술, 휴식이 어우러진 삶 ①

저자소개

오봉희
경남대학교 영어학과 교수




‘없는 곳’이 한때 내 이름이었다, 나는 아주 멀리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플라톤의 국가와 어깨를 견줄 수 있고,

어쩌면 그 국가를 능가할지도 모른다(왜냐하면 그가 공허한 말로

묘사하기만 한 것을 나는 훌륭한 법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부에서 새 삶을 얻도록 했기 때문이다).

‘좋은 곳’이라고 마땅히 사람들은 나를 불러야 한다.


위의 인용문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초기 판본에 실린 「유토피아 섬에 관한 여섯 행」이란 시의 전문이다.1 이 짧은 시는 ‘없는 곳’인 유토피아가 ‘좋은 곳’인 에우토피아eutopia를 지향하고 있음을 간명하게 보여준다. 첫 행이 없다는 부정적 의미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거리감을 표현하는 반면에, 나머지 행들은 좋다는 긍정적 의미와 이미 실현되었다는 거리감의 소멸을 강조한다. 그리고 시의 초점이 없음과 거리감에서 좋음과 거리감의 소멸로 이동함에 따라 유토피아의 허구성과 불가능성보다 이상성과 실현 가능성이 부각된다.


이상적 사회인 유토피아는 이성의 힘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근대적 믿음과 결합하면서 아직은 없지만 언젠가는 인간의 힘으로 구현할 수 있는 미래 사회의 청사진이 된다. 그리고 근대는 바우만Zygmunt Bauman의 표현을 빌리면 “유토피아를 이루기 위해 사는 세상”의 모습을 취한다. 과거보다 현재가, 현재보다 미래가 더 나은 것으로 그려지고, 이런 진보의 관점에서 보면 현재는 과거에 꿈꾸었던 유토피아가, 미래는 현재가 꿈꾸는 유토피아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실현된 것으로 자리매김된다. 하지만 근대 역사의 많은 부분은 더 나은 사회로의 이행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진보가 아니며 실현된 유토피아라고 믿었던 현실이 사실은 실패라는 것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따라서 현실의 모순과 문제들이 해결된 유토피아 사회에 대한 전망은 바우만의 지적처럼 “언젠가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것의 매력보다는 오히려 이미 이루어진 것에 대해 느끼는 반감”에서 추동력을 얻는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말 영국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노동의 예술화, 예술의 생활화를 주창한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를 추동한 것도 당대 현실에 대한 강한 반감이었다.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는가」How I became a socialist에서 모리스는 “아름다운 것들을 생산하고자 하는 욕망을 제외하면 내 삶의 주된 열정은 현대 문명에 대한 혐오였고 혐오이다”라고 공언하면서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 사회주의로 대체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힌다. 모리스가 말하는 사회주의란 “부자도 빈자도, 고용주도 고용인도, 게으른 사람도 혹사당하는 사람도, 머리가 아픈 정신노동자도 마음이 아픈 육체노동자도 없어야 하는 사회 상태, 한마디로 말해 모든 사람이 평등한 조건에서 살면서, 낭비 없이, 그리고 한 사람에게 가해지는 위해는 모두에게 가해지는 위해를 뜻한다는 것을 충분히 의식한 상태에서 일을 처리하게 될 사회 상태”를 뜻한다. 이런 사회주의를 모리스는 ‘실용 사회주의practical socialism’라 칭하며 미를 창조해내는 예술과 그 자체로 즐거운 노동이 일체가 되는 ‘품위 있는 삶’을 그것이 지향해야 할 목적으로 설정한다. 영국 유토피아문학의 대표작 중 하나인 모리스의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News from Nowhere은 실용 사회주의가 구현된 사회의 모습을 로맨스로 풀어내고 있는 작품이다.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2은 19세기 말을 기준으로 하면 미래인 2000년의 보스턴을 배경으로 모든 산업의 국유화가 이루어진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벨라미Edward Bellamy의 『뒤돌아보며: 2000년에 1887년』Looking Backward: 2000-1887에 대한 일종의 반박 형태를 취하는 작품이다. 벨라미의 작품은 1888년 처음 발표되었고 1889년에 재판이 나온 후에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모든 산업과 사유재산의 국유화를 주창하면서 벨라미의 유토피아 모델을 현실에 적용하려는 실험적인 유토피아 공동체 건설 운동들도 생겨났다. 하지만 모리스는 1889년 6월 21일 자 『코먼윌』에 기고한 논평에서 극단적인 중앙집권화를 이룬 국가사회주의의 형태를 띠는 벨라미의 유토피아 사회를 강하게 비판했고, 이 비판은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에서 사유재산뿐만 아니라 국가도 없으며 전 민중이 토론과 협력에 기초한 다수결 원칙에 따라 공동체를 운영하는 유토피아 사회의 구상으로 이어졌다. 


유토피아 작품의 전형적 구조 중 하나는 주인공이 우연히 미지의 유토피아에 가서 그곳의 사회구조 및 운영 방식과 사람들이 누리는 이상적인 삶을 직접 목격한 후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일종의 액자소설 형태로 시작되는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도 이런 구조를 띠고 있다. 윌리엄 게스트William Guest는 어느 날 밤 한 모임에서 “혁명 직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3쪽)에 관한 토론을 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계속 토론 주제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날을 볼 수만 있다면! 그날을 볼 수만 있다면!”(4쪽) 하고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평화와 휴식과 청결함과 미소 짓는 선의의 나날들에 대한 (…) 막연한 희망”(4쪽)을 품고 잠자리에 든다. 다음 날 그는 하룻밤 사이에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 200여년이 넘게 지난 미래 사회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미래 사회에서 처음 만난 사람인 딕Dick에게 자신은 이방인이라고 말하는데, 장소는 그대로지만 시간 이동을 한 게스트는 실제로 이방인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그의 이름 자체에도 이방인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딕의 친구인 밥Bob이 그를 ‘게스트guest’라고 부르면서 이름을 물어보자 그는 “당신이 나를 게스트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성이기도 하니까, 괜찮으시다면, 거기에 윌리엄을 덧붙이는 것으로 하지요”(14쪽)라고 답한다. 밥은 게스트를 손님이란 뜻의 일반명사로 사용했지만 그는 이것을 이름으로 고유명사화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그를 게스트라고 부를 때 이 호칭은 이름과 손님을 동시에 뜻하게 된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미래 사회는 19세기의 영국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게스트가 속해 있는 19세기 사회의 모순과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1    이 시의 전체 제목은 “Six Lines on the Island of Utopia Written by Anemolius, Poet Laureate, and Nephew to Hythloday by His Sister”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good place’는 ‘좋은’이란 의미를 나타내는 ‘eu-’와 ‘장소’를 뜻하는 ‘topos’, 접미사 ‘-ia’로 이루어진 그리스어 ‘eutopia’의 영어 번역이다. 흥미롭게도 ‘eutopia’의 영어식 발음은 ‘utopia’와 동일하다.


2    이 작품은 국내에 『에코토피아 뉴스』로 번역되어 있다. 번역자 박홍규는 「역자 머리말」에서 이 작품이 생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Nowhere’를 ‘에코토피아’로 옮겼다고 밝히고 있다.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은 당시 모리스가 참여하고 있던 정치조직인 사회주의동맹Socialist League의 공식 주간지 『코먼윌Commonweal』에 1890년 1월 11일부터 10월 4일까지 연재되었고 같은 해에 책으로 출판되었다. 로버츠 브라더스Roberts Brothers 출판사가 낸 이 책은 모리스와 아무런 협의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비공식 판본으로 여겨진다. 모리스가 직접 내용을 수정한 개정판은 1891년에 리브스 앤드 터너Reeves & Turner 출판사에서 나왔다. 필자는 1891년 판본을 토대로 옥스퍼드대학 출판사가 편집한 2003년 판본을 참고했다. 인용 부분은 필자의 번역임을 밝혀둔다.






두 사회의 차이는 딕과 게스트의 대화와 딕의 증조부인 해먼드Hammond 노인과 게스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문답 형태의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우선 눈에 띄는 차이는 미래 사회에는 자본주의사회의 근간인 사유재산과 이른바 ‘신성한 소유권’이 폐지되고 없다는 점이다. 화폐를 매개로 하는 물건이나 서비스 등의 교환과 그런 매매에 필수적인 상업적 도덕성commercial morality도 없다. 시장은 있지만 교환가치에 의한 이익 창출의 장소가 아니라 사용가치 때문에 물품을 필요로 하는 개인에게 해당 물품을 제공하는 장소다. 사적 소유권으로 인해 발생하는 빈부의 격차도 없을 뿐만 아니라 “빈곤 자체가 사라지고 없다”(56쪽). 딕이 끄는 마차를 타고 해먼드 노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게스트는 빈곤한 사람들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며 의아해한다. 딕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아프면 집 안에 있을 텐데 왜 거리에서 아픈 사람을 보리라 생각하느냐고 반문한다. 딕은 게스트가 사용하는 ‘빈곤한’이란 뜻의 ‘poor’를 ‘건강이 나쁜’이란 의미의 ‘poorly’로 오독하고 있는 것이다. 게스트가 ‘rough’라는 단어를 써서 아픈 사람들이 아니라 “삶이 고된 사람들”(22쪽)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충 설명하지만 딕은 이해하지 못한다. 빈곤은 19세기 말 영국의 심각한 사회문제였지만 유토피아가 구현된 미래 사회에는 그런 용어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사유재산의 폐지는 법이 없는 사회를 가능하게 했다. 딕과 클라라Clara는 결혼해서 자식까지 두었지만 클라라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바람에 헤어졌다가 재결합하게 된 이야기를 해먼드 노인에게 들으면서 게스트는 이혼 법정을 언급한다. 그러자 해먼드 노인은 과거의 이혼 법정에서 다룬 것이라곤 재산 다툼이었을 뿐이고 사적 소유가 없는 “우리들 사이에서는 사유재산에 관한 분쟁들이 일어날 수 없다”(48쪽)고 말한다. 민법이나 형법도 없다. 해먼드 노인의 설명에 따르면 과거에 폭력적인 범죄들은 소수의 특권층에게만 자연적 욕망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하고 대다수에게서는 그런 기회를 박탈해버린 사적 소유에 관한 법률들 때문에 발생했다. 사적 소유가 폐지됨으로써 그로 인해 초래되던 모든 폭력적 범죄들은 사라졌고 상습적으로 죄를 저질러 범죄자로 분류되는 사람들도 없다. 폭력이나 죄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은 사회에 적대적인 상습적 행위가 아니라 실수로 인한 위반 행위다. 게스트는 위반 행위가 발생하면 처벌함으로써 사회를 보호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해먼드 노인은 처벌이란 “적국에서 무장한 군대처럼 살고” 있는 지배자들이 느끼는 “두려움의 표현”이라면서 “친구들 사이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도 처벌할 필요도 없다”고 답한다(71쪽). 살인 같은 비극이 발생할 경우 가해자는 깊이 뉘우치며 속죄할 것이고, 그보다 덜 폭력적인 행위의 경우에는 가해자가 “아프거나 미치지 않았다면 반드시 슬픔과 굴욕감을”(71쪽) 느껴 속죄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해먼드 노인은 처벌할 경우 가해자가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느끼는 슬픔과 굴욕감은 처벌의 형태로 자신에게 가해지는 행위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으로 변할 것이라고 덧붙인다. 평등이 구현된 유토피아에서 슬픔과 굴욕감 같은 감정은 일종의 교정 기능을 담당하고, 위반 행위들은 “단순한 돌발적인 질병”(72쪽)으로 처벌이 아니라 치유의 대상이다.



사적 소유권의 폐지는 또한 필연적으로 정부의 소멸을 가져왔다. 해먼드 노인은 19세기에 의회는 민중들을 기만하고 지배층의 이익만을 보호하는 “방범 위원회”(65쪽)였고 정부는 군대와 경찰이란 폭력을 사용하는 “법정”(66쪽)의 역할을 수행했는데, 이런 법정에서 정의가 실현되는 것은 기적으로 간주되었다고 지적한다. 사적 소유권이 폐지된 사회에는 그런 정부가 존재할 수 없고 정치도 없다.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과 국가들 사이의 경쟁 체제도 사라지고 없다. 해먼드 노인의 이런 설명은 근대 자본주의 국가란 자본가 계급의 이익만을 보호하는 인위적 기구로 공산주의가 실현되면 소멸되어야 한다고 보는 마르크스주의적 입장과 유사하다. 통치 기구인 정부가 소멸한 유토피아에서는 시민들이 상호 협정을 통해 일들을 처리한다. 하지만 협정들에 대해 설명해달라는 게스트의 요청에 해먼드 노인은 과거에 비해서 삶이 간소화되었지만 너무 복잡해서 상세히 설명할 수는 없으며 직접 살아봐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종합적인 설명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다만 개인적인 문제는 개인이 원하는 대로 처리하고 공동체 전체의 관심사는 다수결의 원칙에 따른다고 말한다. 이때 다수결의 원칙은 단순히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치 구역에서 충분한 토론과 합의를 거쳐 의견을 모으고 이견을 가진 소수의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거친 후 다수결로 처리되는 것을 말한다.


19세기의 교육도 해먼드 노인의 비판을 면치 못한다. 그가 보기에 19세기의 학교는 개개인의 기질과 재능과는 무관한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학생들의 정신적, 육체적 성장을 도외시하고 오히려 학생들에게 해를 끼치는 “공장”(55쪽)이었을 뿐이다. 자본의 약탈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자행되던 당시 영국은 사회 전체로 보면 너무도 빈곤하여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교육을 제공할 수 없었으며 기껏해야 상업적 지식을 가르쳤다. 대학은 스스로를 교양인이라 자칭하면서도 사회에 기식하는 계급을 길러냈을 뿐이다. 이 문맥에 따르면 19세기의 교육은 잘해야 도구적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사회에 해롭다. 반면에 공산주의적 유토피아가 구현된 미래 사회에서 상업적 교육은 진정한 학습, 다시 말해 도구적 효용성이 아니라 지식 그 자체를 위해 육성되는 지식으로 대체되었다. 교육기관으로서의 학교가 없고 학교를 지칭하는 단어 자체도 없다. 아이들은 집 짓기나 도로 보수, 정원 가꾸기 등의 노동을 즐겁게 하는 어른들을 보고 모방하면서 실용적인 기술을 배운다. 책을 통한 교육의 경우에는 원하는 주제와 관련해 읽고 싶은 책을 읽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에 능통한 사람의 설명을 통해서 배운다. 게스트에게 교육이란 주로 책을 통한 마음과 정신의 함양을 뜻한다면, 유토피아에서 교육은 개인의 기질과 재능, 취향에 맞는 일을 찾도록 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회에는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정보를 강제로 주입하는 교육이 없으며 아이들에게는 성장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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